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유사 권2)
德經等.大王備禮受之.王御國二十四年.五岳三山神等,時或現侍於殿庭.三月三日,王御歸正門樓上.謂左右曰.誰能途中得一員榮服僧來.於是適有一大德,威儀鮮潔.徜徉而行.左右望而引見之.王曰.非吾所謂榮僧也.退之.便有一僧,被衲衣,負櫻筒.(一作荷簣)從南而來.王喜見之.邀致樓上.視其筒中.盛茶具已.曰.汝爲誰耶.僧曰忠談.曰何所歸來.僧曰.僧每重三重九之日,烹茶饗南山三花嶺彌勒世尊.今玆旣獻而還矣.王曰.寡人亦一甌茶有分乎.僧乃煎茶獻之.茶之氣味異常.甌中異香郁烈.王曰.朕嘗聞師讚耆婆郞詞腦歌,其意甚高.是其果乎.對日然.王曰.然則爲朕作理安民歌.僧應時奉勅歌呈之.王佳之.封王師焉.僧再拜固辭不受.安民歌曰.
君隱父也.
臣隱愛賜尸母史也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民是愛尸知古如
窟理叱大肹生以支所音物生
此肹喰惡支治良羅
此地肹捨遺只於冬是去於丁爲尸知
國惡支持以支知古如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 爲內尸等焉
國惡太平恨音叱如
讚耆婆郞歌曰
咽嗚爾處米
露曉邪隱月羅理
白雲音逐干浮去隱安攴下 沙是八陵隱汀理也中
耆郞矣皃史是史藪邪
逸鳥川理叱石責惡希
郞也持以攴如賜鳥隱
心未際叱肹逐內良齊
阿耶 栢史叱枝次高攴好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王玉莖長八寸.無子,廢之.封沙梁夫人.後妃滿月夫人.謚景垂太后.依忠角干之女也.王一日詔表訓大德曰.朕無祐不獲其嗣.願大德請於上帝而有之.訓上告於天帝.還來奏云.帝有言.求女卽可.男卽不宜.王曰.願轉女成男.訓再上天請之.帝曰.可則可矣.然爲男則國殆矣.訓欲下時.帝又召曰.天與人不可亂.今師往來如隣里.漏洩天機.今後宜更不通.訓來以天語諭之.王曰.國雖殆.得男而爲嗣足矣.
於是滿月王后生太子.王喜甚.至八歲王崩.太子卽位.是爲惠恭大王.幼冲故.太后臨朝.政條不理.盜賊蜂起.不遑備禦.訓師之說驗矣.小帝旣女爲男,故自期晬至於登位,常爲婦女之戱.好佩錦囊.與道流爲戱.故國有大亂.(終) 修爲宣德與金良相所弑.自表訓後.聖人不生於新羅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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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景德王)·충담사(忠談師)·표훈대덕(表訓大德)
(唐나라에서) 덕경(德經) 등을 (보내오자) 대왕이 예를 갖추어 이를 받았다.*1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五岳)*2과 삼산신(三山神)*3들이 때때로 나타나서 대궐 뜰에서 (왕을) 모셨다. 3월 3일 왕이 귀정문(歸正門) 누각 위에 나가서 좌우 신하들에게 일렀다. "누가 길거리에서 위의(威儀) 있는 중 한 사람을 데려올 수 있겠느냐." 이때 마침 위의 있고 깨끗한 대덕(大德) 한 사람이 길에서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었다. 좌우 신하들이 이 보고 데리고 와서 보이니, 왕이 "내가 말하는 위의 있는 중이 아니다"하고 돌려보냈다. 다시 중 한 사람이 있는데 납의(衲衣)*4를 입고 앵통(櫻筒, 혹은 荷簣라 함)을 지고 남쪽에서 오고 있었는데 왕이 보고 기뻐하여 누각 위로 영접했다. 통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들어 있었다. 왕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요?" 중이 답했다. " 충담이라고 합니다." "어디서 오는 길이오?" "소승은 3월 3일과 9월 9일에는 차를 달여서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드리는데, 지금도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나에게도 그 차를 한 잔 나누어 주겠는가요." 중이 이내 차를 달여 드리니 차맛이 이상하고 찻잔 속에서 이상한 향기가 풍긴다. 왕이 다시 물었다.
