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講 10.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1908년 3월 프랑스의 동양학자이며 탐험가 펠리오(P.Pelliot)는 중국의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에 있는 천불동(千佛洞; 又名莫高窟)의)에서 필사본으로 된 문화재급의 각종 경전 및 고문서, 탱화(幀畵) 등을 발견했다. 그 가운데 1200여 년간 잠들어 있던 앞뒤가 떨어져 나간 두루마리 하나가 있었다. 한 줄에 30자 내외, 230줄, 총 6000여 자로 된 글이었다. 제명도 저자명도 없었다. 내용은 인도 방면을 여행한 구도승(求道僧)의 기행문이었다. 그는 당나라 중 혜림(慧琳)의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제100권 속에 들어있는 “혜초왕오천축국전(慧超往五天竺國傳)”임을 알아냈다.
이듬해에는 당시 북경대학 학장이던 석학 나진옥(羅振玉,1866-1940)이 그의 “돈황석실유서(敦煌石室遺書)”에 이것을 영인해 넣음으로써 세인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1911년에는 일본인 학자 후지다[藤田豊八]가 본격적인 “왕오천축국전”의 주석서 “혜초왕오천축국전 전석(慧超往五天竺國傳 箋釋)”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혜초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고 아마 중국인 중이거니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1915년 일본인 학자 다카스키[高楠順次郞]가 “혜초전고(慧超傳考)”를 발표함으로써 혜초가 신라의 중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처럼 국외에서 “왕오천축국전”에 대한 연구 내지는 번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자, 국내에서는 1943년 최남선(崔南善)이 “삼국유사” 부록에다가 그 원문을 싣고 간단한 해제를 붙여 간행함으로써 쉽게 그 원문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내용의 대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남쪽 광주(廣州)에서 해로로 남지나해를 돌아 동부 인도로 들어가서, 먼저 나체국(裸體國)을 구경하는 데에서부터 기행은 시작된다. 이어서 석가가 입멸(入滅)한 구시나국(拘尸那國)을 보고, 남쪽으로 석가가 최초로 설법한 파라나시국(波羅痆斯國)을 지나, 동쪽으로 불교사상 맨 처음으로 절을 세운 왕사성(王舍城)을 유람하고, 다시 남쪽으로 석가가 도을 이룬 부다가야[佛陀伽倻]를 거쳐, 서북쪽으로 발을 돌려 중천축국의 석가의 탄생지인 지금의 네팔의 롬비니까지 가서 보고, 다음은 남천축국을 두루 구경한다. 여기서 서북으로 방향을 돌려 서천축국을 둘러보고, 동북쪽으로 북천축국을 방문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지금의 파키스탄 지역,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페르시아 지역을 지나 소련의 영토인 중앙아시아 지방, 곧 파미르 고원 지방에까지 발길이 이어진다. 도착한 곳은 쿠차국[龜玆國; 지금의 庫車], 곧 당나라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지방이다. 여행 기간은 723년부터-727년까지이며, 40여 개 지역의 견문과 전문을 개괄하였으므로, 그 내용은 소략하다. 정수일 교수는 ‘왕오천축국전’이 원래 상․중․하 세 권으로 돼 있었다는 당나라 승려 혜림의 ‘일체경음의’의 기록이나 이 책에 주석된 85개의 어휘를 비교해볼 때, 나진옥(羅振玉)의 견해대로 그 세 권의 원본을 축약한 절약본(節略本)것이라고 판단했으며, 그동안 이 책이 언어표현이나 문법구조상 평가 절하됐던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주장한다.
