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여자
이 웅 재 정리
“왕의 남자”는 대부분이 허구다. 그런데 “왕의 여자”는 사실에 근거한다는 점이 본질적인 차이라 하겠다. 여기서 말하는 “왕의 여자”는 신명호 저, 시공사 간, 2004년 판의 “궁녀”를 지칭해 본 말이다.
조선 시대 궁중에는 평상시 대략 3,000명 정도의 인원이 거주했다고 한다. 궁녀를 500명으로 잡으면 궁녀 이외의 사람들이 2,500명 정도, 그러니까 6명 중 한 사람이 궁녀였다는 얘기다.
궁녀는 혼인을 할 수 없다. 왕에게 시집 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왕이라고 해도 자신에게 소속된 궁녀들만 관할할 뿐 자신의 관할을 벗어나는 궁녀에 대해서는 선발권조차 없었다. 그러니 궁녀를 대부분 왕의 성적 대상으로 생각하는 통념은 수정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언제 왕의 눈에 들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라서 혼인이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궁녀에게 연민의 정이 느껴지는 소이이다.
궁녀는 휴가도 없고 사사로운 일로 대궐 밖에 나갈 수도 없었다. 어쩌다가 부모나 형제들이 하나씩 지급받은 신부(信符)를 가지고서 그녀들을 보러 대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을 뿐이다.
궁녀는 각 처소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친족 중에서만 선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열 살에 왕세자에 책봉된 동궁이 궁녀들을 선정하기 시작해서 왕이 되고 승하할 때까지의 수십 년 동안이 지나면, 그 왕의 주변에 있는 궁녀들은 무시무시한 친인척 집단으로 바뀌어 버릴 것이다.
그런데 궁녀의 선발은 각사 중에서도 내수사의 여자 종을 대상으로 했다고 한다. 양인 출신 여성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궁녀는 원칙적으로 공노비였던 셈이다. 노비 신분이 아니었다면, 그들의 세력을 감당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때로는 왕비, 세자빈 등이 궁궐로 들어올 때 데리고 들어오는 유모나 몸종과 같은 사노비도 있었다. 그들은 본방 나인이라고 불렸다. 본방 나인은 공노비가 아니라 사노비였다. 즉 본방 나인은 왕비, 세자비 등이 개인적으로 소유한 궁녀였다.
궁녀들은 빠른 경우 아홉 살, 조금 일찍 잡아도 일고여덟 살은 되어야 궁녀로 입궁할 수 있었으며 늦으면 20대나 30대에도 입궁이 가능했다고 보인다. 열 살 이상의 여자 아이들이 궁녀가 될 경우에는 처녀 감별을 했다고 한다. 처녀 감별은 의녀(醫女)가 앵무새의 생혈(生血)을 여자 아이의 팔목에 묻혀서 이것이 묻으면 처녀고, 안 묻으면 처녀가 아닌 것으로 판정했다고 한다. 글쎄 그런 방법을 가지고 처녀 가부를 가릴 수가 있었을까? 아마도 그 방법으로 처녀, 비처녀가 확연히 가려질 수가 있었다면, 여성들의 역사는 훨씬 더 비극적인 역사로 발전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왕, 왕비, 대비, 세자 등 각 처소에는 궁녀가 100명, 내시가 50명, 별감이 46명 등 200명 내외의 인원이 배속되기도 하고 적은 경우라고 해도 궁녀가 30명, 내시가 6명, 별감이 10명 등 46명의 인원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각 처소별로 소속된 인원들을 지휘, 감독할 사람이 있어야 했다. 게다가 각 처소에는 여성인 궁녀와 남성인 별감이 있었으므로 이들을 지휘하려면 남성과 여성 어느 쪽에도 구애받지 않을 사람들이 필요했다. 거세된 남자인 내시들을 궁중에 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으며, 내시들이 발호할 수 있는 근거도 이에 있었던 것이다.
궁녀는 최고로 올라가도 5품에서 멈춘다. 4품 이상은 궁녀가 아니라 왕의 후궁이었다. 조선 시대 양반 관료 조직은 크게 5품에서 9품까지의 사(士)와 1품에서 4품까지의 대부(大夫)로 구분되었는데, 내명부의 조직도 5품에서 9품에 이르는 궁녀와 1품에서 4품에 이르는 후궁으로 양분되었던 것이다.
평상시 궁녀들을 부르는 호칭은 통상적으로 나인[內人]이었다. 그러니까 궁녀는 간단하게 나인과 상궁으로 대별되었던 셈이다.
궁녀에게도 하인들이 있었다. 상궁이나 나인 개인에게 소속된 하녀로는 방청소 및 개인 심부름을 하는 방자나 음식 장만을 책임지는 취반비가 있었고, 각 처소에 소속된 하녀로는 물 긷기의 무수리, 세숫물이나 목욕물 담당하는 수모, 심부름 및 청소를 맡아 하는 파지 등이 있었다. 사람 위에 사람이 있었고, 사람 아래에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궁녀의 조직이었다고 하겠다.
