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문화 체험기(3)

7. 호이안, 왜 한국 유적은 없는지…

거북이3 2019. 12. 22. 16:13



7. 호이안, 왜 한국 유적은 없는지….hwp



      7. 호이안, 왜 한국 유적은 없는지

                                                                                                                                        이 웅 재

 

  우리는 이제 호이안(會安, Hội An)으로 향했다.‘평화로운 회합소라는 의미라는데, 15세기부터 베트남 해상 무역의 중심으로 발달했던 곳으로, 그 기능이 19세기 다낭으로 이전되면서 번영의 막을 내린 곳이다. 투본강(Thu Bon River)을 끼고 있는 좁은 거리는 얼핏 발칸반도의 모르타르(mortar)를 닮았다는 느낌을 주었다. 화교, 일본인, 네덜란드인 등이 마을을 형성하였던 구 시가지는 15~19세기의 베트남을 그대로 보존한 듯하면서도 현대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결합된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베트남어로는 하이포(Hai Pho:바닷가 마을, 海浦에서 유래한 이름)라고 불렀다. 구시가지는 1999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먼저, 입구의 강가에 있는 병솔나무가 우리를 반겨준다. 축축 늘어진 가지가 볼 만하였다. 마을을 조금 들어가면 호이안의 랜드마크인내원교(來遠橋)’가 나온다. 먼 곳의 무역상들이 드나드는 다리라고 해서 지은 명칭인데, 1592년 일본인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서 통상 일본교(日本橋)라고 부르며, 일본인이 살던 마을과 중국인이 살던 마을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베트남의 2만동 지폐에도 나올 정도로 널리 알려진 다리라고 한다. 이 다리에는 두 종류의 상()이 있는데, 일본인 마을 쪽으로는 원숭이상, 중국인 마을 쪽으로는 개상이 있다. 특이한 점은 다리가 그냥 다리로서의 구실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건물이 지어져서 그 내부에는 바람과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작은 사당도 있다. 건물의 내부는 바닥, 기둥, 천장이 모두 목조로 되어 있는데도 지금까지도 견고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우리나라는 왜 저와 같은 유적들을 세계 곳곳에 남겨놓지 못했을까? 좋은 말로 하면,‘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서 외국을 침략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글쎄 그 말은 우리의 약했던 국력을 스스로 미화시키기 위한 생각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 위의 건물 내부를 둘러본 다음, 건물에서 내려왔더니 그곳에는 익소라 루테아(Ixora lutea) 꽃이 예쁘게 피어 있어, 조금은 어두워졌던 마음을 밝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일본교에서 이동한 우리는 거리 좌우에 있는 여러 중국식 건물들을 둘러보았다. 어느 집 앞에는 얼핏 인동초(忍冬草, 일명 金銀花) 비슷한 꽃도 있어서 찰칵!’했는데, 나중에 그 이름을 알아보니 사군자(使君子)’라고 하였다. 꽃 전설에 따르면 발해의 옛 땅으로 추정되는 반주(潘州)의 곽사군(郭使君)이라는 사람이 이 나무를 약재로 삼아 많은 어린아이들을 치료했다고 하여 사군자(使君子)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덩굴나무로, 길이는 7m까지 자라며, 꽃잎은 5개로 처음에는 흰 색이었다가 나중에 붉은 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얼핏 금은화처럼 보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꽃도 아름다운데다가 향기도 좋아서 여러 나라에서 관상용 등으로 재배하고 있으며, 니코틴 중독의 중화제나, 회충 구제, 살충제 등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먼저 들어가 본 중국식 건물은 광조회관(廣肇會館)’이었다. 흔히들 광동회관으로 불리듯이 중국 광동(廣東) 사람들의 회관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관우(關羽)를 모시는 사당도 있다. 회관 안쪽으로는 인공호수에 아주 생동감 있는 용 조각과 그 뒤쪽 좌우에 있는 거북이 조각도 있어서, 별명이 거북이인 나는 무척 반가웠다. , 그리고 이곳에도 플루메리아 꽃나무도 보였다.

거리를 걷다 보니 가끔 가다가 건물과 건물 사이로 아주 좁은 골목도 보여서 들어가 보고싶은 마음도 생겼으나 다른 사람들의 걸음을 따라가기에도 바쁜 거북이인지라 그런 사치스런 생각은 지워버리기로 했다.

  다음엔 득안고가(Duc An House, 德安古家)를 방문했다. 건물의 안쪽으로 들어가면 표리산하(表裏山河)’라는 현판이 보인다. ‘외산내하(外山內河)’와 같은 뜻으로, 큰 산과 험한 강이 있어 아주 견고한 요새(要塞)라는 의미이다. 베트남 공산당 창당을 주도했던 사람 중 하나인 거상(巨商) 까오 홍 란(Cao Hong Lanh)이 살았던 집이기도 해서 반 프랑스의 독립운동가들과 유명 정치인들의 방문이 잦았던 곳인 때문인지, 벽에는 정치인의 사진이 많이 걸려 있었다. 지금은 7대째의 후손이 계속 살고 있다고 한다.

  복건회관(福建會館)도 둘러보았다. 중국인 회관들 중에서 가장 크면서도 정교하게 건축된 건물이다. 이 회관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중국 복건성 출신 화교들의 집합소였던 곳으로, 위험한 항해와 무역에서 뱃사람을 지켜주는 여신인 마조(媽祖)를 모시기 위한 사원(寺院)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 호이안에 처음 도착했던 여섯 명 선조들의 조각상과 위패도 모셔져 있다. 이 건물은 여러 개의 문을 통과해야만 할 뿐 아니라 나무와 화초 등이 우거져 있어서 내부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가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여기에도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용() 조각들이 많이 보였다.

  한 동안 이러한 옛날 가옥이나 회관들을 돌아보는 눈요기를 하느라고 시간을 보낸 우리 일행은, 이제 뱃속도 좀 달래주어야 할 것 같아서 거리의 끝머리에 있는 먹자골목인 시장엘 찾아 들어갔다. 거기서 커피도 마시고 아이스크림도 먹으면서 수다를 떨고 나니, 그제야 관광이 관광다워졌다.

  그렇게 호이안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자리를 잡았고, 우리는 그날 저녁 모두 모여서 호텔 앞 미케 비치의 바닷가를 걸었다. 개별적으로는 한두 번씩 나와 걸어보았겠지만, 일행 전원이 모여서 산책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단체 사진 하나를 남기지 않을 수 없다고 해서, 함께 모여 신나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게 샘이 났나 보다. 모두들김치~’를 외치며, 엄지와 검지로 하트를 만들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거센 파도가 밀려들어서는 엄마야~’하는 소리를 지르도록 우리들 모두의 신발을 흠뻑 적셔 놓는 것이 아닌가? (19.12.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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