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웅재의 사진

가회동 백인제 가옥 투어1, 18.7.28.19:00~

거북이3 2018. 7. 29. 13:39

*18.7.28 오후 7시 조금 못되어, “백인제 가옥”에 도착, 안내소에서 알려주는 대로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는 문간방에서 잠시 더위를 식힌 다음 해설사가 나와서 함께 투어를 하고, 지하철을 타고 9시가 조금 넘어서 귀가함.
*투어 끝나고는 해설사에게 용마루의 상량문은 한 번도 못 보았다니까 안방 쪽에 있는데, 가려져서 그렇다면서 대문 쪽에서는 볼 수 있다고 하였으나 날이 어두워진 때문에 볼 수가 없었고,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에 대해서는 내 충렬여상 때의 제자인 한수연 씨가 어린이용 도서로 출판한 “할아버지 손은 약손”(영언문화사, 2005.4.20.3판 2쇄, 224p.)이라는 책도 있어서 매우 반가웠다고 했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Seoul Museum of History의 백인제(白麟濟) 가옥 소개를 다음에 옮겨 본다.
북촌 가회동에 위치한 백인제 가옥은 근대 한옥의 양식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일제강점기 한옥입니다.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460㎡의 대지 위에 당당한 사랑채를 중심으로 넉넉한 안채와 넓은 정원이 자리하고, 가장 높은 곳에는 아담한 별당채가 들어서 있습니다.
전통적인 한옥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근대적 변화를 수용하여, 건축 규모나 역사적 가치 면에서 윤보선 가옥과 함께 북촌을 대표하는 건축물입니다.
백인제가 건축의 특징
1907년 경성박람회 때 서울에 처음 소개된 압록강 흑송(黑松)을 사용하여 지어진 백인제 가옥은 동시대의 전형적인 상류주택과 구별되는 여러 특징들을 갖고 있습니다.
사랑채와 안채를 별동으로 구분한 다른 전통한옥들과는 달리 두 공간이 복도로 연결되어 있어, 문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해설사의 말로는 그래서 바깥 양반이 대낮에도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부인 곁으로 갈 수도 있었다고 했다.) 일본식 복도와 다다미방을 두거나 붉은 벽돌과 유리창을 많이 사용한 것은 건축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 것입니다. 또한 사랑채의 일부가 2층으로 건축되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전통한옥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백인제 가옥만의 특징입니다.
정원에서는 당당한 사랑채를, 중정에서는 넉넉한 안채를, 그리고 후원에서는 아담한 별당채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백인제 가옥은 우리 한옥의 다양한 아름다움이 한 자리에 모인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백인제(1898~?)는 일제강점기시대의 의사이며, 구루병과 혈액에 대한 연구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주소 03055  서울 종로구 북촌로7길 16 (가회동)  
전화번호 02-724-0200, 0232
※다른 소개를 보면, 100년 전 서울 최상류층의 생활…백인제 가옥 개방
압록강 흑송으로 건축…'안채-사랑채 연결 복도' 특징'한상룡→백인제 박사' 소유주 변화…록펠러 2세도 연회 즐겨
서울역사박물관은 백인제 가옥을 건축 당시 모습으로 복원하고 상류층의 생활을 연출해 '역사가옥박물관'으로 조성했다고 밝혔다.
북촌 일대 대형한옥 중 당시 규모로 오늘날까지 남은 건 백인제 가옥과 윤보선 가옥 두 채뿐이다. 윤보선 가옥은 현재 거주자가 있어 시민에게 상시 개방되는 건 백인제 가옥이 최초다.
※연합뉴스(2015.11.18.)의 소개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백인제 가옥은 1913년 한성은행 전무였던 한상룡이 북촌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전통방식과 일본양식을 접목해 지은 근대 한옥이다.
근처 한옥 12채를 합친 넓은 땅에 당시 새로운 목재로 소개된 압록강 흑송을 재료로 지은 최고급 가옥이다.
가옥에 들어서면 당당한 사랑채를 중심으로 넉넉한 안채와 넓은 정원, 아담한 별당채가 있다. 특징은 안채와 사랑채가 정확히 구분되는 전통한옥과 달리 백인제 가옥에는 둘을 연결하는 복도가 있고, 2층 공간도 있다는 점이다.
본채 전면에는 유리 창호를 사용해, 보온을 고려한 근대 한옥의 특징도 잘 보여준다.
안채의 대청과 툇마루는 모두 전통적인 우물마루로 구성된 데 반해, 사랑채는 일본식 장마루를 적용했다. 한상룡이 일본 고위 인사들을 위한 연회를 염두에 두고 건축했음을 짐작케 한다.
실제 이 건물에서 조선총독부 총독들과 권력가들은 물론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 2세도 연회를 즐겼다.
한때 서울시장 공관 후보지로도 올랐으나 이러한 역사 탓에 제외되기도 했다. …
한상룡은 경영상 어려움으로 이 가옥을 1935년 개성 출신의 민족 언론인 최선익에게 넘겼다. 1944년에는 외과 명의이자 오늘날 백병원 창립자 백인제 박사의 소유가 됐다.
1968년부터는 백 박사의 부인 최경진씨가 원형을 거의 보존하며 이 집에 살아오다 2009년 서울시가 최씨로부터 가옥을 매입했다. 가옥은 1977년 서울시 민속문화재 22호로 지정됐다.
박물관은 바깥주인의 사랑방, 안주인의 안방, 할머니와 아들 내외의 건넌방 등 가족구성원에 따라 방별로 전시 콘셉트를 달리한 게 특징이다.
※“나무위키”의 백인제에 대한 해설을 보면 다음과 같다.(최근 수정 시각: 2018-07-28 20:33:21)
백병원의 표어가 인술제세(仁術濟世), 인덕제세(仁德濟世)다. 인제대학교의 '인제(仁濟)'는 여기서 따온 것(...)이라고 하지만 본인의 이름(한자는 한 글자가 다르다)도 고려하여 정한 것으로 보인다.백인제 박사는 엄청난 땅부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서 범인에 대한 심리상태를 검사한 의사로 인쇄물에 대한 검사를 한 공병우 박사와 더불어, 이러한 내용이 많이 안 알려져 있다. 장기려 평전에서는 이러한 사건 개입 때문에 납북 대상자로 선정된 이유라는 서술이 있다.유명한 제자로 장기려 박사가 있다. 동생으로 친일관료이자 일본 귀족 백붕제가 있다. 백붕제의 아들이 문학평론가 백낙청이다. 즉 백낙청이 백인제의 조카이다. 백낙청에게 백인제는 백부가 된다. 종손주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백영경 교수이다. 시인 백석도 친척이다.
…1946년 12월 17일에 한국 최초의 민립 공익법인 재단법인 백병원을 창설하였고, 1946년 10월 경성의전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국립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통합될 때 제2부속병원장 겸 제3외과 교실의 주임교수를 맡는다. 이후 아쉽게도 6.25 전쟁 당시 피난을 못가서 납북되어 이 이후의 행적이 미상이다.
…1972년, 백낙환 원장[1]이 13층 건물을 신축하여 16개과 140병상의 현대적인 종합병원으로 리모델링해서 위기에서 벗어났다.
[1]백인제 박사의 조카다. 창비의 설립자이자 서울대학교 영문과 교수며, 광주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의 명망가인 백낙청 교수의 친형이다.
※해설 중에는 비치되어 있는 사진 설명도 있었는데, 기억에 남는 인물로는, 이광수와 그 부인 허영숙(許英肅) 여사(이광수의 아들이 다녀간 적도 있는데, 이 사진은 없어서 무척 부러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재필 박사, 장기려 박사 등이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안방에는 조그마한 유리로 되어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도 있었는데, 작다고 해서 그 이름을 ‘눈꼽재기창’이라고 했다 한다.
그 소리를 들으니 아산 맹씨 행단 맹사성 고택에 갔을 때(17.10.12.) 보았던 ‘봉창(封窓:원래 봉창은 ‘채광과 통풍을 위하여 벽을 뚫어서 작은 구멍을 내고 창틀이 없이 안쪽으로 종이를 발라서 봉한 창’인데, 이 봉창은 창틀이 있었음)’이 생각나서 당시의 사진을 내 블로그 ‘사람들’(http://blog.daum.net/leewj1004)에서 찾아 첨부하여 본다.