♣혜초(慧超 ; 704[신라 聖德王 3년] ~ 787); 통일신라시대의 승려.16세 때 당나라로 가서 광주(廣州)에서 인도 출신의 밀교승 금강지(金剛智)를 사사(師事)했다. 금강지는 남인도 출신으로 제자인 불공(不空)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와서 밀교의 초조(初祖)가 되어 당시 장안(長安)과 낙양(洛陽) 등지에서 밀교를 가르치고 있었다. 혜초가 약관의 나이에(723년) 인도로 구법(求法) 여행을 떠날 결심한 것도 금강지의 권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인도로 가는 여행은 해로(海路)를 통해 갔다가 육로(陸路)로 돌아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장안에 머무르면서 733년 정월 초하루부터 장안에 있는 천복사(薦福寺)에서 스승인 금강지를 모시고 밀교(密敎)를 연구하다가 스승이 입적하자 다시 그의 제자인 불공(不空)에게서 배우고, 774년 가을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역경을 시작하였다. 이때 혜초는 불공의 6대 제자 가운데 제2인자로 유촉(遺囑)을 받았으며‚ 중국 밀교의 법맥은 금강지-불공-혜초로 이어지게 되었다. 불공이 죽은 직후 혜초는 동문제자들과 함께 황제에게 스승의 장례를 돌보아준 데 대한 표문(表文)을 올렸으며 그 뒤 수년 동안 장안에 머물러 있다가 780년 불경을 번역하기 위하여 오대산(五臺山) 건원보리사(乾元普提寺)에 들어가 노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혜초가 살아 있을 때 신라로 귀국한 흔적을 비롯하여 그 이후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렇게 그는 80여 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여 년간을 밀교 연구에 전념하여 중국 밀교의 정통을 이어받은 계승자가 되었다. 저작으로는 <왕오천축국전>이 있다.
(이상은 李錫浩 譯 “往五天竺國傳(外)”[을유문고 46,1970년 초판]을 토대로 작성한 것임)
♣문학사적 의의
1.우리나라 기행문학의 효시.
2.노정기 속에 서정시를 넣어두는 방식을 사용하여 후세 기행문의 전범을 보였다. 모두 다 섯 수의 한시가 들어 있는데, 그것을 읽으면 젊은 구도자의 마음의 변화를 생생하게 읽 을 수가 있다.
3.최치원(857∼?)이 당나라에서 활동한 시기보다 무려 110년 이전에 지어진 글이다.
4.세계 4대 여행기로도 손꼽히며 또한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세계 4대 여행기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13세기 후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14세기 초반의 오도록의 “동유기” 그리고 14 세기 중반의 “이븐바투타 여행기'”를 손꼽는데, 그 중에서도 혜초의 것이 가장 오래되었고,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대한 거의 유일한 기록으로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밀교(密敎)
*밀교(密敎); 불교 중의 비교(秘敎), 곧 비밀불교.…
실제로 비밀불교라고 부를 때도 있으며, 탄트라 불교(Tantric Buddhism), 금강승(金剛乘 vaijra-yana), 구생승(俱生乘 sahaja-yana), 시륜승(時輪乘 kalacakara-yana) 등의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각각의 명칭에는 각기 역사적 배경과 내용의 차이가 있다.…
명랑(明朗)·혜통(惠通) 등은 신라 밀교 초기의 대표적인 승려들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밀교적인 수행의식은 호국불교의 형태를 띠면서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게 되었다. 특히 연등회와 팔관회는 고려의 왕실행사로 수용되면서 밀교적인 요소가 두드러진 불교의식으로 변모했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말미암아 불교가 탄압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밀교의 세력도 많이 약화되었다. …
