수필

비 오는 날의 오후

거북이3 2014. 10. 29.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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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오는 날의 오후

                                                                                                                                      이 웅 재

  강원도 홍천에는 ‘비 오는 날의 오후’라는 펜션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비 오는 날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차분하게 안정된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감성적이 되도록 만든다. 왜 그럴까?

  ‘비’란 ‘대기 중의 수증기가 지름 0.2mm 이상의 물방울이 되어 지상에 떨어지는 현상’이란다. 0.2mm라는 것은 이슬비의 가장 작은 크기를 나타낸 것이다. 이보다 더 작은 구름방울은 150m 정도만 낙하해도 증발되어 사라져 버리므로 빗방울이 될 수가 없단다. 1개의 빗방울은 10만 개의 구름방울로 이루어진단다. (네이버 지식 IN ‘비란?’ 참조)

  ‘비란’ 결국 물방울인 것인데, ‘물방울’ 중의 하나가 ‘눈물’이라는 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눈물’이란 모든 감정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감정인 ‘슬픔’을 나타내는 상관물이다. 아무리 화가 나 있어도 울고 있는 여성에게는 더 이상의 비난을 퍼부을 수가 없다는 점은 모든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깨우치고 있으리라. 여성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울고 있을 때라는 말도 바로 이러한 순수 감정을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비가 사람을 감성적으로 이끌어 가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비[雨]는 비(悲)를 위한 상관물이었던 것이다.

  모든 생명체가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공기와 물이 필수적이다. 자연 현상 중에서 그 필수적인 물을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비’라고 할 수가 있겠다. 사람들이 비에게 약해질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낄 수 있는 날은 맑은 날보다 비오는 날이 더 높은 확률을 차지하고 있다. 사랑을 고백하려거든 비 오는 날에 할 일이다.

  김지미, 최무룡이 주연을 맡았던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라는 영화도 있었다. 1959년 개봉된 영화인데, 김지미나 최무룡 못지않게 패션 디자이너인 앙드레김이 프랑스 종군기자 역으로 출연했던 영화이다. 비오는 날 중에서도 오후 3시가 더욱 사람들의 마음을 아리게 만드는 시간인 모양이다.

  오후 3시는 아니지만 해질녘을 좋아하는 사람으로는 국립생태원장인 최재천도 빼 놓을 수가 없다. 그는 조선일보 2014.10.28자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여울’에서 말했다.

 

  나는 하루 중 어둑어둑 해질녘을 제일 좋아한다. 그 어슴푸레한 ‘빛결’이 내 마음 깊숙한 곳까지 가지런히 빗겨주는 그 느낌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아주 밝은 것, 아주 깜깜한 것보다는 ‘그 어슴푸레한 빛결’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거기에 딱 맞는 것이 ‘비 오는 날의 오후’가 아닐까 싶다. ‘사랑을 고백하려거든 비 오는 날의 오후, 아니, 가을비 오는 날의 오후’가 더 좋겠다. 봄비도 있고 겨울비도 있지만, 낙엽이 떨어지는 조락(凋落)의 계절이 적격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런데 왜 빗방울은 맞아도 아프지가 않은 것일까? 낙하하는 물건은 중력가속도가 붙기 때문에 아주 작은 물체라도 그 충격은 배가되는데도 말이다. 63빌딩 꼭대기에서 침을 뱉었을 때 지상에서 그 침을 맞은 사람은 꽤 아프다고 한다. 아픈 것보다는 훨씬 더 기분을 잡치겠지만…. 그런데 비를 맞으면서 아픔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비가 아주 높은 하늘에서 떨어지기 때문이란다. 낙하하는 가속도의 힘과 공기의 저항으로 인한 힘의 합력이 0이 되는 때가 있다고 한다. 이때부터는 속도가 늘지 않고 등속운동을 하게 되어서 높은 곳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데도 그것을 맞는 사람은 아프지 않다는 것이다.(Nate 지식 참조)

  그러니 찢어지다 못해 우산살마저 부러진 우산을 가지고 억수처럼 내리는 비를 다 맞으면서 허겁지겁 뛰어가는 행태일랑은 보이질 말고, 차라리 영국 신사처럼 느긋하게 처신할 일이다. 더구나 가을비는장인 구레나룻 아래에서도 피한다’ 했으니 호들갑을 떨 필요는 더더욱 없다. 차라리 촉촉이 내리는 비에 온 몸을 내맡기는 것이 더욱 낭만적이지 않을까? 그리고는 누군가처럼 마음마저 젖은 채, 주점에라도 들러 ‘나를 마시는 것’은 어떨는지?

  가을비에 대해서는 일찍이 신라 시대 한문학의 비조인 고운(孤雲) 최치원도 ‘추야우중(秋夜雨中)’이라는 시를 남겼다.

 

秋風唯苦吟 (추풍유고음: 가을바람에 괴로이 읊나니)

世路少知音 (세로소지음: 세상에 나를 알 이 적구나.)

窓外三更雨 (창외삼경우: 창 밖엔 쓸쓸히 밤비 내리는데)

燈前萬里心 (등전만리심: 등 앞의 외로운 마음 만리를 달리네.)

 

 

  여기서도 계절은 ‘가을’이다. 그리고 시간은 좀더 늦은 시간인 ‘3경(밤 12시 전후)’이다. 만물이 고요히 잠든 시간, 고운 선생은 잠 못 들어 한다. 이제까지의 학자들은 그 이유를 고향 생각 때문이라고 풀었다. 하지만 ‘세로소지음(世路少知音)’이라고 했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당나라에서 고향인 신라 땅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귀국 후 6두품이라는 출신 성분 때문에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 수가 없었던 그가 차라리 당나라에 있을 때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봄이 훨씬 합리적이다. 그러한 그는 한때 신선술 쪽으로도 관심을 돌려 온전한 신선이 되는 방법을 기술한 글 ‘가야보인법(伽倻步引法)’과 같은 저술도 남겼을 뿐만 아니라 해인사 학사대(學士臺)에 갓과 신발을 벗어두고 가야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됐다고 한다.

  가을이다. 그리고 오후 시간이다. 마침 비도 소록소록 내린다. 나도 이 가을밤에 술 한 잔이라도 마시고 훨훨 신선이나 되어 볼까?                 (14.10.28. 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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