 아래는 백인제 가옥 사진엽서 5장의 사진이다. 가옥 내부부의 총 5군데에 비치되어 있는 스탬프를 찍어 가면 5장의 사진엽서를 받을 수 있다.


대문을 통하여 들어가려면 총 10개의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노인네들에게는 무척 부담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높은 곳이라야 전망도 좋을 뿐 아니라, 건강을 위해서도 바람직했을 것이며, 방의 경우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신체의 노출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랑채와 안채로 드나드는 중문 사이에는 마당에서 안채에 드나드는 사람이 사랑채에서 눈에 띄지 말라고 ‘헛담’을 만들었다. 출입문이 없기에 ‘가짜 담’이라는 뜻의 '헛담'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 사랑채가 빤히 보이는데 내외가 엄격했던 시절 뭇 남정네가 앉아 있는 앞을 지나 안채로 가는 게 매우 곤혹스러워서 헛담을 쌓은 것이다.



몸채에서 떨어져 따로 지은 집으로, 내별당과 외별당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내별당은 할머니나 시집갈 나이가 된 딸의 거처로 쓰였고 외별당은 대문 밖이나 안 담장 밖에 꾸며져 바깥주인의 휴양 및 사교의 장으로 쓰였다.[네이버 지식백과] 별당 [annex, 別堂] (두산백과)


아래는 한수연 씨의 "할아버지 손은 약손"이라는 제목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