"내가 일찍이 듣자니 스님의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가 그 뜻이 무척 고상하다고 하니 그 말이 과연 옳은가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안민가를 지어 주시오." 충담은 이내 왕의 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치니 왕은 아름답게 여기고 그를 왕사(王師)로 봉했으나 충담은 두 번 절하고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안민가는 이러하다.
군(君)은 어비여,
신(臣)은 샬 어여,
민(民) 얼 아고 샬디
민(民)이 알고다
구믈ㅅ다히 살손 물생(物生)*5
이흘 머기 다라
이 리곡 어듸 갈뎌 디
나라악 디니디 알고다
아으 군(君)다이 신(臣)다이 민(民)다이
나라악 태평(太平)니다
기파랑(耆婆郞)을 찬미한 노래
열치매
토얀 리
구룸 조초 가 안디하
새파 나리여
기랑(耆郞) 즈 이슈라
일로 나릿
낭(郎) 디니다샤온
좇누아져
아으, 잣ㅅ가지 노파
서리 �누올 화반(花判)이여
경덕왕(景德王)은 옥경(玉莖)의 길이가 여덟 치나 되었다. 아들이 없어 (왕비를) 폐하고 사량부인(沙梁夫人)에 봉했다. 후비(後妃) 만월부인(滿月夫人)의 시호(諡號)는 경수태후(景垂太后)이니 의충(依忠) 각간(角干)의 딸이었다. 왕은 어느날 표훈대덕(表訓大德)에게 명했다. "내가 복이 없어서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바라건대 대덕은 상제(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 주오." 표훈은 명령을 받아 천제(天帝)에게 올라가 고하고 돌아와 왕께 아뢰었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딸을 구한다면 될 수 있지만 아들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왕은 다시 말한다. "원컨대 딸을 바꾸어 아들로 만들어 주시오." 표훈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천제께 청하자 천제는 말한다. "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 표훈이 내려오려고 하자 천제는 또 불러 말한다. "하늘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게 할 수는 없는 일인데 지금 대사(大師)는 마치 이웃 마을을 왕래하듯이 하여 천기(天機)를 누설했으니 이제부터는 마땅히 다시 통하지 못하리라." 표훈은 돌아와서 천제의 말대로 왕께 알아듣도록 말했건만 왕은 말한다. "나라가 비록 위태롭더라도 아들을 얻어서 대를 잇게 하면 만족하겠소."
이리하여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으니 왕은 무척 기뻐했다. 8세 때에 왕이 죽어서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혜공대왕이다. 나이가 어린 때문에 태후가 임조(臨朝)하였는데 정사가 다스려지지 못하고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 이루 막을 수가 없다. 표훈 대사의 말이 맞은 것이다. 왕은 이미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돌날부터 왕위에 오르는 날까지 항상 여자의 놀이를 하고 자랐다.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류(道流)와 어울려 희롱하고 노니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고 마침내 선덕왕(宣德王)과 김양상(金良相)*6 에게 죽음을 당했다.표훈 이후에는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
| *1 이 구절 앞부분에 빠진 글자가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34대 孝成王 2년에 당나라에서 도덕경을 보내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효성왕에 관한 기록이 경덕왕조로 잘못 옮겨진 듯함.
*2 五嶽 : 동악 吐含山, 서악 鷄龍山, 남악 智異山, 북악 太白山, 중악 父岳 ․ 公山
*3 三山神 : 내력(奈歷 : 지금의 경주), 骨火(지금의 영천), 穴禮(지금의 청도)의 神.
*4 납의(衲衣) : 중의 옷. 僧衣.
