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別號에 대하여

거북이3 2007. 11. 1. 10:18

☆別號

古者에 巢父는搆巢以居故로人이號를巢父라하니此ㅣ 別號의 濫觴이니 六國時에 王詡가 自稱 鬼谷子라 하니 此ㅣ 別號의 始라.

(距今二千三百年)

(嵩陽山人 張志淵. 萬國事物紀原歷史 卷之一 第三章. 別號條. 皇城新聞社. 隆熙3年[1910])

*張志淵의 호는 韋庵이라 하기도 한다.

*;얽어맬구

*巢父;소부, 소

*巢父 許由 問答하던 箕山 潁水 潁水가 예 아니냐? (雜歌 遊山歌)

★삼신산(三神山:중국 전설에 나오는 蓬萊山·方丈山·瀛洲山 등 신선이 산다는 산)에 불사약이 있다고 진시황에게 가르쳐준 귀곡자(鬼谷子) 왕허(王詡)가 그의 제자 손빈에게 전해준 ≪天書≫ 3권 안에 “이것이 조사의 참다운 묘한 비결이니 천금을 준다 하더라도 세상사람들에게 전해주지 말라(此是祖師眞妙訣千金莫與世人傳).”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秘記에 속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귀곡자가 제자 손빈이 방연(龐涓)의 초청을 받고 위(魏)나라로 벼슬하러 떠나려 할 때 만류하였으나 끝내 가려고 하자 금낭(錦囊:비단 주머니)을 주면서 위급할 때 열어보면 빠져 나갈 방도가 있을 것이라고 알려준 경우가 그 예이다.

 (이창호.한국사사전 1.비기.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536&no=1990 .2002/09/08)

*; 자랑할 허, 和할 허.(古音은 ‘후’)

;생몰년 모두 불확실하다. 다만 활동 연대가 孟子 莊子와 비슷하며 냉혹한 법가 사상가로 유명한 商과도 비슷하거나 10~20살 정도 어릴 가능성이 있다.

그의 본명은 알 수 없으니 孫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姓이지만, 은 이름이 아니라, 그가 得罪를 하여 무릎 이하가 잘리는 형벌을 받은 절름발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손빈이란 손씨라는 성을 지닌 다리 잘린 형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중국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저명한 군사전략가로써 전하기를 공자(孔子)와 활동연대를 같이 하는 춘추말기의 저명한 군사전략가 孫武의 후손이라 한다.

우선 史記 중의 孫子吳起列傳의 행적은 대강 이렇다.

그는 어릴 때 鬼谷子에게 龐涓과 함께 병법을 배웠다. 방연은 재빨리 魏國으로 가서 벼슬을 해서 惠王에게 등용되어 장군이 되었다. 하지만 손빈이 자기보다 재능이 뛰어나다고 시기한 방연은 齊國에 있던 손빈을 魏國으로 끌어들여 혜왕에게 발탁케 하고는 그를 모함하기를 “齊國과 몰래 통한다”고 했다. 이에 得罪한 손빈은 두 다리를 잘리는 형벌을 받은 것은 물론 刑까지도 받았다. (黥;墨刑할 경)

이런 암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손빈은 고국 제나라에서 大梁으로 사절로 온 사신을 몰래 찾아가 구제를 요청하니, 이에 사신이 그와 대화를 나누다가 그가 인재임을 알고는 몰래 그를 빼돌려 제국으로 데리고 갔다. 그를 주목한 이는 제나라 장군 田忌였다. 이 당시 齊國은 이미 姜太公에게서 시작하는 姜氏시대가 田氏 왕조로 교체된 지 오래라, 田忌는 그 성으로 보아 왕족에 속할 것임은 분명하다.

전기는 손빈을 제 위왕에게 천거했다. 이에 손빈은 군작전 최고 참모인 軍師가 되어 이후 평생 주군인 田忌를 보좌하게 된다.

이때 魏國이 趙國을 대대적으로 침범하자 조국은 수도 邯鄲까지 함락 일보 직전에 몰리게 되어 제국에 도움을 요청한다. 제국은 원군을 파견한다. 애초에 왕은 손빈을 장군에 임명하려 했으나 한사코 거절하는 바람에 전기를 장군, 손빈은 군사로 삼되 손빈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도록 수레에 숨겼다. 이는 魏國 장수가 방연이며, 나아가 그가 孫을 누구보다 잘 알 터이므로, 허를 찌르기 위한 방책이었다. 바보 같은 전기, 한단으로 곧바로 돌진해 조국을 구원하려 하나, 손빈이 막아선다.

“상대방의 허점을 쳐야 싸움은 이기는 법. 지금 위국 대량에는 전쟁 통에 노약자만 남아 있을 뿐. 한단보다 대량을 치면 본국을 지키고자 방연은 군사를 몰아 돌아올 것입니다.”

이 전략은 멋지게 성공해 위군은 함락 일보 직전의 수중에 두었던 한단을 포기하고 귀환한다. 이를 桂陵에서 기다린 齊軍은 위군을 대파한다.

13년 뒤, 이번에 위국이 원수로 지내던 조국과 합세해 韓國을 공격했다.(韓-魏-趙 3국은 춘추시대 중원을 차지한 최강국 晉을 3氏가 나눠먹기 해서 생긴 것이라 해서 흔히 三晉이라 통칭하기도 한다.) 이때도 제국은 전기를 대장, 손빈을 군사로 삼아 위국 수도인 대량을 친다. 이에 한국 정벌에 나선 방연은 포위를 풀고 귀국길에 오른다. 손빈은 이때야말로 방연을 잡을 때라고 생각하고는 계책을 꺼낸다.

“숙영지를 옮길 때마다 부뚜막 숫자를 절반씩 줄이소서.”

기대한 대로 방연은 제군을 추격하다가 거기에 도망병이 많이 생겼다고 생각하고는 이동속도가 현격히 떨어지는 보병을 뒤로 제쳐두고 기병과 정예부대만을 이끌고 馬陵이란 곳까지 제군을 추격하게 된다. 이곳은 길은 좁고 양쪽은 험한 산이 들어선 이른바 死地. 손빈은 마릉 계곡 옆 큰 나무를 골라 껍질을 벗겨낸 다음 그 하얀 속껍질에 이렇게 썼다.

“방연은 이 나무 밑에서 죽으리라”

제군은 방연이 들이닥치기를 기다려 양쪽 협곡에 활과 노수들을 집중배치해 결국은 위군을 몰살케 하는 대 전과를 올렸다. 이에 방연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 김태식 블로그(역사문화라이브러리)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別號.hwp
0.03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