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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와 악마 2

거북이3 2006. 6. 24. 00:10

    천사와 악마 2

                                         이   웅   재

 실랑이 끝에 횟집에서는 나왔으나 난감한 일은 계속 이어졌다. 얼른 그곳을 뜨려고 택시를 잡아 탄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녀는 말했다.

 “너하곤 같이 안 가! 난 서울로 갈 거야!”

 큰일 날 소리, 그건 절대로 안 된다. 왜냐고? 그녀가 서울로 가 버리면, 나는 무엇이 되는가? 나는, 그림자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지 않는가? 그림자 없는 인간? 그건 유령이 아닌가? 나는 유령이 되기는 싫었다. 나를 유령으로 만들려는 그녀는 악마, 악마였다.

 택시가 동호동으로 들어서려는데 마침 모텔이 하나 눈에 띤다.

 “아저씨, 여기 세워 주세요.”

 이번엔 그녀가 나를 뿌리치건 말건 완력으로 끌고 갔다. 카운터에 이르자 나는 주문했다.

 “우리 방 두 개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온돌방으로!”

 나는 복창했다.

 “하나는 온돌방, 하나는 침대방!”

 그러면서 ‘서울로!’란 말이 나오지 않은 걸 감지덕지했다. 유령이 되는 일은 간신히 모면할 수 있겠다 싶어서. 301호 온돌방, 306호 침대방의 방 열쇠 2개를 받고 3층으로 향하면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306호는 통영항이 바라보이는 남향이었다. 총각 시절, 나는 곧잘 이 근처의 다방(이곳에서는 아직도 ‘다방’이었다)에 들러 ‘뚜우!’ 밤배 떠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침전되어가는 밀크 찻잔을 들어 쭈욱 마시곤 했었다. 나는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그건 그녀를 잊어버리자는 무언의 행동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는 내 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따로 방을 잡아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내 방으로 따라 들어오는 것은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인가?

 문득 윤동주 시인의 ‘또 다른 고향’이 생각났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고향’을 ‘통영’으로, ‘백골’을 ‘그림자’로 바꾸면 될 것이었다. 그녀가 옆 자리에 누웠다. 왜 301호를 두고 306호로 따라오는가? 그녀는 말했다. 나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라고. 옳은 말이었다. 그림자를 어떻게 딴 방에서 자게 할 수 있는가? 나는 내 생각을 바꾸어야만 함을 깨달았다. ‘그녀’라는 말부터 한참 잘못된 말, 그림자에게 무슨 성별 구분이 있을 것인가? 그림자뿐만이 아니라, 천사도 악마도 성(性)의 구별은 있을 수 없는 존재인데(그들은 2세를 생산하지 않으니까, 만일 그들이 2세를 생산해 낸다면, 유한성에서 자유로운 그들의 종족은 눈 깜짝할 사이에 온 우주를 천사 또는 악마로 채워버릴 것이 아닌가?), 왜 나는 굳이 내 그림자를 여성으로 대하고, ‘그녀’라는 여성 3인칭 대명사를 사용했는가?

 나는 내 그림자를 여성으로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아니, 내 마음 속의 악마를 몰아내기 위해서 소주 한 병을 시켜 마신 후, 온갖 절대자들을 불러 모아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신령님, 예수님, 부처님, 알라님, 마호메트님….”

 그러나 그녀는 변함없이 그녀였다. 하지만, 기도의 덕분이었는지 나는 ‘그녀’를 포근하게 재워줄 수 있었다.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여인을 껴안고 자면서 어떻게 그처럼 순수함을 지켜낼 수가 있었을까?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건 아마도 그녀가 바로 내 그림자였기 때문일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그녀는 제 방, 301호실의 샤워 실을 이용하여 시원스레 온 몸을 씻었다. 그녀의 샤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 몸까지 깨끗이 닦여짐을 느꼈다. 그러니까 그녀는 내 몸을 닦고 있는 것이었다. 그림자는 역시 나와는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점을 그때 분명히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즐겁게 해주기로 마음을 바꾸고, 먼저 남망산 조각공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공원은 예전보다는 많이 달라져 있었지만, 그런대로 아침 햇살을 받아 싱그럽게 느껴졌다. 산허리를 빙글빙글 돌면서 올라가는 공원을 돌고 돌아 오랜만에 다시 뵙는 충무공의 동상, 그 앞에서 조용히 묵념을 올리고, 조금 내려와서 간단한 운동기구들이 있는 곳의 벤치에 앉아 토요일의 아침을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즐겼다. 그녀는 다시 천사로 느껴졌다.

 나는 그 천사를 위해 산양일주도로를 드라이브하기로 했다. 3만 원쯤 될 거라는 엊저녁 택시 기사의 말이었는데, 내 앞에 와서 선 기사 왈, “미터 나오는 대로만 내세요.”

 그래서 정말 기분 좋게 드라이브를 했다. 우리 천사님은 가끔 그 환상적인 풍광에 감격하여 내 팔을 잡기도 하고(나는 얼마나 황홀했는지 모른다), 그 고운 목소리로 탄성을 발하기도 했다.(나는 얼마나 황홀했는지 모른다. 오죽하면 지금 앞의 문장과 똑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을까? 완전히 얼이 빠져버린 것이니 모두들 이해해 주시길 바랄 뿐이다.)

 택시 기사는 달아공원에서의 다도해 조망 시간을 허용해 주기도 해서, 우리 천사는 해외의 어느 곳과 비교하면서 ‘저 그림 같은 섬’에 대한 동경을 그치지 않고 토로했다. 나는 결심했다. 내 몸이 두 동강이 나더라도 돈, 돈을 벌어서 저 아름다운 다도해의 무인도 중 하나를 사서 내 사랑하는 ‘그녀’- 나의 천사에게 바쳐야겠다고.

 이틀 동안 나는 나의 그림자, 그러면서도 나에게서 독립하고자 하는 나의 천사, 그리고 나에게서 독립해 나간 나의 악마, 이 둘은 모두가 나의 내부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나라는 점을 절실하게 느꼈다.

 나에게 술 한 잔이 더 필요한 소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