한국의 밀교는 사상이나 교리적인 측면보다는 진언·다라니의 염송과 의식을 통한 개인적·국가적인 소망의 성취라는 세속적 성격이 강했다. 또한 종파적 불교보다는 통불교적(通佛敎的) 입장을 견지해왔던 우리의 전통에서는 뚜렷하게 정립된 '밀교'의 개념이 없으면서도 밀교적 요소는 사상과 의례 전반에 걸쳐 스며들어 있으므로 그것을 여타 종파의 교리나 신앙체계와 뚜렷하게 구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Daum 백과사전에서 발췌)
**종교는 인간적인 것의 거부로부터 시작된다.…종교는 인간에게 罪意識의 올가미를 걸었다. 사랑하라, 용서하라고 외치는 종교는 이제 인간을 거부하는 僞善, 그 온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 인간을 통하여 종교의 본질로 가는 길이 있다. 그것이 密敎다. 밀교란 인간 내부의 深遠한 탐험이다. 道德的으로 위장되기 이전의 인간 탐구다. 밀교, 그것은 인간이 인간을 통해서 영원으로 가는 길이다. 인간적인 것의 극치는 오르가즘이다. 오르가즘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임을 재확인하는 진실, 그 순간이다. 종교적 체험의 극치, 그 悟道의 순간과 性에서의 오르가즘은 같다. 같은 에너지의 두 끝이다. 思考가 깨끗이 머문 상태, 웃음과 울음이 섞여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르짖는 魂의 잠 깨인 상태, 그것은 오르가즘이자 곧 悟道의 순간인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오르가즘은 에너지의 放出을 통해서요, 悟道는 에너지의 凝集된 상태일 뿐이다. 오르가즘이 남녀의 두 육체와 정신이 모두 참가함으로써 가능하다면 悟道는 異性 없이 혼자 깊은 凝集을 통해서이다. 悟道는 性 없는 오르가즘이다.…
性의 오르가즘을 통하여 宗敎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뜨거움이 바로 密敎인 것이다. 이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티벳 後期密敎인 것이다.…
여기 佛敎史의 측면에서 密敎를 볼 필요가 있다. 불교의 초기 형태를 原始, 또는 小乘佛敎라 한다. 小乘의 특징은 欲望의 억제다. 인간적인 일체의 거부다. 이 인간 부정 위에서 그 冷氣의 極寒에서 大乘佛敎運動이 일어났다. 大乘佛敎運動은 高度의 形而上學 위에서 인간적인 일체의 肯定이었다. 이 긍정을 딛고 禪이 나왔다. 「울고 웃는 이대로가 곧 진리」(平常心是道)라는 禪이 나왔다. 禪을 통하여 불교는 비로소 인간에게로 다시 올 수 있었다.
이 禪의 인간 긍정을 요가를 통하여 보다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개발한 것이 密敎다. 七세기경부터 開花하여 인도 전역을 휩쓴 딴뜨라 운동 Tantric Buddhism이다. 여기 다음의 말이 가능하다.
「小乘이라는 씨는 大乘으로 싹터서 禪으로 꽃 핀 후 密敎로 열매를 맺었다.」
이 密敎의 에너지가 가장 열렬하게 타올랐던 시대가 있었다. 그것은 징기스칸을 꼭지점으로 하여 나타난 蒙古, 元帝國의 출현이다. 역사상 蒙古帝國만큼 전 세계를 정복한 나라는 없다. 이 몽고의 에너지가 바로 密敎다. 티벳 밀교(後期密敎)다.…
世祖는 징기스칸이 다진 토대 위에 元을 세운 元 初代皇帝요, 蒙古의 제五대 황제 쿠빌라이[忽必烈]를 말한다. 世祖는 중국의 광범위한 영토 위에 元帝國을 세운 후 티벳 밀교를 깊이 숭배, 각지에 密敎寺院建立과 秘密儀式을 개최하는 등 밀교의 보급에 힘썼다. 그 후 武帝 때에는 <티벳大藏經>을 蒙古語로 번역한 <蒙古大藏經>까지 출간되었다.…
결코 인간은 原罪의 씨가 아니다. 인간은 惡도 아니다, 善도 아니다, 善과 惡이 갈라지기 그 이전의 순수한 에너지, 그 動作火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영원은, 저 니르바아나로 가는 길은 우리의 육체 속에 있다. 인간의 육체는 진리로 가는 第一關門이다.…
(釋智賢, 密敎(8刷), 玄岩社,1985. pp.5-8. '머리말' 중에서.)
***세존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표현되어진 것을 수트라(顯敎;sutra)라고 하고, 원융과 포용성을 극대화한 비밀스런 가르침(密敎)을 탄트라(tantra)라고 하며, 이것을 히말라야를 넘어가 티벳불교의 요체가 되었다.…
탄트라는 근기에 맞는 다양한 수행법이 개발되어 있는데, 모두 요가를 기초로 하고 있다.
