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물열전

경북 인물열전(107)경북 인물열전(108) 조광조에 버금갈 만한 인물로 평가받았던 김식(金湜)

거북이3 2020. 8. 14.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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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인물열전(107)[신문사에서 107번호를 빼 먹고 건너 뛰었음]

경북 인물열전(108)
조광조에 버금갈 만한 인물로 평가받았던 김식(金湜)
[大東野乘 己卯錄補遺 上卷 追錄]
이 웅 재

김식(金湜:1482년[성종 13]∼1520년[중종 15])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요 학자로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청풍(淸風:지금의 충북 제천)으로 증조부는 교위(校尉) 김경문(金敬文), 조부는 사헌부 집의(執義)를 지낸 김질(金耋: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하였다가 고자질한 金礩이 아님), 아버지는 생원으로 예빈시 정(禮賓寺正)에 추증된 김숙필(金叔弼)이며, 어머니는 사천 목씨(泗川睦氏) 목철성(睦哲成)의 딸로 학식이 높아서 세간에서 흔히 여자 선비라 불리었고, 부인은 효령대군의 후손인 왕족 영신군 이이(永新君 李怡)의 딸 전주 이씨다.
김식의 자는 노천(老泉), 호는 사서(沙西), 동천(東泉), 정우당(淨友堂)이다.
중종 당시 사림파(士林派)의 대표적 인물로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화를 당했으며,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이다. 명종(明宗) 때 신원(伸寃)되어 복관(復官)되고, 선조 때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공은 어릴 때에 부친이 죽었으므로 모친을 따라 외가인 서울에서 자랐는데,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1501년(연산군 7)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연연하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뒤, 조광조(趙光祖), 박훈(朴薰) 등과 함께 이조판서 안당(安瑭)의 천거로 종6품직인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에 서용되었으며, 이어 형조좌랑·호조좌랑·지평·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조광조의 진계에는, “김식 같은 사람은 문사 중에서도 귀한 사람일 뿐 아니라 실상 얻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하였다. 기묘년 천목(薦目)에는, “기도(氣度)가 강정(剛正)하고 재성(才性)이 총명하며, 선한 일을 즐겨하고 옛것을 좋아했으며, 속됨을 벗어나 스스로 분발하였다. 학문이 넓고 식견이 순실하며, 재예와 기국(氣局)을 겸비하였다. 지조를 바로잡아 뛰어났고, 학문은 연원(淵源)이 있어 넉넉하다”고 하였다.
1519년 4월에 실시된 현량과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당시 현량과의 천거 명목에는 성품·기국·재능·학식·행실·행적·생활 태도 또는 현실 대응 의식 등의 일곱 가지가 있었는데, 급제자 28인 가운데 유일하게 7개 항목에서 모두 완벽하게 평가받아, 조광조에 버금갈 만한 인물로 평가되어 급제자 발표 닷새 만에 성균관 사성이 되었고, 며칠 후에는 계자(階資)를 뛰어올려 홍문관 직제학을 거쳐 대사성에 임명되기까지 하였다.
그해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趙光祖) 등 4명과 같은 죄목으로 죄를 정해 사율(死律)에 해당되었다. 임금이 공과 김구(金絿)는 특히 사율을 감해서 장류(杖流)하기를 명했으나 대신이 논란 고집하여서 선산(善山)으로 장배(杖配)되었다.
이어서 기묘사화의 여파로 일어난 신사무옥(辛巳誣獄)에 다시 연좌되어 절도로 이배된다는 소식을 듣고, 거창(居昌縣)에 숨었다가 소초(疏草)를 옷 속에 품고‘군신천재의’(君臣千載義:日暮天含黑 山空寺入雲 君臣千載義 何處有孤墳, 해는 기울어 하늘은 어둑한데 텅빈 산사에는 구름만이 떠도네. 군신간 천년 의리는 어느 외로운 무덤에 있는가)라는 시를 남기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상권 추록(追錄)에 나오는 소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망명한 신 김식(金湜)은 삼가 절하고 머리 조아려 하잘것없는 신의 촌성(寸誠)을 주상 전하께 토로(吐露)하나이다.…심정(沈貞)은 본래 탐욕이 한이 없고 흉교(凶狡)하기는 형용하기 어려운 소인이었습니다.…그런데 조광조가 성상에게 지우(知遇)를 받게 되자 배우는 자가 취향을 같이하고 소민(小民)이 착함을 칭찬하니, 떳떳하지 못한 참문(讖文)으로써 가만히 전하의 뜻을 움직이게 하였습니다.…인친(姻親) 이빈(李蘋)을 등용하여 간장(諫長)으로 삼고, 대관(臺官)으로서 조금이라도 청론(淸論)이 있으면 이빈을 시켜 공격하여 쫓게 하고 전하가 듣고 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남곤과 함께 무사(武士)를 많이 모아 조석으로 문간에 가득한 것은 그 뜻이 어찌 사림을 제거하려는 것뿐이겠습니까. 그러한즉 조정은 전하의 조정이 아니라 심정의 조정이니 전하의 형세가 또한 외롭지 않겠습니까.…만약 전하께서 끝까지 깨닫지 못하시면 조정에 대하여 어찌하며, 사직(社稷)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명사(名士)를 다 죽이고서 나라가 보존되는 일은 예전에 없었습니다.…”
양근(楊根)의 미원서원(迷原書院), 청풍의 황강서원(凰岡書院), 거창의 완계서원(浣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2019.12.26. 1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