왕의 유모는 봉보부인(奉保夫人)이라 하여 종1품으로 대우했는데, 상궁이 겨우 정 5품이었던 사실에 비하면 대단한 예우가 아닐 수 없다. 월급만 놓고 본다면 봉보부인은 영의정보다도 많이 받는 셈이었다. 게다가 5,6명의 노비를 받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봉보부인이 되면 본인뿐만이 아니라 남편도 함께 면천(免賤)되었다. 정식 유모 이외에 어쩌다가 왕에게 한번 젖을 먹인 여성들도 면천되는 특혜를 받았다고 한다. 어찌 보면 왕과 잠자리를 같이하여 빈이 되는 경우보다도 더욱 안전하게 왕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이 봉보부인이 아닐까도 여겨진다. 빈의 경우에는 많은 여인들의 질투의 대상이 되어 자리보전이 쉽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궁녀가 간통을 하면 쌍방 모두 즉시 참수했다고 한다. 임신한 자는 통상적으로 출산 이후 100을 기다렸다가 형을 집행하였는데, 궁녀의 경우에는 그와 같은 예를 따르지 않고 출산 직후 즉시 형을 집행했단다. 방자나 무수리 등 궁녀들의 하녀는 이에 해당되지 않았다. 물론 그들도 간통을 하면 안 되었다. 그들에게는 사형은 아니지만 곤장 100대에 강제 노동 3년이라는 벌이 뒤따랐다.
궁녀들이 출궁할 때는 으레 면천되는데다 근무하면서 상당한 돈을 모아 둔 경우가 많았으므로 먹고살 걱정이 그렇게 절박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돈도 있고 면천된 상태에서 출궁하여 한가하게 집에서 지내다 보면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일이 흔했던 모양이었다. 출궁한 궁녀들과 간통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종친과 조정 관료들이었다. 출궁한 궁녀들이 간통을 할 때에도 곤장 100대의 형벌이 주어졌지만, 그들이 일으키는 성 스캔들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본능이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강제한다고 해서 억제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출궁한 사람들에게도 결혼 등을 하지 못하게 한 가장 큰 이유는 궁중의 비밀 유지 때문이었다고 한다.
궁녀들이 성은을 입는다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 그러다 보니 그들 사이에는 동성애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궁녀들 사이의 동성애는 보통 대식이라고 했다. 500-600여 명에 이르는 궁녀들에게 각자 방을 주려면 어마어마한 공간이 필요했으므로 보통 궁녀들은 한 방에서 2,3명씩 함께 생활을 했으므로 동성애가 유행함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궁녀가 아닌 왕비의 경우에도 동성애가 있었으니, 문종비의 경우를 보자.
문종은 학문을 좋아하고 여색을 멀리한 모범적인 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일 밤 독수공방을 했다는 말이다. 문종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김씨는 학문에만 열중할 뿐 자신을 모른 체하는 남편을 견디다 못해 압승술(壓勝術)을 행하다가 시아버지 세종에게 적발되었다. 압승술이란 남편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한다는 일종의 민간 비방이었다. 세종은 김씨를 곧바로 쫓아내 버렸다.
그러나 김씨가 쫓겨난 후 들어온 봉씨도 외로움을 견디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봉씨는 김씨처럼 압승술을 쓰는 대신 동성애에 빠져 버렸던 것이다. 상대자는 자신의 지밀에 있던 소쌍(召雙)이라는 궁녀였다. 사실이 발각된 큰며느리 봉씨도 그날로 쫓겨나고 말았다.
궁녀와 내시, 별감들 간의 스캔들도 끊이지 않았던 것이고 보면, 성 본능이란 역시 강제로서 다스려지는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종신직인 궁녀들이 궁궐을 떠나 밖에서 장기간 머무르는 경우는 몇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자신이 모시던 주인이 세상을 떠난 경우다. 이런 경우에는 3년상을 지낸 후에 출궁하는 것이 관례라 한다.
두 번째는 궁녀가 병이 들었을 때다.
다음으로 가뭄이나 홍수 등 자연 재해가 있을 때 궁녀들을 출궁시키거나, 국가 재정이 악화되었을 때 궁녀들을 출궁시키는 경우도 있었단다.
옛날 웬만한 시골에서 1년에 쌀농사 10가마면 어지간히 사는 집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궁녀로 들어가기만 하면 1년에 적어도 10가마의 곡식이 보장되었다. 조선 시대 가난한 부모들이 딸들을 나인은 물론 궁녀의 하녀인 방자나 무수리로라도 들여보내려 했던 절박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궁궐에서만 근무한다는 특성으로 지출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먹고 입고 쓰는 웬만한 물품은 궁중에서 다 해결할 수 있었으므로 크게 돈 들어갈 곳이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비교적 쉽게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다.
