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특별한 날
이 웅 재
1월 13일.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었다.
그 하나.
큰아들 놈이 시집 간 누나에게 전화를 했더란다. 그런 일이 별로 없었는데, 그것도 아주 당황한 목소리로. 놀라서 물었단다.
“왜 그러는데?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있어?”
딸내미는 의문부호를 연속으로 사용했단다.
“누나, 오늘이 엄마 생일이야?”
돌아온 대답이었다고 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일단 무슨 큰 일이 생긴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물었단다.
“아침상에 미역국이 올라 왔더라구.”
그래, 그랬다. 그리고 우리 집 아침 식탁에 미역국이 오르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러니 이상스레 생각하는 것도 있을 법한 일이긴 했다.
“미역국? 꼭 누구 생일이라야지만 미역국을 먹냐?”
“그래두….게다가 갈비까지 올랐다구.”
일단은 다행이란 투로 사설을 늘어놓더라는 것이었다.
“엄마 생일은 아빠 생일 지나구두 한 달쯤 뒤야. 아직 아빠 생일도 안 지났잖아?”
“오늘이 1월 13일이잖아?”
“이 멍충아! 그건 양력이잖아? 엄마 아빠 생일은 음력으로 쇤다구. 금년엔 윤달까지 들어서 아빠 생일도 아직 멀었어. 2월 4일이 아빠 생일이라구.”
“그날은 입춘날이잖아?”
“그래, 그렇다구. 그 입춘날이 바로 아빠 생신날이라구. 그래서 그날 전후로 아빠가 앙코르와트에 가신다구 하지 않았어?”
“난 또…, 느닷없이 미역국이 올라와서 달력을 보았더니 1월 13일이잖아? 그래서 깜짝 놀랐지 뭐야. 어휴, 다행이다!”
아마도 생일 선물을 챙기지 못해서 그랬던 것 같다. 늘 말썽꾸러기로만 남아 있을 줄 알았더니, 이젠 제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음력 생일, 양력 생일 다 찾아 먹을까?
그 두울.
오늘은 이음새 문학회 정모 날이다. 정해년 첫 모임일인 것이다. 날씨는 무척이나 추웠다. 요즈음은 방학이라서 밖에 나갈 일이 별로 없다 보니, 날씨에 무관심한 편이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간편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그런데 의외로 날씨가 추웠다. 중간에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해서 빨리 모임 장소에 가서 몸을 녹여야지 생각하면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랬는데도 간신히 예정시간인 4시 정각에야 목적지엘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일까? 건물의 출입문은 1/3쯤 셔터가 내려진 상태였다.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간판도 없어졌다. 주위의 지형지물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았다. 틀림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출입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요란스런 기계음이 들린다. 뿐만이 아니었다. 뽀오얀 먼지가 시야를 흐리게 한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니 건물의 중앙으로는 시멘트 덩이가 마구 떨어지고 있었다. 건물은 해체 작업 중이었다. 분명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공사 중이라서 장소를 바꾼다는 연락도 없었는데….
찜찜하여 얼른 핸드폰을 꺼내어 모임 공지를 알려온 문자 메시지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거기엔 분명히 이곳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건물이 해체되고 있었다. 아래층이 텅 비어 있는데 우리가 늘 모이던 3층의 사무실이라고 정상적으로 업무를 볼 리는 없을 터인데도, 나는 계단을 통하여 3층까지 올라가 보았다.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하여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3층 역시 폐허였다. 계단만 아직 멀쩡한 상태였다. 재빨리 건물을 빠져 나왔다. 재수가 없으려면 건물의 간판이 떨어져 그것에 맞아 다치는 일도 있다는데…. 텅 빈 공간에서 누가 뒷덜미를 낚아채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어 섬뜩했다.
후유! 출입문을 닫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추위가 몰려왔다. 회장에게 핸드폰으로 연락을 해 보았다.
“어찌된 일이지요?”
“예. 그 건물이 공사 중이라서 장소를 옮겼어요. 이리로 오세요.”
종로 쪽으로 조금 내려오다가 그 근처에서 가장 높은 무슨 해운인가 하는 건물의 1208호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 장소엔 회장 혼자만 와 있었다. 늘 그렇다. 시간이 아까워서들 그럴까? 어느 사람의 시간이든 다 마찬가지일 텐데….
건물은 깨끗했다. 하지만 난방이 안 들어온단다. 조그마한 전기 스토브 하나가 온기를 더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기구였다. 그거라도 어디냐고 코드를 연결하여 가동을 하고 나서 그 옆쪽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사람들이 많아서 그랬을까?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 더워서 스토브를 꺼 버리기까지 했다. 선입견이라는 건 항상 그렇게 우리들의 뒤통수를 갈기기 일쑤였다.
