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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신목현과 지공세대

거북이3 2006. 5. 17. 09:01
 

   월신목현과 지공세대

                                                                     이  웅  재

 초등학교 땐 학생회장을 하라고 해서 울었던 기억이 있다. 남 앞에 서는 걸 그만큼 무서워했던 것이다. 내가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판국에 어떻게 남들 앞에 서서 그들을 이끌어 나갈 수가 있을 것인가?

 중학교 땐 국어 선생님께서 자꾸만 교내 웅변대회엘 나가라고 하는 바람에 정말로 힘들게 나갔다가 보기 좋게 미역국을 먹었던 적이 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더욱 더 안으로 안으로만 파고들었다.

 그랬던 내가 며칠 전에는 한국수필문학가협회의 문학상 시상식 때 사회를 맡아보게 되었다. 걱정, 걱정이 앞섰지만, 누군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자 노릇 한 사람 있었더냐 하고 배포를 두둑하게 지니기로 작심을 하고 사회자석에 섰다. 말 주변이 없는 대신 우스갯소리 몇 개를 가지고 버텨보자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축사 하나가 끝난 다음이지 싶었다. 멘트 하나를 끝낸 다음 나는 옆길로 새어 버렸다.

 “후생(後生)이 가외(可畏)라고 했는데, 요즘 젊은이들 정말 두렵습니다.”

 슬쩍 운을 떼었더니, 청중들 모두가 무슨 생뚱맞은 소린가 하면서 이목을 집중하지 않는가? 이럴 땐 ‘용기’란 놈이 필요하다. 모처럼 그놈을 불러낸 후, 호기롭게 말했다.

 “학생들에게 고사성어 몇 개를 가르쳐 주면서, 소중한 삶의 지혜가 들어있는 말이니 반드시 마음속에 새겨두도록 하여라 하였더니, 글쎄 한 학생이 벌떡 일어서더니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학생의 말을 옮겼다.


 “교수님께서는 한자숙어나 고사성어 따위는 전부 알고 계시죠?”

 난감한 질문이기는 했으나, 선생은 학생들에게 믿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평소의 신념을 생각하면서 그 말을 받았다.

 “무슨 말인지 빨리 말해 봐요!”

 그랬더니, 학생 왈,

 “저어, 월신목현이라는 말인데요. 그게 무슨 뜻인가요?”

 이럴 수가? 월신목현이라?  얼핏 감이 잡히질 않는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뭐라고 대답은 해야 할 것인데….

 “아, 그거!”

 일단 뜸을 들였다. 그리고 재빨리 머리를 굴려본다. 그래도 모르겠다. 해서 말했다.

 “그거, 최근에 생긴 말이로구먼….”

 옛날에 생겨난 말, 고사성어가 아니라는 말로 발뺌을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아니, 그걸 어떻게 아시죠?”

 나도 놀랐다.


 “알고 보니, 그 말은 ‘월요일에는 신세계백화점이 놀고 목요일에는 현대백화점이 쉰다’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빙그레, 또는 쿡쿡! 웃고 있었다. 글쟁이들은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웃는 사람들이다. 남의 말에 너무 노골적으로 웃어버리면 자신의 센스가 무뎌진다고 생각해서인지…. 어쨌든 그렇게 하고서는 다시 새로운 멘트를 이어갔다. 4사람이 수상을 하는데 두어 사람의 수상소감을 들은 후 새로운 성어 하나를 툭 던졌다.

 “학생들이 이번엔 ‘지공’이라는 말이 뭔지 묻더라구요. 알 지(知)자에 빌 공(空)자! 예순 살을 가리키는 ‘이순(耳順)’, 일흔 살을 가리키는 ‘고희(古稀)’ 사이에 65세를 가리키는 ‘지공’이 하나 더 생겼다는데요.”


 그리곤 멘트 하나 할 적마다 그것을 써 먹었다.

 “인생은 허무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나이라는 것이죠.”

 예순다섯 살을 가리키는 말이니 그럴 법도 하다 싶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수상소감을 마저 들은 다음이었다. 이번에는 좀더 길게 얘기를  끌어갔다.

 “아드보 감독이 월드컵 최종 엔트리 23명을 발표했지요? 차두리는 빠지고 송종국은 들어가고, 김병지는 탈락했고 김용대는 선발됐고…. 차두리와 김병지는 ‘인생은 공이다’ 하는 걸 실감하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잔뜩 기대했었는데, 대표명단에서 빠졌으니 그럴 법도 하겠지….

 수상소감은 끝나고, 수필문학 천료 등단작가에게 등단인증패를 수여하는 순서가 되었다. 여기서도 틈을 보아서 ‘지공’ 시리즈를 꺼내 들었다.

 “송종국, 김용대도 ‘인생은 공이다’ 하는 걸 절감하고 있다는군요. 왜냐구요? 월드컵은 공차기이니까.”

 그것도 그런대로 얘깃거리가 되지 싶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마지막이 중요하다. 대단원, 그 대단원에서 모든 것은 결정이 나질 않는가? 축구경기만 해도 0:1로 지고 있다가도 종료 몇 분 전 동점골을 뽑아내고, 마지막 코너킥에서 극적으로 역전골을 터뜨려 승리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던가? 야구경기에서는 9회말 2사 만루, 투 스트라이크 스리 볼일 때, 자리를 뜨는 사람이 있던가? 그럴 때야말로 손에 땀을 쥐고, 땀에 손을 쥐고, 숨소리마저 죽여 가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마지막 던져지는 공을 뚫어져라 쳐다보지 않던가?

 “등단인증패. 아무개….”

 이젠 모든 순서가 거의 마무리단계에 들어갔다.

 거기서 나는 바로 9회말 2사 만루, 투 스트라이크 스리 볼 후의 피처를 흉내 냈다.

 “요즘 지공파가 점점 늘어난다고 합니다. 인생을 허무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일까요? 참, 걱정입니다. 그런데, 말하더라구요.

 ‘지공’의 참뜻은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사람들’이라구요!”

 그렇게 해서 마지막 공이 던져졌고, 나는 드디어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처리했다. 이번에는 소리 내어 웃는 사람까지 있었으니, 초등학교 때 학생회장을 하라고 해서 울었던 기억도 떨쳐버렸고, 중학교 때 교내 웅변대회에서  미역국을 먹었던 전력도 만회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