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깃장
이 웅 재
“꼬옥 참석하셔야 됩니다.”
당위성(當爲性)을 강조하는 어법. 이건 사뭇 협박조였다. 그러니, 참석 안 할 도리가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30주년 기념 동창회’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근무했던 고등학교이다 보니 ‘놈들’, 선생과 구분이 잘 안 된다. 더러는 30년 만에야 처음 만나는 친구들도 있는 모양으로 무조건 반갑단다.
“야! 오래간만이다. 너, 이름이 뭐였더라?”
“나? 이웅재.”
“뭐, 이웅재…? 이웅재…? 아니, 그럼 국어선생님 아니십니까? 이거,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나도 젊어지는 느낌인데….”
그렇게 ‘놈들’의 동창회는 진행이 되었다.
이젠 늙수그레하고 푸근한 맛이 느껴지는 남궁옥분이 나와서 흘러간 노래로 잠시 동안 지난날을 현재화시켜 주기도 했고, 곧 이어 사회를 맡은 김승현은 부부 동반한 몇 팀을 무대 위로 불러 올려서는 우리 몸의 부분 명칭 중 ‘지’자로 끝나는 말 대기 게임을 진행하고 있었다. 다음번엔 과연 무슨 ‘~지’가 나올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아야 하는 게임. 저런, 내 시간에 열심히 강의를 들었더라면, 그까짓 모가지, 장딴지, 기관지에다가 코딱지, 귀지…정도에서 쩔쩔매지는 않았을 텐데…. 손가락만 가지고도 엄지, 거지(巨指), 무지(拇指), 벽지(擘指), 검지, 식지(食指), 인지(人指), 염지(塩指), 중지(中指), 장지(長指), 무명지(無名指), 약지(藥指)에다가 소지(小指) 등등 무궁무진한 ‘~지’자 돌림의 낱말들을 배운 내 제자들인지라 그 게임에서 절대로 질 수 없는 일이었다. 쩔쩔매는 건 여자분들, 오늘 밤엔 ‘놈들’, 부인에게 큰소리 쳐도 되겠구나…, 회심의 미소를 띠고 있는데, ‘놈들’ 중 두어 명이 은밀하게 내게 접근한다.
“선생님, 기억나세요?”
거두절미, 저희들 생각만을 말하고 있으니 내가 어떻게 안담?
“뭐 말이야?”
반말하기가 조금 떨떠름하다. 하지만, 여기서 존칭을 쓰면 ‘절대로’ 안 된다. 나는 그들을 가르친 ‘선생님’이니까.
“황진이가 그렇게 예뻤다고 하시는 말씀에, 제가 ‘어깃장’을 놓았던 일 말예요. 그 시대에 사시지도 않았으면서 그걸 어떻게 아시느냐고요?”
“그랬었나?”
“그랬더니 어떻게 하셨는지 아세요?”
“기억 안 나는데…”
나는 청문회에 불려가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절 보고 ‘요리 come!’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나갔더니, 단박 ‘엎드려뻗쳐!’ 하고 소리치시겠지요.”
“그리곤?”
“뻗쳤지요.”
“그랬나?”
“딱!”
“딱?”
“대걸레 자루가 춤을 춘 거죠.”
“허어…”
“그리고는 다시 물으시는 거예요. ‘황진이가 예쁘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하고요.”
“황진이가 예쁘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네.”
다시 따닥!
“내 원칙 알지?”
“원, 투, 쓰리요?”
“그래. 황진이는 예뻤지?”
“모르겠는데요.”
따다닥!
“황진이는…”
“네, 예뻤습니다. 선생님께서 홀딱 반하실 정도로 예뻤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그러시며, 한 말씀 덧붙이시데요.
“어깃장엔 어깃장이 약이지.”
그래서 저는 집에 가서 생전 처음 국어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어깃장; 어기대는 행동’이라는 겁니다. 다시 ‘어기대다’를 찾으니, ‘반항하는 언행으로 순종하지 아니하다.’라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그 낱말 풀이를 보고 저는 선생님의 그 ‘어깃장엔 어깃장이 약이지.’ 하는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놈들’, ‘참석하셔야 됩니다.’라는 당위성을 강요할 만도 했다는 생각이, 그 늙은 ‘놈들’과 ‘브라보!’를 하면서 새삼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