*5 물생(物生) : 사람
*6 김양상은 뒤의 선덕왕(37대), 따라서 이는 김경신(金敬信; 뒤의 38대 元聖王)의 잘못인 듯함 |
南白月二聖
努肹夫得怛怛朴朴
白月山兩聖成道記云 白月山在新羅仇史郡之北(古之屈自郡 今義安郡) 峰巒奇秀 延袤數百里 眞巨鎭也
古老相傳云 昔唐皇帝嘗鑿一池 每月望前 月色滉朗 中有一山 嵓石如師子 隱映花間之影 現於池中 上命畫工圖其狀 遺使搜訪天下 至海東 見此山有大師子嵓 山之西南二步許 有三山 其名花山(其山一體三首 故云三山) 與圖相近 然未知眞僞 以隻履懸於師子嵓之頂 使還奏聞 履影亦現池 帝乃異之 賜名曰白月山(望前白月影現故以名之) 然後池中無影
山之東南三千步許 有仙川村 村有二人 其一曰努肹夫得(一作等) 父名月藏 母味勝 其一曰怛怛朴朴 父名修梵 母名梵摩(鄕傳云雉山村 誤矣 二士之名方言 二家各以二士心行騰騰苦節二義名之爾)
皆風骨不凡 有域外遐想 而相與友善 年皆弱冠 往依村之東北嶺外法積房 剃髮爲僧 未幾聞西南雉山村法宗谷僧道村有古寺 可以拪眞 同往大佛田小佛田二洞 各居焉 夫得寓懷眞庵 一云壤寺(今懷眞洞有古寺基是也) 朴朴居瑠璃光寺(今梨山上有寺基是也) 皆挈妻子而居 經營産業 交相來往 棲神安養 方外之志 未常暫廢 觀身世無常 因相謂曰 腴田美歲良利也 不如衣食之應念而至 自然得飽煖也 婦女屋宅情好也 不如蓮池華藏千聖 共遊鸚鵡孔雀 以相娛也 况學佛當成佛 修眞必得眞 今我等旣落彩爲僧 當脫略纏結 成無上道 豈宜汨沒風塵 與俗輩無異也 遂唾謝人間世 將隱於深谷 夜夢白毫光自西而至 光中垂金色臂 摩二人頂 及覺說夢 與之符同 皆感嘆久之 遂入白月山無等谷(今南藪洞也)
朴朴師占北嶺師子嵓 作板屋八尺房而居 故云板房 夫得師占東嶺磊石下有水處 亦成方丈而居焉 故云磊房(鄕傳云 夫得處山北瑠璃洞 今板房 朴朴居山南法精洞磊房 與此相反 以今驗之 鄕傅誤矣) 各庵而居 夫得勤求彌勒 朴朴禮念彌陁
夫盈三載 景龍三年己酉四月八日 聖德王卽位八年也 日將夕 有一娘子年幾二十 姿儀殊妙 氣襲蘭麝 俄然到北庵(鄕傅云南奄) 請寄宿焉 因投詞曰
行遲日落千山暮
路隔城遙絶四隣
今日欲投庵下宿
慈悲和尙莫生嗔
朴朴曰 蘭若護淨爲務 非爾所取近 行矣無滯此處 閉門而入(記云 我百念灰今無以血囊見試) 娘歸南奄(傳曰北庵) 又請如前 夫得曰 汝從何處 犯夜而來 娘答曰 湛然與太虛同體 何有往來 但聞賢士志願深重 德行高堅 將欲助成菩提 因投一偈曰
日暮千山路
行行絶四隣
竹松陰轉邃
溪洞響猶新
乞宿非迷路
尊師欲指津
願惟從我請
且莫問何人
師聞之驚駭 謂曰 此地非婦女相汚 然隨順衆生 亦菩薩行之一也 況窮谷夜暗 其可忽視歟 乃迎揖庵中而置之 至夜淸心礪操 微燈半壁 誦念厭厭 及夜將艾 娘呼曰 予不幸適有産憂 乞和尙排備苫草 夫得悲矜莫逆 燭火殷勤 娘旣産 又請浴 弩肹慚懼交心 然哀憫之情有加無已 又備盆槽 坐娘於中 薪湯以浴之 旣而槽中之水香氣郁烈 變成金液 弩肹大駭 娘曰 吾師亦宜浴此 肹勉强從之 忽覺精神爽凉 肌膚金色 視其傍忽生一蓮臺 娘勸之坐 因謂曰 我是觀音菩薩 來助大師 成大菩提矣 言訖不現
朴朴謂肹今夜必染戒 將歸听之 旣至 見肹坐蓮臺 作彌勒尊像 放光明 身彩檀金 不覺扣頭而禮曰 何得至於此乎 肹具叙其由 朴朴嘆曰 我乃障重 幸逢大聖 而反不遇 大德至仁 先吾著鞭 願無忘昔日之契 事須同攝 肹曰 槽有餘液 但可浴之 朴朴又浴 亦如前成無量壽 二尊相對儼然 山下村民聞之 競來瞻仰 嘆曰 希有 希有 二聖爲說法要 全身躡雲而逝
