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샘통, 샘통!
이 웅 재
07. 5. 23. 수요일.
성남문화원 고전강독반에서 야외수업을 가기로 했다. 분당 야탑역에서 모인 일행 12명은 셔틀버스에 몸을 싣고 포천 산정호수(山井湖水)로 향했다.
산정호수는 1925년, 관개용수의 공급을 위해, 옛날 궁예(弓裔)가 통곡을 했다고 해서 이름 붙은 명성산(鳴聲山) 골짜기를 막아 만든, 수심 20여 m, 약8만여 평 규모의 인공 호수란다. 버스에서 내려 나무그늘 우거진 길을 따라 10분 정도를 걸었다. 계절의 여왕 5월의 신록은 처음 우리들의 코를 즐겁게 해 주더니, 어느새 사람마다의 가슴 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눈앞에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는 푸른 호숫물은 가슴 속의 진녹색과 어울려 안팎을 온통 싱그러운 빛으로 채색하고 있었다.
호수의 둑길을 걷다 보니 김일성의 별장터가 나타난다. 산 그림자가 호숫물에 어리는 모습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었다. ‘별장식당’이라는 이름만이 예전의 사연을 짐작하게 해주고 있을 뿐, 안내판이나 표지석 하나 없었다. 아무리 우리의 역사에 오점을 남긴 인물이라 하더라도 너무하지 않나 하는 느낌이었다. 버려야 할 역사, 좋지 못한 유물이라 하더라도 나름대로 반면교사로서의 기능은 가지고 있는 일이 아닐까?
식당을 지나자 산책로와 연결된 아치형의 구름다리를 만나게 된다. 다리를 건너 산 아래로 내려가는 산책로에서 별장 쪽을 바라보니 키는 나지막하지만 제법 연륜이 느껴지는 거북등 모양의 둥치를 지닌 소나무 한 그루가 별장의 역사에 대하여 무언의 증언을 하는 듯 근엄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산책로 끝 평지에 내려서서 보니 구름다리 밑을 거쳐 떨어지는 호숫물은 곧바로 산정 폭포로 변신한다. 높이 15m, 폭 7m의 위용을 자랑하는 폭포는 바라보기만 하여도 온몸이 서늘했다. 잠깐 땀을 식힌 후, 금강산도 식후경, 참이슬을 반주로 하여 왕성한 식욕을 다스렸다.
오후 3시경. 삼부연폭포(三釜淵瀑布)로 향했다. 폭포가 있는 곳은 행정구역상 갈말읍 신철원, 어렸을 때 듣던 귀에 익은 이름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하자 내 마음은 마치 허우적거릴수록 더욱 푹푹 빠져버리는 먼 옛 추억 속으로 침잠하는 듯싶었다.
폭포수는 암벽 한가운데에서 시작하여 세 번 방향을 바꾸면서 떨어진다. 그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沼)의 모습이 가마솥 같아서 삼부연이라고 한다는데, 높이가 30여 미터나 된단다. 근처에는 음식점도, 기념품 가게도, 그리고 숙박시설 따위도 없어 천연 그대로의 장관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다음은 고석정(孤石亭). 오른쪽으로는 명성산, 왼쪽으로는 금학산, 그리고 그 바깥쪽이 동송(東松)이란다. 내 어렸을 적 고향이다. 차 안에 비치되어 있는 안내도를 보았다. 월정리역(月井里驛)이란 지명이 보인다. 월정리역, 월정리역, 아, 그렇다. 어렸을 적 아버지와 함께 원산엘 가면서 그 간이역에서 냉면을 먹었었지? 그런데, 이를 어쩐담? 나는 몇 년 전, 금강산을 다녀와서 그 기행문을 “수필문학”지에 연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추억의 장소를 온정역(溫井驛)으로 잘못 기억하고 그 얘기를 썼던 것이다. 아마도 아슴아슴한 기억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다가 그만 ‘井’자에 이끌리다 보니 그랬었던 것 같다.
월정리역 바로 아래에는 ‘샘통’이라는 지명도 보인다. 샘통, 한자어로는 천통(泉通)이라고 부르는 곳, 나는 그 지명을 보자 잠시 호흡이 가빠졌다. 동송 중에서도 샘통, 그곳이 바로 내가 6․25 한국동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살던 곳이었다. 군데군데 돌각담이라고 해서 검고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 무더기들이 있었던 현무암의 용암지대, 겨울에도 15°가량 되는 경미한 온천이 용출되는 곳, 그래서 그곳은 겨울에도 늘 따뜻한 양지쪽 같은 날씨를 지녔었다. 요즈음은 두루미[鶴]를 비롯한 철새도래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도 그곳은 민통선 지역으로서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는 곳이다. 그곳이 내 고향이었었다. 얼마나 그리운 곳이던가? 갑자기 마음이 아파온다. ‘샘통’이 ‘심통(心痛)’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차는 한탄강을 가로지른 철교 태봉(泰封)대교를 지나고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아치형의 교각이 아름답게 보이는 다리가 하나 있었다. 소위 한국판 콰이강의 다리라 했다. 1948년 북한측에 의해 착공된 후 남한에 의해 완공돼 당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承'자와 북한 김일성(金日成) 주석의 '日'자를 따서 '承日橋'란 명칭이 붙었으나 6·25당시 한탄강을 건너 북진하던 도중 전공을 세우고 전사한 고 박승일(朴昇日)대령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昇日橋'로 명명되는 등 명칭을 둘러싸고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한참을 더 달리던 버스는 철의 삼각지 전적관 주차장에서 멈춰 섰다. 그 뒤쪽에 철원 8경 중의 하나라는 고석정이 있었다. 하상(河床)이 평지보다 훨씬 낮은 협곡의 가운데에 10여 미터 정도로 솟은 석벽, 거기엔 세 칸 남짓의 동굴이 있고, 그것이 고석정이었다. 신라 진평왕, 고려 충숙왕이 정자에서 놀던 곳이란다. 하지만 고석정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조선 명종 때의 의적 임꺽정 때문이다. 그는 이곳을 근거지로 함경도에서 올라오는 진상품들을 탈취했는데, 조정에서 그를 생포하려 군사를 보낼 적마다 꺽지로 변신하여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가 버려 잡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본디 거정이라던 이름을 꺽정이라고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때 불타서 없어진 정자는 1971년에 복원되었다.
모래사장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다가 보니 ‘고령기와’라 새겨진 기와 한 조각이 눈에 띈다. 자세히 살펴보니 전화번호도 적혀 있다. 임꺽정이 별것을 다 탈취했던(?) 모양이다. 오른쪽 협곡이 좌측으로 꺽여나가는 언덕 위를 돌아 나가는 길에는 진한 찔레꽃 향기가 다시 어렸을 적의 향수를 일깨워주고 있었다. 계단은 옛날 돌각담에서 보던 이곳 특유의 현무암으로 축조되어 있었다.
매점 쪽으로 올라오니 여회원 한 분이 월드콘을 돌린다. 아, 이게 아마 예전에 임꺽정이 먹던 아이스크림인가 생각하면서 먹으니 맛이 훨씬 예스러웠고 임꺽정스러워서, 샘통이 가져다준 심통(心痛)을 다소 시원스레 해소시켜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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