남녀의 육체적 합일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는 좌도(左道)밀교는 세계적으로 은밀히 성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겠지만, 정통 탄트라 불교에서는… 남녀합일을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좌도밀교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여긴다.
(http://yeonmiso.com.ne.kr/tibet/tantra.htm)
****탄트라(tantra)는 ‘정신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tatri’ 또는 ‘tantri’에서 나온 말이다. 이러한 말들은 본래 피륙을 짜는 ‘날실’과 관계가 있으며 그 어원은 ‘넓힌다’라는 의미의 ‘tan’이다. 그래서 탄트라는 ‘지식을 넓힌다’라는 의미와 함께 ‘경전’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경전을 지칭하는 ‘실’의 의미인 ‘sutra’와는 다르다. 수트라가 이론을 중심으로 하는 데 반해 탄트라는 실천에 더 중점을 두었다. …
힌두탄트라는 다시 세 종류로 구별된다.
첫째 가장 주도적인 유형은 종교적인 우도 탄트라이다. 이 파는 샤크티 여신을 숭배하는 종교의례에 중점을 둔다.
둘째 일반인들에게 많은 오해와 비난을 사는 좌도 탄트라이다. 이 파에서는 샤크티와 쉬바를 결합시키는 의식으로 인도 전통사회에서 금기하는 술, 고기, 섹스 등을 수행의 한 방편으로 채택하는 특징이 있다.
셋째 요가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유파이다.
(http://yogakorea21.com/jboard/?p=detail&code=study&id=31&page=1)
*****탄트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전형적인 체험인 성을 초월의 매개로 삼으며 최고신과의 합일(合一)은 오직 성적(性的) 결합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http://blog.theple.com/goryo2005/folder/92.html?uid=1042)
♣기타 참고자료
慧超(外) 著, 李錫浩 譯, 乙酉文庫 46, 往五天竺國傳(外), 乙酉文化社, 1984.
정수일 역주, 학고재(02-736-1713), 2004, 4만8천원
*세간은 정씨를 ‘무하마드 깐수’란 이름으로 기억한다. 필리핀계 이슬람 학자로 84년 한국에 온 그는 ‘신라ㆍ서역 교류사’를 펴내며 학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1996년 간첩 혐의로 전격 체포된 깐수 박사가 사실은 중국 옌벤 출신의 북한인임이 드러나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분단 시대가 빚은 웃지 못할 희비극이었다. 4년 여의 복역 끝에 2000년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그는 학문 연구에 전념하며 ‘이븐 바투타 여행기’ ‘씰크로드학’ 등을 펴냈고, 작년 4월 사면·복권됐다.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2004.04.23 )
