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등정기 9)
환도산성의 전투와 을두지(乙豆智)의 지략
이 웅 재
묘향산에서 중식을 한 후 우리는 환도산성으로 향했다. 환도산성은 국내성에서 북쪽으로 2.5km쯤 가면 나온다. 고구려는 제2대 유리왕 때에 졸본성(卒本城)에서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기는데 장수왕의 평양 천도 전까지 고구려의 수도는 국내성이었다. 국내성은 평지에 궁터를 잡았다. 그래서 큰 전쟁이 일어나면 임금과 귀족들이 모두 국내성에서 이 환도산성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고구려의 성은 대개 이성(二城) 체제다. 평화시에는 도시기능을 하는 평지성에서 생활을 하다가 외적이 침입했을 때에는 전시성(戰時城)으로 옮겨 방어를 한다. 국내성이 평지성이라면 환도산성은 전시성인 것이다.
해발 676m인 환도산성은 자연요새를 이용하고 있다. 이것은 고구려 전시성의 특징이기도 하다. 환도산성은 동쪽은 산성자산에, 서쪽은 칠성산에 의지하여 쌓은 삼태기 모양의 성이다. 남쪽은 평지에 잇대어 있고 성으로 통하는 옹문(甕門)이 있다. 이 옹문은 고구려에서 시작된 것으로 지금은 수원 화성(華城)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다.
그 앞쪽에는 압록강의 지류인 통구하(通溝河)가 동에서 서로 흐른다. 자연적 해자(垓字)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환도산성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천연적인 요새지였다. 따라서 환도산성에 들어가려면 먼저 통구를 건너고 그 다음 다시 남문을 통과해야 한다. 쉽게 침범하기가 어려운 소이(所以)이다.
성벽의 바깥쪽 돌은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부분은 개 이빨[犬齒]처럼 다른 돌과 맞물리도록 만들어졌다. 그래서 ‘견치석’이라고 한단다. 견치석으로 쌓은 성벽은 외부에서 압력을 받을 경우 맞물리는 정도가 강해져 오히려 더욱 단단해지는 장점이 있다
환도(丸都)의 뜻은 ‘알맹이 도읍지’라는 의미이다. 생긴 모습이 동·서·북쪽이 둥그렇게 산봉우리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런 명칭으로 불리었을 것이다. 지금은 무너진 돌무더기만 남아 있는 남문을 지나 올라가노라니 빨간 찔레꽃이 반겨준다. 조금 더 가니 음마지(飮馬池)라는 조그만 연못이 나온다. 연화지(蓮花池), 양어지(養魚池)라고도 한단다. 그 명칭으로 보면 연꽃이 피어 있기도 했고 물고기를 기르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5년 전만 해도 물이 있었다는데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연못은 흙으로 메워졌고 풀까지 자라고 있어 설명을 듣지 않고는 알아보기조차 힘들다. 그러나 옛적에는 약 80㎡의 넓이에 화강암으로 된 석벽까지 갖춘 못이었으며,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고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아 성 안 인마(人馬)의 식수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음마지와 관련된 설화를 들어보자.
고구려 3대 왕인 무휼왕(無恤王=大武神王) 11년(서기 28년), 한나라의 요동 태수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그러나 고구려에서는 환도산성으로 옮겨 결사 항전을 하는 바람에 공격은 번번이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요동 태수는 병사들로 하여금 산성을 포위하도록 했다. 보급로를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이렇게 3개월이 지나자, 성 안의 고구려인들은 매우 곤궁해졌다. 이때 고구려의 명신 을두지(乙豆智)는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 냈다. 연못 속의 잉어를 모두 잡아 연꽃잎에 싸서 술과 함께 한나라 군영으로 보낸 것이다. 이를 본 요동 태수는 성 안에 물과 식량이 풍족한 것으로 판단하고 철수했다고 한다.
근처에는 수졸거주지(戍卒居住地)도 있었다. 그곳에서는 인분(人糞)도 출토되었다고 하니 화장실 자리였을 것이다. 거기서 좀더 올라가면 널따란 터가 보인다. 이곳이 왕궁 터였을 것이다. 왕궁 터 주위에는 농경지가 있어서 유사시에는 그곳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도 환도성의 특징이다.
복원된 돌로 된 전망대가 있었고 또 그것을 보기 위한 목조 전망대도 있었다. 그 건너 쪽은 군사 훈련장, 다시 그 옆쪽은 양곡창고 자리란다. 밑판은 납작하고 커다란 돌이 깔려 있었다. 습기를 막아주고 벌레들이 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주위로는 배수로였을 성싶은 홈까지 패어 있었다. 고구려 창고의 특징이란다.
산성을 본 후 그 아래쪽의 광활한 평지로 되어있는 무덤군으로 이동했다. 환도산성과 통구하의 사이가 되는 곳이다. 이곳에는 크고 작은 수천 기의 무덤이 있었다. 세계최대의 고분군(古墳群)으로 학자에 따라서는 1만 2000여 기가 있었다고도 한다. 지금도 1500여 기를 확인할 수 있으며, 특별히 눈에 띄는 것만도 40여 기가 훨씬 넘었다.
기록으로는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치열한 전투로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의 무덤으로 추정이 되는 무덤들이란다. 봉토묘와 적석묘가 섞여 있는데 적석묘가 후기의 것이라고 했다. 크기는 무덤 주인공의 위상에 맞추어 쌓여졌으며 몇몇 발굴된 무덤 안에는 벽화도 그려져 있었다고 하는데, 모두가 도굴당했단다. 잡힌 도굴꾼인 중국 교포 5명이 총살당하기도 했다니 죽은 사람도 산 사람을 죽게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덤 중에는 현실 안에 거북 등껍질 모양의 문양이 있어서 귀갑묘(龜甲墓)라 불리는 것도 있었고, 형제총(兄弟坟)도 있었다. 형총은 4층 12단, 제총은 3층 9단으로 된 방단적석묘(方壇積石墓)였다. 가이드의 설명이 때로는 잘 들리지 않아 핸드마이크라도 사용했으면 싶기도 했다.
그 앞쪽이 바로 통구하였는데, 남자 4명이 팬티만 입고 수영을 하고 있었다. 옛날 고구려 시절에도 여기서 저렇게 물놀이를 즐겼을까, 그 사람들이 나라를 위하여 용감히 싸우다 전사했고, 그래서 저 많은 고분군들이 생겨났을까, 혹은 지금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은 저 무덤 속의 주인공들이 옛날을 그리워하며 무덤에서 튀어나와 저토록 한가로운 한때를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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