天寶十四年乙未 新羅景德王卽位(古記云 天鑑二十四年乙未法興卽位 何先後倒錯之甚如此) 聞斯事 以丁酉歲遣使創大伽藍 號白月山南寺 廣德二年(古記云大曆元年 亦誤) 甲辰七月十五日 寺成 更塑彌勒尊像 安於金堂 額曰 現身成道彌勒之殿 又塑彌陁像安於講堂 餘液不足 塗浴未周 故彌陁像亦有斑駁之痕 額曰 現身成道無量壽殿 …
芬皇寺千手大悲 盲兒得眼
景德王代 漢岐里女希明之兒 生五稔而忽盲 一日其母抱兒 詣芬皇寺左殿北壁畵千手大悲前 令兒作歌禱之 遂得明 其詞曰
膝肹古召㫆
二尸掌音毛乎攴內良
千手觀音叱前良中
祈以攴白屋尸置內乎多
千隱手叱千隱目肹
一等下叱放一等肹除惡攴 二于萬隱吾羅
一等沙隱賜以古只內乎叱 等邪阿邪也
吾良遺知攴賜尸等焉
放冬矣用屋尸慈悲也根古
讚曰
竹馬葱笙戱陌塵
一朝雙碧失瞳人
不因大士廻慈眼
虛度楊花幾社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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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백월이성(南白月二聖),
노힐부득(努肹夫得)과 달달박박(怛怛朴朴)
<白月山兩聖成道記>에 이렇게 말하였다. "백월산(白月山)은 신라 仇史郡(옛날의 屈自郡, 지금의 義安郡; 현 경남 昌原郡)의 북쪽에 있었다. 산봉우리는 기이하고 빼어났는데 (그 산줄기가) 수백 리에 뻗쳐 있어(延袤; 延은 橫이니 東西, 袤는 縱이니 남북, 곧 동서남북으로 뻗쳤다는 말)참으로 큰 진산(鎭山)이다."
옛 노인들이 서로 전해서 말한다. "옛날에 唐皇帝가 일찍이 못을 하나 팠는데, 달마다 보름 전이면 달빛이 그윽하고 밝으며, 그 가운데 산이 하나 있는데 사자(獅子)처럼 생긴 바위가 꽃 사이로 그림자를 은은히 비쳐서 못 가운데에 나타났다. 황제는 화공(畵工)을 시켜서 그 모양을 그리게 하여 사자(使者)를 보내서 온 천하를 돌면서 찾도록 했다. (사자가) 해동(海東)에 이르러 이 산을 보니 큰 사자암(獅子巖)이 있고 산의 서남쪽 이보(二步)쯤 되는 곳에 삼산(三山)이 있는데 그 이름은 화산(花山; 그 산의 몸체는 하나인데 봉우리가 셋이어서 三山이라고 했다)으로서 모양이 그림과 같았다. 그러나 아직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서 신 한 짝을 사자암 꼭대기에 걸어 놓고 돌아와 아뢰었다. 그런데 신 그림자도 역시 못에 비치므로 황제는 이상히 여겨 그 산 이름을 백월산(白月山; 해발627m. 주변에는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가 있다.)이라고 했다(보름 전에는 白月의 그림자가 나타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로는 못 가운데에 산 그림자가 없어졌다."