출전;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Korea Cultural Heritage Policy Research Institute)
http://www.chpri.org/board/content.asp?bCat=주요쟁점칼럼&bCode=755&page=35&sColumn=&sText=
♣왕오천축국전 원문과 번역문
(上缺)寶 赤足裸形 外道不着衣(下缺)
逢食卽喫 亦不齋也 地皆平 (下缺) 有奴婢 將賣人罪與殺人罪不殊(下缺)
一月至拘尸那國 佛入涅槃處 其城荒廢 無人住也 佛入涅槃處 置塔 有禪師彼掃灑 每年八月八日僧尼道俗 就彼大設供養 於其空中有幡現 不知其數 衆人同見 當此日之發心非一 此塔西有一河伊羅鉢底水 南流二千里外 方入恒河 彼塔四絶 無人住也 極荒林木 往彼禮拜者 □犀牛大蟲所損也 此塔東南三十里有一寺 名沙般檀寺 有卅餘□村庄三五時常供養彼禪師衣食 今在塔所供養 (下缺)
日 至波羅痆斯國 此國亦廢無王卽□ (下缺) 彼五俱輪 見素形像在於塔中 (下缺)
上有師子 彼幢極麗 五人合抱 文里細 (下缺) 塔時 幷造此幢 寺名達磨斫葛羅僧 (下缺)
外道不着衣服 身上塗灰 事於大天
此寺中有一金銅像 五百□□□ 是摩揭陀國 舊有一王 名尸羅票底 造此像也 兼造一金銅□□ 輻團圓正等卅餘步 此城俯臨恒河北岸置也
卽此鹿野苑拘尸那 舍城 摩詞菩提等四大靈塔 在摩揭陀國王界 此國大小乘俱行 □□得達摩訶菩提寺 稱其本願 非常歡喜 略題述其愚志 五言
不慮菩提遠
焉將鹿苑遙 只愁懸路險 非意業風飄 八塔誠難見 參差經劫燒 何其人願滿 目覩在今朝
又卽從此波羅痆斯國 □□□月至中天竺國王住城 名葛那及自 此中天王境界極寬 百姓繁鬧 王有九百頭象 餘大首領各有三二百頭 其王每自領兵馬鬪戰 常與餘四天戰也 中天王常勝 彼國等 自知象少兵少 卽請和 每年輸稅 不交陣相煞也 衣著言音 人風法用 五天相似 唯南天村草百姓 語有差別 仕□之類 中天不殊 五天國法 無有枷棒牢獄 有罪之者 據輕重罰錢 亦無刑戮 上至國王 下及黎庶 不見遊獵放鷹走犬等事 道路雖卽足賊 取物卽放 不殤煞 如若怯物 卽有損也 土地甚暖 百卉恒靑 無有霜雪 食唯粳糧餠麨蘇乳酪等 無醬有鹽 總用土鍋 煮飯而食 無鐵釜等也 百姓無別庸稅 但抽田子五石與王 王自遣人運將 田主勞不爲送也 彼土百姓 貧多富少 王官屋裏 及富有者 著氎一雙 自口一隻 貧者半片 女人亦然 其王每坐衙處 首領百姓 總來遶王 四面而坐 各諍道理 訴訟紛紛 非常亂鬧 王聽不嗔 緩緩報云 汝是汝不是 彼百姓等 取王一口語爲定 更不再言 其王首領等 甚敬信三寶 若對師僧前 王及首領等 在地而坐 不肯坐床 王及首領 行坐來去處 自將牀子隨身 到處卽坐 他牀不坐 寺及王宅 竝皆三重作樓 從下第一重作庫 上二重人住 諸大首領等亦然 屋皆平頭 塼木所造 自外□ 竝皆草屋 似於漢屋雨下作也 又是一重
土地所出 唯有㲲布象馬等物 當土不出金銀 竝從外國來也 亦不養 駞騾驢猪等畜 其牛總白 萬頭之內 希有一頭赤黑之者 羊馬全少 唯王有三二百口六十七匹 自外首領百姓 總不養畜 唯愛養牛 取乳酪蘇也 土地人善 不多愛煞 於市店間 不見有屠行賣肉之處 此中天大小乘俱行 (下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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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없어졌음)삼보(三寶)를 사랑하지 않는다.(원문에는 ‘寶’자만 남아 있으나 뒤의 내용으로 미루어 조금 말을 붙였음.) 맨발에 나체며 외도(外道; 異敎徒)라 옷을 입지 않는다.(밑에 빠졌음) 음식을 만나면 곧 맛있게 먹으며 재계도 하는 일이 없다. 땅은 모두 편평하다.(밑에 빠졌음) 노비를 소유하고 있으며 사람을 파는 죄와 사람을 죽이는 죄가 다르지 않다.(여기까지의 풍속을 지닌 나라는 말레이반도의 북부 해안일 것이라 함.)