일례로 17세기의 상궁 박씨를 보면, 그녀는 최소한 1만여 평의 부동산과 1명의 노비를 소유한 지주이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나인 중에서도 왕, 왕비, 후궁, 대비, 세자, 세자빈 등의 침실을 담당하는 나인을 지밀나인이라 한다. 지밀나인들은 밤에 왕이나 왕비의 침전에서 잠을 잘 수 있는 궁녀들인 것이다. 무수리나 파지 등도 지밀에서 근무하지만 밤에는 그곳에서 잠을 잘 수 없으므로 퇴근해야 했다.
경복궁의 강녕전이나 창덕궁의 대조전 등은 종간의 대청과 좌우의 동온돌과 서온돌로 구분되었다. 이 중에서 동온돌이나 서온돌이 침실로 이용되었는데, 동온돌과 서온돌은 기본적으로 우물 정자 형태였다. 중앙의 방 하나와 이를 둘러싼 8개의 방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동온돌과 서온돌이 동일한 구조이므로 침전에는 최소한 18개의 방이 있는 셈이다.
왕이나 왕비는 보통 동온돌, 또는 서온돌의 중앙에 있는 방에서 잤다. 물론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 수시로 방을 옮기기도 했다. 지밀나인들은 왕이나 왕비가 자는 방 주변의 여덟 방에 들어가 숙직을 섰다. 이때 나인들은 서로 방문을 터놓고 공개적으로 숙직을 섰다고 한다. 왕이나 왕비의 침실에서는 최소한 8명의 나인이 숙직을 섰다는 계산이다.
궁녀들은 격일제 근무를 했는데, 지밀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주야간으로 8명씩 격일제 근무를 하려면, 8명이 4교대로 근무해야 가능하다. 즉 적어도 지밀에만 30명 정도의 인원이 필요하다는 계산이다.
결국 조선 시대 궁녀들은 주간 근무자든 야간 근무자든 격일제 근무였다. 주간이든 야간이든 계산상 12시간 근무 후에는 36시간을 쉬는 셈이었다. 노동 조건으로만 본다면 그들이 받는 녹봉은 고소득이었다고 할 수가 있겠다.
궁녀는 죽더라도 무덤을 돌보거나 제사를 올려줄 후손이 없었다. 이에 대부분의 궁녀들은 죽은 후에 화장을 했다.
궁말이라는 마을은 출궁한 궁녀들이 모여 살아서 궁말, 즉 궁녀들의 마을이라 불렸다. 서울의 효자동은 내시들이 모여 살던 화자동(火者洞)이 효자동으로 바뀐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조의 후궁이었던 덕중(德中)의 파란만장했던 사랑 얘기를 덧붙여 본다.
덕중은 원래 세조의 여자 종이었었다. 그녀는 세조가 수양대군이었을 때 대군의 눈에 들어 아이까지 낳았다. 이에 세조는 왕위에 오른 후 덕중을 후궁으로 들여 소용(昭容)에 봉했다.
그런데 덕중이 낳은 아이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게다가 왕이 된 후 세조는 이런저런 일로 바쁘기만 했다. 자연 세조가 덕중을 찾는 일도 뜸해졌다. 외로웠던 덕중은 내시 송중(宋重)에게 마음을 주었다.
내시 송중은 세조에게 있는 그대로 사실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조는 이런 면에서 매우 대범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소용의 봉작을 취소하고 특별 상궁으로 강등시켜 궁중에서 그대로 살게 했다. 내시 송중도 그대로 궁중에서 일하게 했다.
이런 덕중이 사랑하게 된 다음 타자는 귀성군 이준이었다. 귀성군 이준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세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이다. 그런가 하면 세종대왕의 손자로서 세조의 조카이기도 했었다. 그는 겨우 열여덟 살에 병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스물여덟 살에는 영의정에까지 올랐던 사람이다. 귀성군 이준은 참으로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귀성군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세조를 찾아갔다.
세조는 이번에도 대범하게 처신했다. 다만 세조는 경고의 의미로 덕중을 방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덕중은 또다시 귀성군에게 편지를 보다. 이번에도 귀성군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세조를 찾았다.
덕중에게 대범한 모습을 보이던 세조도 이번에는 더 이상 그러지 못했다. 세조는 덕중의 편지를 귀성군에게 전해 준 내시 최호와 김중호를 잡아들이라고 하고 그들을 때려죽이도록 했다. 그리고 덕중도 교수형에 처하도록 했다. 이준은 옆에 있으면서 황공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니, 세조가 말했다.
“네가 왜 황공해 하느냐? 죄는 저들에게 있고 네게 있지 않다.”
그처럼 세조의 두터운 총애를 받았던 귀성군도 부럽거니와 죽음마저 무릅썼던 덕중의 사랑도 기리고 싶은 마음이다.
[06. 8. 14. 원고지 35매 분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