이 산의 동남쪽 3,000보쯤 되는 곳에 선천촌(仙川村)이 있고, 그 마을에는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하나는 노힐부득(努肹夫得; 혹은 等)이니 아버지는 이름을 월장(月藏)이라 했고, 어머니는 미승(味勝)이라 했다. 또 하나는 달달박박(怛怛朴朴)이니 그의 아버지는 이름을 수범(修梵)이라 했고, 어머니는 범마(梵摩)라 했다(鄕傳에는 雉山村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두 선비의 이름은 方言이니 두 집에서는 각각 두 선비의 마음과 행동이 騰騰하고 苦節하다는 두 가지 뜻에서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이들은 모두 풍채와 골격(骨格)이 범상치 않았고, 속세를 떠난 마음이 있어(역외는 세상 밖, 遐想은 遠想이니, 곧 속세를 초월한 높은 생각) 서로 좋은 친구였다. 20세가 되자 마을 동북쪽 고개 밖에 있는 法積房(경남 창원군 백월산에 있던 절)에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서남쪽 雉山村 法宗谷 僧道村에 옛절이 있는데, 栖眞(棲神, 정신을 수련함)할 만하다는 말을 듣고, 함께 가서 大佛田·小佛田의 두 마을에 각각 살았다. 부득(夫得)은 회진암(懷眞巖)에 살았는데 혹은 이곳을 양사(壤寺; 지금 회진동懷眞洞에 옛 절터가 있으니 이것이다)라고도 했고, 박박(朴朴)은 유리광사(瑠璃光寺; 지금 梨山 위에 절터가 있는데 이것이다. 경남 창원군 백월산에 있던 절)에 살았다. 이들은 모두 처자(妻子)를 데리고 와서 살면서 산업(産業)을 경영하고 서로 왕래하면서 정신을 수양하고 마음을 편안히 하여 속세를 떠날 생각(方外≒世外, 속세를 떠남)을 잠시도 폐하지 않았다. 몸과 세상의 무상(無常)함을 보고 서로 말했다. "기름진 밭과 풍년 든 해는 참으로 좋은 것이지만 의식(衣食)이 마음대로 생기고 자연히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는 것만 못하다. 또 부녀(婦女)와 집이 마음에 좋으나, 연지화장(蓮池花藏; 蓮華藏 세계,毘盧舍那佛이 있는 功德無量, 廣大莊嚴의 세계)에서 여러 부처가 앵무새나 공작새와 함께 놀면서 서로 즐기는 것만은 못하다. 더구나 佛道를 배우면 응당 부처가 되고, 참된 것을 닦으면 반드시 참된 것을 얻는 데에 있어서랴.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니 마땅히 몸에 얽매어 있는 것을 벗어 버리고 無上의 道(불도)를 이루어야 할 것인데, 어찌 이 風塵 속에 파묻혀 세속 무리들과 같이 지내서야 되겠는가?" 드디어 인간 세상을 떠나서 장차 깊은 골짜기에 숨으려 했다. 어느 날 밤 꿈에 白毫(부처의 32相의 하나. 눈썹 사이에 난 터럭으로서 광명을 무량세계에 비춘다고 함.)의 빛이 서쪽에서 오더니 빛 속에서 금빛 팔이 내려와서 두 사람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꿈에서 깨어 그 얘기를 하니 두 사람 이 서로 같으므로 모두 한참동안 감탄하다가 드디어 白月山 無等谷( 지금의 南藪洞)으로 들어갔다.
朴朴師는 북쪽 고개의 獅子巖을 차지하여 판잣집 8척 방을 만들고 살았으므로 板房이라 하고, 夫得師는 동쪽 고개의 무더기 돌 아래 물이 있는 곳을 차지하고 역시 方丈을 만들어 살았으므로 磊房이라고 했다.(鄕傳에는, 夫得은 산 북쪽 瑠璃洞에 살았으니 곧 지금의 板房이요, 朴朴은 산 남쪽 法精洞 磊房에 살았다고 했으니 이 기록과는 서로 반대된다. 지금 증험해 보면 鄕傳이 잘못되었다). (이들은) 각각 암자에 살면서 夫得은 彌勒佛(彌勒菩薩. 내세에 성불하여 사바세계에 나타나서 중생을 제도하리라는 보살)을 성심껏 구했고, 朴朴은 彌陀佛(阿彌陀佛. 서방 정토에 있는 부처. 대승 불교 정토교의 중심을 이루는 부처로, 수행 중에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大願을 품고 성불하여 극락정토에서 교화하고 있으며, 이 부처를 염하면 죽은 뒤에 극락세계에 간다고 한다.) 을 예를 다하여 念誦하였다.