한 달 뒤에 구시나국(拘尸那國;구시나가라[拘尸那揭羅-Kusinagara]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카시아[Kasia]로, 석가가 입멸한 곳)에 도착하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곳이다. 그 성은 황폐되어 사람이라곤 살지 않는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곳에 탑을 세웠는데, 선사 한 사람이 그곳을 청소하고 있었다. 매년 8월 8일이 되면 중과 여승, 도인과 속인들이 그곳으로 나아가 대대적으로 불공을 드린다. 그때 공중에 깃발이 휘날리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보고 이날을 당하여 (불교를 믿고자) 발심(發心)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 탑의 서쪽에 한 강이 있는데 이라바티수(伊羅鉢底水-Airavati)라 한다. 남쪽으로 2천리 밖을 흘러 항하(恒河;갠지스[Ganges] 강의 한자어)로 들어간다. 그 탑 사방은 절벽으로 되어 있고 사람이 살지 않는다. 매우 거친 숲만이 우거져 있다. 그곳으로 예배를 보러 가는 사람은 (간혹) 물소와 호랑이에게 해를 입기도 한다. 이 탑의 동남쪽 30리에 한 절이 있는데, 이름을 사반단사(沙般檀寺)라 한다. 거기에는 30여 (채의) 농막이 있고 서너댓 집에서 때때로 항상 그곳에서 공양하는 선사를 공양한다. 지금도 그 탑에서 공양한다.(밑에 빠졌음)
하루는 파라나시국(波羅痆斯國-Varanasi, 지금의 베나레스[Benares]임. 갠지스 강 왼쪽에 있는데 힌두교의 성지로 현재 힌두대학 및 산스크리트 대학이 있어 힌두 문화의 중심지임.) 이 나라도 황폐되고 왕도 없다.(밑에 빠졌음) 저 다섯 명의 구륜(구린[拘隣-阿若憍陳如,憍陳如라고도 함. 阿若는 잘 알았다는 의미로 初知 등으로 번역함. 憍陳如는 성.] 등 5 比丘로 석존이 출가할 때 부왕의 명으로 태자를 모시고 함께 사람으로 부처가 成道 후 鹿野苑에서 교화하여 비구가 됨.)의 흰 빛의 소상(塑像)이 탑 속에 있어서 볼 수 있다.(밑에 빠졌음) 위에 사자상(獅子像)이 있는 저 당(幢-石柱)은 매우 아름답고 다섯 아름이나 되었는데, (새겨진) 무늬가 세밀했다.(밑에 빠졌음) 탑을 세울 때 이 당(幢)도 함께 만들었다. 절의 이름은 달마카크라 (達磨斫葛羅-Dharmachakra; ‘Dharma’는 '法', chakra는 '輪'으로 곧 '法輪[진리의 수레바퀴])라 한다.(밑에 빠졌음)
외도(外道)라 옷을 입지 않고 몸에다가는 재[灰]를 칠하고 대천(大天-梵語로 마하테바[摩訶提般-Mahadeva]인데 시바[Siva]神을 가리킴. 시바神은 힌두교의 파괴신으로, 하나의 얼굴 또는 다섯 개의 얼굴을 가지고 과거․ 현재․ 미래를 투시하는 세 눈을 가지고 있다.)을 섬긴다. 이 절 안에는 하나의 금동상과 500의 독각상(獨覺像)(원문에는 석 자 缺字로 되어 있는데, 다카구스[高楠順次郞]의 考訂에 의함. 독각상은 나반존자[那畔尊者]의 상인 듯. 옛날 나반존자가 天台山에서 혼자 도를 닦아 緣覺에 이르렀으므로 세상에서 獨聖이라 한다.)이 있다. 이 마가다(摩揭陀-Magadha) 나라에는 전에 왕이 한 분 있었는데 이름이 실라디탸(尸羅票底-尸羅阿迭多Siladitya; 7세기경 불교와 문학을 보호한 왕. 戒日王이라고도 한다. 尸羅는 戒律, 律.)였고, 그가 이 불상을 만들었다. 겸하여 하나의 금동으로 된 법륜(法輪;원문에는 법륜이란 말이 없는데, 전기 다카구스의 고정에 의한 것. 법륜은 轉輪聖王의 金輪이 산악지대의 암석을 분쇄하는 것과 같이 중생의 악을 잘 분쇄한다는 뜻에서 부처의 교법을 말함. 전륜성왕은 須彌 4洲를 통솔하는 대왕)을 만들었는데 바퀴의 원주(圓周)가 30여 보(步)나 된다. 이 성은 항하를 굽어보는 북안에 위치해 있다. 곧 이 녹야원(鹿野苑-Mrgadava; 석가가 최초로 설법한 곳으로 사슴이 많아 붙은 이름.)과 구시나(拘尸那-Kusinagara)와 사성(舍城-王舍城; 기원 전 5세기까지 마가다국의 수도임. 5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있는데, 동쪽에 있는 산이 靈鷲山이다. 불교 사상 최초의 精舍가 세워진 곳)과 마하보리(摩詞菩提-Mahabodhi;大覺이란 뜻)의 4대 영탑(靈塔)이 모두 마가다국 경계 안에 있다. 이 나라(파라나시국)에는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같이 시행되고 있다. 마하보리사를 예방하는 것은 나의 평소부터의 숙원이라 할 수 있기에 매우 기쁘므로 그 어리석은 뜻을 대략 서술하여 오언시를 짓는다.
