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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불효교 (孝不孝橋)

거북이3 2006. 3. 21. 23:10
 

  효불효교 (孝不孝橋)                

                                                                                        이   웅   재 


사람이 있는 곳엔 반드시 길이 있다. 길은 잘 닦여져 누가 보아도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전혀 길인지를 알아볼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세상과 등지고 살아가려고 인적미답의 곳으로 찾아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그가 찾아 들어가느라고 밟았던 흔적은,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남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그것도 하나의 길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보이는 것만 길로 인정해 주고, 보이지 않는 길은 길로 치부하지 않으려고 한다.

 길은 이쪽과 저쪽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로서의 기능을 지닌다. 따라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순전히 길의 덕분이다. 너와 내가 서로 만날 수 있는 것도 길이 있어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길은 자주 다닐수록 뚜렷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주 다닌 길은 길로서의 공인을 받는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예외는 있다. 아무리 빈번히 다녀도 길로 여겨지지 않는 길, 길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길이 있다. 그 길은 바로 물속의 길이다.

 물은 흐르고 흐르고 또 흐른다. 흐르기 때문에 모든 흔적을 지운다. 그래서 물속에는 길이 남지 않는다. 길이 맺어주는 관계성에 얽매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일까? 노자의 이른바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것은 그 얽매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은 아닐는지?


 그녀는 계속 물을 건넜다. 그래야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은 건너고 건너고 아무리 건너도 길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건널 적마다 힘들었다. 그러나 즐거웠다. 그리고 다행이다 싶었다. 왜? 그녀의 길은, 다른 사람들이 함께 다닐 수 있는 길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녀만이 다니는 길이어야 하는 까닭이었다. 남들이 알면 안 되는 길인 소이(所以)였다. 그 길은 겉으로 보아서는 관계성이 드러나지 않아야 되는 길인 곡절(曲折)을 지닌 길이었다.

 그녀에게는 아들 7형제가 있었다. 그렇다면 한 동안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는 얘기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졸지에 과부가 되었다. 과덕지부(寡德之婦), 덕이 부족해서였을까? 그녀는, 그래서, 새로운 남자를 사귀었고, 그 새로운 남자에게, 전력투구했다. 헌데, 새로운 남자는 물의 남쪽에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늘 물을 건너야 했다.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교량조 ‘효불효교(孝不孝橋)’(민족문화추진회,’69.)에 나오는 얘기다.


 그녀는 기다렸다. 아들 7형제가 잠들기를…. 7명의 아들이 모두 잠들려면 밤은 아주 이슥해야만 했다. 그렇게 한밤중에 그녀는 계속 물을 건넜던 것이다. 때로는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떠 있는 수도 있었지만, 초하루나 그믐께는 칠흑같이 캄캄한 밤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엎어지고 넘어지면서도 그녀는 물을 건너기를 그치지 않았다. 한여름 밤에는 시원스런 물 건너기였지만, 한겨울에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를 참아야만 했다. 어쨌거나 그녀는 끊임없이 한밤중의 물 건너기를 계속했다. 그녀의 사랑은 그토록 진실했고 변함이 없었다.

 그녀의 7명의 아들은 어머니의 나들이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7명이나 되는데 어찌 매일같이 반복되는 어머니의 외출을 눈치 채지 못할 수가 있을 것이랴? 그런데, 그녀의 아들들은 효자였다. 때문에 한동안 어머니의 밤 외출을 모르는 체했다. 아니, 때에 따라서는 좀더 일찍 집을 나설 수 있게 해 드리려고 초저녁부터 잠에 곯아떨어지는 체하기도 했다.


 후대에 지어진 연암 박지원의 한문 단편소설 “호질(虎叱)”에 나오는 청춘과부 동리자(東里子)의 다섯 아들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수절 잘하는 과부로 알려져 천자로부터 그 고을 사방 몇 리의 땅을 ‘동리과부지려(東里寡婦之閭)’로 봉함까지 받은 동리자였지만, 그녀도 사랑을 하는 일에는 챔피언 급, 선수로서의 자질이 풍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아들 다섯 명의 성(姓)이 모두 다른 것으로 보아서도 짐작이 되는 일이다.

 하루는 그 아들들이 어미의 방에서 두런두런 남자의 목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는 어미의 방을 문틈으로 엿보았다. 어미의 방에는 놀랍게도 당시의 석학으로 알려진 북곽선생(北郭先生)이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동리자의 다섯 아들은 의논했다. 이는 필시 천 년 묵은 여우가 환생하여 북곽선생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으니 때려잡자고 의기투합했다. 그들은 어미의 방을 에워싸고 들이쳤다. 북곽선생은 황급히 도망을 가다가 벌판의 똥구덩이에 빠지게 되었다. 여기서는 어미의 방을 문틈으로 엿보는 불경(不敬)까지도 범하고 있었다.


 우리 경주부의 7형제 얘기는 그와는 아주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그들은 서로 의논했다. 어머니가 밤마다 물을 건너다니느라 고생을 하시니, 어찌  자식된 도리로서 모르는 체할 수가 있는가? 드디어 그들은 어머니가 다니시는 물길이 있는 곳에 번듯하게 돌다리를 놓아 드렸다. 당신들은 그럴 수가 있는가? 당신들은 그들의 효심을 따를 수가 있는가 말이다. 다리 이름에 ‘효(孝)’자가 붙은 연유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있었다. 그녀의 길은, 다른 사람들이 함께 다닐 수 있는 길이 되어서는 안 되는 길이어야 했다. 그녀의 길은, 그녀만이 다니는 길이어야 했다. 그녀의 길은, 남들이 알면 안 되는 길이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 그녀만의 길은 없어지고 만 것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 길을 가지 않았다. 결국 효도를 한다는 것이 불효가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다리 이름에 ‘불효(不孝)’라는 말이 들어갔다. 이 이야기는 참된 효도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나름대로 잘 말해주고 있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효불효교(孝不孝橋)’. 지금 그 다리를 고증할 수 있다면, 나는 꼭 한번쯤은 건너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