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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한 그릇에서도…

거북이3 2006. 2. 17. 21:53
 

         라면 한 그릇에서도…

                               이   웅   재

 “때르르릉, 때르르릉….”

 거실의 전화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때르르릉, 때르르릉….”

 내 전용 주거공간은 거실이다. 언젠가 별일도 아닌 것으로 아내와 티격태격한 이후 며칠 동안 거실에서 기거하다 보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서 이후 나는 거실을 내 전용 주거공간으로 삼기로 했던 터였다.

 그런데 그 거실의 전화기 벨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는 것이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나는 한참 ‘행복이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는 것을 조금은 심각한 체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렇다고 그 때문에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집으로 걸려오는 전화의 경우, 나는 거의 받지 않는다. 그건 대부분 나에게 용건이 있는 전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십중팔구 아내에게 걸려오는 전화인 것이다.

 나에게 볼 일이 있는 전화는 내 핸드폰으로 걸려온다. 더러 집 전화로 걸려오는 일도 있긴 하지만, 세 번 정도 벨이 울려도 받지 않으면 벨 소리는 곧 잠잠해지고 금세 내 핸드폰의 ‘휘파람’ 소리가 신나게 울려 퍼지게 마련이다.

 “때르르릉, 때르르릉….”

 싱크대 쪽에서 아내가 달려온다. 설거지를 하던 손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그걸 앞치마에다가 훔치면서 아내가 달려온다.

 “여보세요!”

 역시 아내의 전화였다. 나는 아내의 전화 내용을 다 듣고 있었다. 그것은 엿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 전용 주거공간에서 전화 통화를 하기 때문이다. 듣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하는 실정이라서 오히려 내 쪽에서 달가운 일이 아니다.

 “보자기라구요? 보자기라면 우리집에 많이 있는데요.”

 아내는 상대방에게 잠깐만 끊지 말고 기다리란다. 그러더니 안방으로 부리나케 달려간다. 장롱문과 문갑 서랍 여닫는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들리더니, 조금 있다가 보자기를 한 아름 안고 나온다.

 “가만, 가만….”

 이번에는 거실 문갑을 열더니 줄자를 꺼내어 보자기의 폭을 잰다.

 “전부 1m짜리인데요. 아, 5cm 더 되는 것이 하나 있네요. 그것보다 더 큰 거요. 그런 건 없는데요.”

 그러면서 이것저것 그 크기를 대어 본다.

 “할 수 없지요, 뭐. 관보쇼핑에 가서 감을 끊어다가 만드는 수밖에는요. 서둘러야 되겠네요. 네, 금방 집 앞으로 나갈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아내는 급히 외출복으로 갈아입더니 곧 집을 나가 버렸다.


 보자기라? ‘물건을 싸서 들고 다닐 수 있도록 네모지게 만든 작은 천’을 가리키는 말이렷다? 한자어로는 ‘보자(褓子)’라고 하기도 하지, 아마? 갑자기 보자기는 왜 찾고 난리일까? 어쩌다 보자기로 싼 선물을 받게 될 때면, 내용물을 빼고 난 다음 그것을 쌌던 보자기의 처리가 아주 난감했었다. 특별히   쓸모는 없고 그렇다고 버리기도 아까워서 그냥 모아두기만 했었는데, 그걸  왜 찾고 야단일까?

 예전에는 학생들의 책보를 비롯하여 보자기가 많이 사용됐었다. 무엇이든 손에 들고 다닐 물건들을 싸서 가지고 다니곤 했을 뿐만 아니라 귀중한 물건들을 보관할 때에도 보자기를 이용했었다. 하지만 요즈음엔 가지가지의 가방들이 생겨나서 보자기의 영역을 축소 내지는 거의 폐기시켜 버리고 만 실정이 아니던가?


 이튿날 점심시간은, 식구들의 사정에 맞추다 보니 좀 늦어져 2시쯤이 되었다. 아내는 열심히 점심상을 차리더니 배고픈데 빨리들 식사를 하란다. 식탁 의자는 다섯 개, 맏딸이 시집을 갔으니 빈자리는 하나라야 되는데, 자리에 앉고 보니 빈자리가 두 개였다. 아내가 앉지 않은 때문이다.

 “당신은?”

 “나는 예식장 피로연장에 가서 먹을 거예요.”

 “누구 결혼식이 있어?”

 “아니요.”

 “그럼?”

 “아, 피로연 음식 예약을 해야 하는데 오늘 시식하러 간대요.”

 아하, 그러고 보니 어제 아내가 전화를 하던 생각이 났다. 알고 보니, 신부 집으로 갈 예단을 쌀 보자기가 폭이 1m짜리인데 조금 작아서 그 끝을 묶을 수가 없어 우리집으로 전화를 걸었던 것이란다. 그래서 관보쇼핑으로 갔던 것인데, 파는 보자기도 없고 끊어올 감도 마땅한 게 없었더란다. 혹시나 하고 우리집의 1m 5cm짜리 공단 보자기를 가지고 가서 묶어 보았더니 꼭 맞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피로연 음식 예약을 하러 가는데 시식하러 같이 가자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집 점심 메뉴보다는 몇 만 원짜리 피로연 음식이 훨씬 고급스러운 식단일 터이니 마나님 뜻하지 않은 횡재를 하였다는 흐뭇한 표정이었지만, 우리들이 점심을 먹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차츰 입맛을 다시기 시작한다. 2시가 지난 시간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도 아내가 그 비싼 피로연 음식을 맛볼 시간은 적어도 3시는 넘어야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자, 좀 안 됐다고 여겨진다. 

 배고픈 건 직접 고파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배고픈 설움’, 그것은 우리가 6․25때 지겹도록 느꼈던 설움이 아니던가? 지금 아내는 한 시간쯤 뒤에 먹을 수 있는 ‘우아한 포식’을 상상하면서 그 ‘배고픈 설움’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아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아한 포식’보다는 차라리 지금이라도 라면 한 그릇 끓여 먹는 것이 훨씬 맛있을 텐데….


 ‘행복이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배고픈 아내가 그 대답을 쉽게 찾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렇다. 행복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값비싼 것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행복은 라면 한 그릇에서도 올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