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영(竹影) 기(記)
일전에 수필문학사에 들렀다가 오경자 선생을 만났는데,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내게 고전문학을 전공하였으니 멋진 호를 하나 지어줄 수 없겠느냐고 청해 왔다. 그날 강석호 회장을 비롯하여 몇 사람이 지리산에서 점심을 함께 하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지리산’을 생각하니 문득 ‘대나무’가 연상되었다. 그래서 대나무와 관련된 것으로 호를 한번 지어보아야 하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내 별명이 ‘거북이’다 보니 여태까지도 민적거리기만 하였을 뿐, 호를 지어 드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제 12월로 접어들었다. 한 해가 가려고 하는 것이다. 모처럼의 부탁에 해를 넘긴다는 것은 아무리 ‘거북이’라 하더라도 도리가 아닌 듯싶어 오늘 문득 대나무와 관련된 생각들을 모아 보았다.
대나무는 벼과에 속하는 다년생 상록 식물이다. 대나무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자라나는 나무 중의 하나이다. 대나무의 하루 최대 60cm까지 자란다. 이만큼 빨리 자라는 나무는 다시 찾아볼 수가 없다. 싹이 난 뒤 약 4~5년이면 전부 자라서 100여 년을 살아간다. 단시간에 모든 성장을 마무리하고 오랜 동안을 꼿꼿이 자라는 나무이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갖추어야 할 모든 지식과 지성을 튼튼하게 갖추고서 늘 푸른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대나무는 4군자 중의 하나이다. 4군자는 각각의 특징을 드러내는 춘하추동 네 계절을 대표하는 초목인데, 대나무는 그 마지막 계절인 겨울을 대표한다. 매서운 눈발 속에서도 푸른빛을 잃지 않는 그 기개는 4군자를 휘갑하고도 남을 만하다고 하겠다. 여중군자라 할 수 있는 오 선생의 풍모에 썩 맞는 나무가 아닐까 싶다.
대나무는 산들바람에도 흔들리며 깨끗한 풍운(風雲)을 일으켜서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하지만 미친 듯 불어대는 광풍(狂風)에도 휘어지기는 할지언정 절대로 부러지지 않는다. 속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이 있다. 비었으되 빈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물은 어느 때에 이르면 그 수명이 다하여 사라져 버린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인 것이다. 그렇다고 현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모두 공(空)이라 할 수는 없다. 공즉시색(空卽是色)인 것이다. 형체를 드러낼 때는 색(色)이요, 그 본질은 공(空)이다. 그러니 진공(眞空)은 묘유(妙有)인 것이다. 따라서 ‘속이 비었다’는 것은 집착심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이요, 쓸모없음의 헛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나무는 표피가 매끈하여 대패질을 하지 않더라도 자연적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어떠한 나무도 이런 대나무의 특성을 넘볼 수 있는 나무는 없다. 꾸미지 않고도 아름답고 본성 그대로도 어느 곳에서나 사용될 수 있는 나무가 대나무인 것이다. 돗자리를 비롯한 죽부인과 같은 죽세공품뿐만 아니라, 벼과에 속한다는 데에서 알 수 있듯 조릿대와 같은 키가 작은 대나무의 열매는 구황식품(救荒食品)으로서도 유용했었다. 또한 죽잎차는 항암작용을 비롯하여 고혈압, 당뇨, 만성 간염, 불면증 등에 특효를 발휘하는 약리 성분이 있는가 하면, 현대인의 가장 큰 문젯거리인 스트레스 해소에도 매우 좋다고 알려져 있으며, 왕대와 같은 대나무의 열매는 봉황(鳳凰)의 유일한 먹이로 사용되었다고도 하였다.
강희안(姜希顔)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에는 ‘정송오죽(正松五竹)’이라는 말이 나온다. 소나무는 정월에 심고 대나무는 오월에 심어야 잘 자란다는 말이다. 이 말은 ‘정송오죽(淨松汚竹)’으로도 사용하는데, 소나무는 깨끗한 곳에 심어야 하고, 대나무는 질척질척한 곳에서도 잘 자란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소나무는 공해에 약한 반면, 대나무는 공해에도 매우 강하며 수질, 토질을 정화시켜 주는 성품을 지녔다는 말이다. 험한 세태 속에서 살면서도 사회를 정화시켜 주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오 선생의 품성에 꼭 적합한 나무가 아니겠는가?
그런가 하면 대나무는 홀로 자라는 경우가 별로 없다. 여럿이 어울려서 자라는 것이 대나무의 특성이기도 하다. 사람으로 친다면 화합을 중시하는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다. 지상으로 돋아난 많은 대나무들이 땅 속으로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라는 점도 서로간의 어울림을 중시함과 더불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대나무의 특성 중의 하나라고 할 것이다. 그만큼 여러 방면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오 선생의 이미지와도 부합하고 있는 식물이라는 생각이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서하당잡영2(棲霞堂雜詠2)」중 「서가(書架)」라는 시편이 있다.
書架(서가) : 서가에서
仙家靑玉案(선가청옥안) : 선가(仙家)의 푸른 옥빛 책상
案上白雲篇(안상백운편) : 책상 위에 놓인 ‘백운편’이라
盥水焚香讀(관수분향독) : 손 씻고 향 사르고 읽으니
松陰竹影前(송음죽영전) : 솔 그늘, 대 그림자 앞에 있는 듯.
‘죽영(竹影)’은『금강경(金剛經) 오가해(五家解』에 나오는 야보(冶父) 스님의 게송(偈頌)에도 나온다.
竹影掃階塵不動(죽영소계진부동): 대나무 그림자가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고
月穿潭底水無痕(월천담저수무흔): 달빛이 못 바닥을 꿰뚫어도 물에는 자취 전혀 남지 않네.
여기서 죽영(竹影)이나 월(광)[月(光)]은 모두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잊은 무아(無我), 무심(無心)의 경지로서, 그 어떠한 외물(外物)에도 집착하지 않고 번뇌를 떨친 자유자재(自由自在)한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곧, 어떠한 속사(俗事)에도 얽매이지 않은 경지에 이른 존재라는 말이다.
이에 한국문인협회 감사이며 한국수필문학가협회 부회장, 월간수필문학추천작가회 고문(회장역임), 월간수필문학 상임편집위원장인 오 선생의 아호(雅號)로서 적합하다는 생각으로, 이에 계사년(癸巳年) 계해월(癸亥月) 신축일(辛丑日) [음 2013년 10월 29일(양 2013년 12월 1일, 日)]에 두서없이 기문을 쓴다.
분당(盆唐) 광거재(廣居齋)에서 이웅재(李雄宰) 근지(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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