3년이 차게 되던 경룡(景龍; 당 中宗의 연호) 3년 기유(己酉; 706) 4월 8일은 聖德王 즉위 8년이다. 해는 저물어 가는데 나이는 대략 20에 가깝고 자태가 매우 아름다운 娘子가 난초의 향기와 사향 냄새를 풍기면서 갑자기 북암(北庵; 鄕傳에는 南庵이라 했다.)에 와서 자고 가기를 청하면서 글을 지어 바친다.
갈 길 더딘데 해는 떨어져 모든 산이 어둡고,
길은 막히고 성은 멀어 인가도 아득하네.
오늘은 이 암자에서 자려 하오니,
자비스러운 스님은 노하지 마오.
박박(朴朴)은 말했다. "절[蘭若; 고요한 곳이라는 뜻으로, 절을 이르는 말. ≒아란야(阿蘭若). aranya]은 깨끗함을 유지하는 데 힘을 써야 하는 곳이니 그대가 가까이 올 곳이 아니오. 지체하지 말고 가시오."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갔다(記에는 말하기를, "나는 모든 雜念이 없으니 血囊[肉色]을 가지고 시험하지 말라"고 했다). 娘子는 南庵; 鄕傳에는 北庵)으로 돌아가서 또 전과 같이 청하니 夫得은 말했다. "그대는 어디로부터 이 밤중에 왔는가?" 낭자가 대답한다. "맑기가 太虛(空虛. 적막의 경지, 즉 우주의 근원)와 같은데 어찌 오고 가는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어진 선비의 바라는 뜻이 깊고 德行이 높고 굳다는 말을 듣고 장차 도와서 菩提(正覺. 도를 얻기 위하여 닦아야 할 길.)를 이루고자 합니다." 인하여 偈 하나를 주었다.
해 저문 깊은 산길에,
가도 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네.
대나무와 소나무 그늘은 그윽하기만 하고,
시내와 골짜기에 물소리 더욱 새로워라.
잘 곳 찾음은 길 잃어서가 아니요,
尊師를 指津(引導)코자 함일세.
원컨대 내 청 들어만 주시고,
누구인지는 묻지를 마오.
夫得師는 이 말을 듣고 몹시 놀라면서 말했다. "이곳은 婦女가 더럽힐 곳이 아니나, 衆生의 뜻에 따르는 것(隨順; 순순히 따름)도 역시 菩薩行의 하나일 것이오. 더구나 깊은 산골짜기에 날이 어두웠으니 소홀히 대접할 수가 있겠습니까?" 곧 그를 맞아 揖하고 암자 안에 있게 했다. 밤이 되자 (부득은) 마음을 맑게 하고 지조를 닦아 희미한 등불이 벽에 비치는데 염불을 끝없이 했다. 이으고 밤이 장차 새려 하자(희끄무레해지자) 낭자는 (부득을) 불러 말했다. "내가 불행히 마침 産故가 있으니 원컨대 스님께서는 짚자리를 준비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득이 불쌍히 여겨 거절하지 못하고 은은히 촛불을 비치니 낭자는 이미 해산을 끝내고 또 목욕하기를 청한다. 노힐부득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마음속에 교차하였으나, 불쌍히 여기는 정이 더함을 마지못하여 또 목욕통을 준비해서 낭자를 그 안에 앉히고 물을 데워 목욕을 시키니 이미 통 속 물에서 향기가 강하게 풍기면서 金液으로 변한다. 부득이 크게 놀라자 낭자가 말했다. "우리 스승께서도 이 물에 목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득이 마지못하여 그 말에 좇았더니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지는 것을 깨닫고 살결이 금빛으로 되고, 그 옆을 보니 졸지에 蓮臺 하나가 생겼다. 낭자가 부득에게 앉기를 권하고 말한다. "나는 觀音菩薩인데 여기 와서 대사를 도와 大菩提를 이루도록 한 것이오."말을 마치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
한편 朴朴이 생각하기를, "부득이 오늘 밤에 반드시 戒를 더럽혔을 것이니 비웃어 주리라"하고 가서 보니 부득은 蓮花臺에 앉아 彌勒尊像이 되어 光明을 내뿜는데 그 몸은 금빛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박박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말한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부득이 그 까닭을 자세히 말해 주니 박박은 탄식해 말한다. "나는 마음속에 가린 것이 중첩되어 있어서, 다행히 부처님을 만났으나 도리어 대우치 아니하여, 큰 德이 있고 지극히 어진 그대가 나보다 먼저 뜻을 이루었소. 부디 옛날의 契分을 잊지 마시고 일을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부득이 말한다. "통 속에 아직 금액이 남았으니 목욕함이 좋겠습니다." 박박이 또 목욕을 하니 전과 같이 無量壽(無量壽佛. 阿彌陀佛을 높이 일컫는 말. 경남 양산군의 ‘원효산 설화’에서는 부득은 원효, 박박은 의상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대승불교와 소승블교의 차이를 말한 것이라 한다.)를 이루니 두 부처가 서로 엄연히 마주 대해 있었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다투어 와서 우러러보고 감탄하기를, "드물고 드문 일이로다."했다. 두 부처는 그들에게 佛法의 要旨를 설명하고 나서, 온몸으로 구름을 타고 가 버렸다.
