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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고맙구려, 젊은 친구여!

거북이3 2006. 3. 9. 11:19
 

정말로 고맙구려, 젊은 친구여!                                                                                                      이   웅   재


친구가 만나잔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만나자는 친구에게서 직접 연락이 온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 그러니까 초등학교 동창회의 총무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놈은 건장했다. 오랜 동안 운동으로 다져진 몸, 나 같은 약골은 그런 놈의 늠름한 체격은 하나의 우상으로까지 치부되었었다. 그런 그가 병원에서 만나잔다. 병원에서, 병원에서….

 “모레가 발인이니까, 오늘 시간 없으면 내일 들르라구. 나두 내일 가 있을 테니까….”

 삼성의료원 영안실, 놈이 거기서 만나자는 것이다. 제기랄.


 오후 2시. 놈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보통의 경우라면 저녁 무렵에 찾아갈 것이었다. 세상의 술을 인류의 적이라고 마셔서 없애고자 노력하고 있는 나였지만, 놈과 만나서는 한 잔의 술도 마시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아니, 이미 놈이 나와의 대작을 기피해 버리지 않았는가? 못난 놈, 그렇게 건장하던 놈이 왜 비실비실하는 나 같은 놈보다 먼저 가느냔 말이다.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우리집은 분당하고도 야탑동. 최근 9407번 버스가 생겨나서 아름마을에서 타면 곧바로 삼성의료원을 갈 수가 있게 되었다. 고속화도로로 가는 버스라서 금방 갈 것이다. 차를 타려고 아름마을로 가고 있었다. 건널목에는 빨간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런데 9407번 버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제기랄, 최소한 15분은 기다려야 되겠지? 건널목을 건넌 나는 그 15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를 궁리하면서 걷고 있었다. 그러한 내 눈에 국민은행 간판이 들어왔다. 아 참, 그렇지, 나는 은행으로 들어갔다. ‘안내’ 띠를 걸친 은행원이 함박웃음을 웃으며 다가왔다.

“무슨 일을 도와 드릴까요?”

 남자 행원이었다. 아주 건장했다. 건장한 놈이 먼저 갔는데…. 부질없는 생각이 떠올라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지워버리려고 노력했다.

 “저어…, 교통 범칙금을 내려고 그러는데요….”

 “아, 녜….”

 안내는 친절했다. 번호표를 뽑으면서 내게 말했다.

 “그건 창구에서 내셔야 합니다.”

 그런데 창구의 여직원은 벌써 일어나서 내게 인사를 한다.

 “어서 오십시오.”

 운 좋게 손님이 별로 없어서, 은행에 들어가자마자 내 차례였다. 그렇다면 번호표를 뽑을 필요조차 없었을 텐데….아니, 그렇지 않다. 그들은 친절했다. 범칙금을 내기 위해선 번호표를 뽑고 창구에서 내야 한다는 것을 별로 기분 나쁘지 않게, 그러니까 친절하게 내게 교육시킨 것이다. ‘교육시킨다’는 느낌을 갖지 않게 하면서 말이다. 그들의 친절로 금방 볼일을 끝낸 내가 버스정거장 쪽으로 갔더니 곧 내가 타야 할 버스가 도착하였다.

 기사는 중년 남자 분, 인상이 좋았다. 버스는 고속화도로를 신나게 달렸다. 수서IC에서 고속화도로를 빠져 나가는 버스. 나는 기사에게 물었다.

 “삼성병원 가려면 어디서 내려야 되나요?”

 “입원환자 면횐가요, 아니면 영안실….”

 “예, 영안실이요.”

 “아, 그러면 이번 정거장에서 내리세요.”

 “고맙습니다.”

 잘 내렸다. 바로 건너 쪽이 삼성의료원 영안실. 그런데 얼핏 건널목이 보이지 않는다. 내 뒤를 따라 내린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가방을 든 샐러리맨으로 여겨지는 친구, 그 친구가 나를 보며 말한다.

 “여기엔 건널목이 없어요. 저 앞쪽으로 가서 건너셔야 돼요.”

 그러면서 앞서 걸었다. 하릴없이 나는 그를 따라갔다. 삼성의료원 앞 버스 정거장까지 가서야 육교가 나타난다. 거기서 다시 거꾸로 한 정거장을 되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니까 n자를 거꾸로 유턴한 셈. 두 정거장을 걸어야 했던 것이다. 거리로서야 엄청난 차이겠지만, 그럴 수가…? 한 정거장 버스를 타고 와서 내렸는데, 길을 건너기 위해서 두 정거장을 걸은 것이다.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버스 기사님, 그분은 정확했다. 나중 알고 보니 그가 내려준 곳에서 지하도를 건너면 금방 장례식장에 닿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지하도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엉뚱한 사람의 친절(?)로 인하여 ‘버스는 한 정거장 타고 두 정거장을 걸은’ 사람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어쨌든 걷다 보니 ‘보행자 통로’가 있어 그리로 갔다. 그곳은 언덕길, 그냥 길 따라 가다가 장례식장으로 갔으면 언덕길을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아도 되었었다.

 보행자 통로로 올라간 곳은 병원 내의 산책로.

 ‘에라, 모르겠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산책이나 하자.’

 나는 느긋한 심정으로 좌우의 나무며 풀들을 일일이 관찰하면서 장례식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 길은 차츰 내 마음에 들었다. 한껏 물든 단풍 하며, 찬 서리에 푹 죽어버린 풀꽃들의 그 후줄근한 모습, 그 모두가 내게는 ‘삶’과 ‘죽음’이라는 것을 곰곰 생각하게 해주는 상관물들이었다.

 나는 차츰 비실비실하면서도 건장한 내 친구보다 별 문제 없이 살아남았다는 것에 고마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이 한적한 산책로를, 그것도 오붓하게 나 혼자서 걷고 있다는 것에 일말의 행복감마저 드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를 느끼기 시작했다. 교통 범칙금을 내게 된 일마저도 살아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일이라서 고맙게 느껴지고 있었다.

 내게 잘못된 친절을 베풀었던 젊은 친구여, 그대 덕분에 나는 정말로 간만에 느긋한 심정으로 내 보잘것없는 삶이 실은 엄청난 축복된 삶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소이다. 정말로 고맙구려, 젊은 친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