그 세에엣
합평회를 마치고 뒤풀이 시간. 언제나 이 시간이 제일 즐겁다. 오늘의 주사파(酒事派: 이때의 ‘事’ 자는 섬길 사 자이다.)는 빈약하게 세 사람뿐이다. 모임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약화된 처지였다. 해서 비교적 간단히 일인당 쐬주 한 병으로 마감했다. 2차에는 그나마 한 사람이 또 줄어서 한선생님과 나, 둘뿐이었다. 그런데 이게 또 웬 일인가?
늘 2차로 가던 집에 불이 꺼져 있었다. 싸고 좋은 집이었는데…. 가끔은 주인 남편이 한 잔 거들기도 하고, 안주거리를 서비스로 더 주기도 하던 집인데…. 오늘은 아무래도 일진이 이상한 날인가 보았다. 어쨌거나 그렇다고 해서 주당이 그냥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근처에는 마땅한 곳이 없어서 공평빌딩 앞쪽으로 진출하다 보니 비교적 큰 포차가 보인다. 그래, 한겨울에는 저런 포차에서 마시는 것도 나름대로의 맛이 있지, 두 사람은 곧 의기투합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포장의 메뉴에는 ‘소주, 정종’ 따위의 술 이름이 안 보인다. 그래서 들어갈까 말까 하고 있는데 밖에 볼일을 보러 갔다 오는지 남자 주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왜 안 들어가세요.”
“술도 파나요?”
“술 안 파는 포차도 있나요?”
“메뉴에는 암만 봐도 국수, 오뎅 따위는 있어도 술 이름은 없어서요.”
“그거야 써 놓지 않아도 당연한 것이니까요.”
포차의 이름은 ‘병뚜껑’이었다. 한선생님은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다시 나갔고, 나 혼자 술을 시켰더니, 화장실 간 사람이 종무소식이다. 혼자 술을 따라 마시기도 그렇고 해서 그저 술병만 바라보고 앉아 있으려니까 보기에 안 되었던지 옆 자리에 앉아 있던 40대 전후의 사내가 내 자리로 옮겨온다.
“제가 한 잔 따라 드릴까요?”
그 친구는 식구들과 함께 온 사람이었다.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아내인 듯한 여인과 아들 두 명, 그렇게 네 명이 이것저것 음식을 시켜 놓고 맛있게 먹고 있는 중이었다. 그 친구는 제가 시켜 놓았던 조개구이 안주까지 가지고 와서 먹어 보란다.
처음엔 ‘이 추운 날, 식구들과 외식을 하려면 좀더 멋진 곳에 가서 하질 않고 하필이면 포차에 와서 궁상을 떨고 있담’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집은 영월, 아이들 방학을 이용하여 서울 구경을 온 것이란다. 한강 유람선도 타고 63빌딩에도 가 보고…. 그리고 이 근처에다가 여관을 잡아놓고 포차 구경을 나왔다는 것이다. 나는 지난 날 신혼여행을 배낭 메고 남한 일주를 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요새 보기 드문 쓸 만한 친구라고 금세 평가 절상하는 일을 아끼지 않았다. 그도 그럴밖에…. 난 아직도 유람선도 못 타 봤고, 63빌딩의 전망대에도 못 올라가 본 경기도 촌사람이 아니던가?
“이름이 뭐지?”
작은아이에게 물었다.
“인선이요.”
아이는 구김살이 없었다. 그게 다 아빠 덕이 아닐까 싶었다. 큰아이는 창선이라고 했던가?
“인선이는 말썽꾸러기지?”
슬쩍 눙쳐 보았다. 그랬더니 펄쩍 뛴다.
“얼마나 착한데요. 이름자에도 착할 선 자가 들어 있다구요.”
그래, 그래. 착해야지.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으로 올라간다는 그 아이는 ‘2학년’이라는 말에 특별히 힘을 주어 말했다. 그 동안 한선생님도 시원스런 업무를 마치고 돌아와 있었다.
“영월 자랑 좀 해 볼래? 영월 사람으로 누가 유명하지?”
하고 물었더니,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한다.
“세종대왕이요…고주몽이요…이순신 장군이요….”
술안주가 따로 필요 없었다. 그렇게 특별한 합석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또 쐬주 두 병을 깠다. 아니, 그 친구가 마시던 것까지 세 병을 거덜냈다. 자리를 마치려는데 그 집 식구들이 먼저 일어선다. 조금 후 우리도 술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늘 얻어만 마시는 축이었기에 오늘은 내가 좀 술값을 내어볼까 생각했었는데, 한선생님의 동작이 더 빨랐다. 아니, 아니었다. 한선생님의 동작도 무용지물이었다. 술값은 벌써 영월 친구가 모두 계산한 뒤였던 것이다.
1월 13일, 그래,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07. 1. 15. 원고지 24매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