天寶 14년 乙未(755)에 신라 景德王이 즉위(<古記>엔 天監 24년 乙未에 法興王이 즉위했다고 했는데 그 선후가 뒤바뀐 것이 어찌 이렇게 심할까; 천보는 당 玄宗의 연호로 천보 14년은 경덕왕 14년에 해당하니, 경덕왕이 즉위했다는 것은 동왕 14년의 오기인 듯)하여 이 말을 듣고 丁酉( 757)년에 使者를 보내서 큰 절을 세우고 이름을 白月山 南寺라 했다. 光德 2년(<古記>에는 大曆 원년이라고 했으나 역시 잘못된 것이다. 光德은 역시 당 현종의 연호로 광덕 2년은 경덕왕 23년[764]이다.) 甲辰 (764) 7월 15일에 절이 완성되자, 다시 彌勒尊像을 만들어 金堂에 모시고 額字를 '現身成道彌勒之殿'이라 했다. 또 阿彌陀佛像을 만들어 講堂에 모셨는데, 남은 金液이 모자라 몸에 전부 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아미타불상에는 또한 얼룩진 흔적이 있다. 그 액자는 '現身成道無量壽殿'이라 했다. …
분황사 천수대비(芬皇寺千手大悲)
맹아득안(盲兒得眼)
경덕왕(景德王) 때에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희명(希明)이라는 여자의 아이가, 난 지 5년 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어느날 어머니는 이 아이를 안고 분황사(芬皇寺) 좌전(左殿) 북쪽 벽에 그린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에 나가서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빌게 했더니 (멀었던 눈이) 드디어 떠졌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무루플 고조며 (무릎을 세우고
둘 바당 모호누아 두 손바닥 모아,
千手觀音ㅅ 前아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에
비 두누오다 비옵나이다.
즈믄 손 즈믄 눈흘 1,000손과 1,000눈을
노하 더디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기를,
둘 업는 내라 둘 다 없는 이몸이오니
그 고티누옷다라 하나만이라도 그윽이 고쳐질 것이라.
아으으 나애 기티샬 아아! 나에게 주시오면,
노 慈悲여 큰고 그 자비[慈悲]야 얼마나 클 것인가.)
찬(讚)해 말한다.
죽마(竹馬)·총생(葱笙)*1의 벗 거리*2에서 놀더니,
하루아침에 두 눈이 멀었도다.
대사(大士)가 자비로운 눈을 돌리지 않았다면,
헛되이 양화(楊花)를 보냄이 몇 춘사(春社)런고
*1 총생(葱笙; 파로 피리를 만들어 불며 놀던 벗)
*2 陌塵; 항간, 저자거리(阝百; 동서를 阝百, 남북을 阡[또는 그 반대]이 라 한다.)
*3 社春;춘사(春社)를 말함이니, 입춘(立春) 후 다섯 번째 무일(戊日)의 명칭. 여기서 는 그저 ‘봄’, 또는 ‘해’란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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