보리수(석가가 正覺한 곳,석가가 입멸한 날에는 잎이 시든다고 함,)가 멀다고 근심하지 않았는데 어찌 녹야원이 멀다 하리요. 다만 매달린 것 같은 길이 험함을 걱정할 뿐 악업(惡業) 같은 바람의 휘몰아침도 생각지 않네. 여덟 개의 탑은 참으로 보기 어려우니 어지러이 오랜 세월에 (마음만) 태웠도다. 어찌해야 사람의 소원 이룰 수 있는지 오늘 아침 목도함을 이루어 보리라.
또 곧 이 파라나시국으로부터 반달쯤 걸려(석 자가 빠졌는데, 거리상으로 보아서) 중천축국의 왕이 살고 있는 성에 도착하였다. 그 이름은 카냐굽자(葛那及自-Kanyakubja; 현재의 카나우지[Kanauj], 玄奘의 “大唐西域記”에는 曲女城이라고 했다.)이다. 이 중천축국의 경계는 매우 넓고 백성들도 많고 번잡하다. 왕은 9백 마리의 코끼리를 가지고 있고, 기타 대수령들은 각각 3백 또는 2백 마리의 코끼리를 가지고 있다. 그 왕은 언제나 스스로 병마를 거느리고 싸움을 하는데, 항상 다른 네 천축국과 싸움을 하면 이 중천축의 국왕이 늘 이겼다. 그(싸움에 진) 나라들은 코끼리가 적고 병력도 적음을 알아 곧 화친하기를 청하고 해마다 공물을 바치고 서로 진을 치고 죽이는 교전을 하지 않으려 한다.
의복과 언어, 풍속, 그리고 법률은 다섯 천축국이 서로 비슷하다. 오직 남천축의 시골 백성들의 언어가 차이가 있으나 벼슬아치들의 무리들은 중천축국과 다른 데가 없다.
이 다섯 천축국의 법에는 목에 칼을 씌우거나, 매를 때리는 형벌과 감옥이 없다. 오직 죄인에게는 그 죄의 경중에 따라 벌금을 물릴 뿐 사형도 없다. 위로 국왕에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사냥한다고 매를 날리거나 엽견(獵犬)을 사용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길에는 도적이 많기는 하나 물건만 빼앗고는 즉시 풀어 보내고 그 자리에서 죽이거나 해를 끼치지는 아니한다. 그러나 즉시 물건 주기를 꺼려하면 몸에 해를 끼치기도 한다.
이 땅은 기후가 아주 따뜻하여 온갖 풀이 항상 푸르고 서리나 눈은 볼 수 없다. 먹는 것은 오직 쌀 양식과 떡, 보릿가루, 우유 등이며 간장은 없고 소금을 상용한다. 흙으로 구워 만든 냄비에 밥을 익혀 먹지, 무쇠로 만든 가마솥은 없다. 백성에게는 별로 받아들이는 세나 용(庸)은 없고, 다만 토지에서 나오는 곡식에서 다섯 섬만 왕에게 바치면 왕이 직접 사람을 보내서 그 곡식을 운반해 가고, 토지 주인은 곡식을 바치기 위해 운반하는 수고가 필요 없다. 그 나라 땅에 사는 백성은 빈자(貧者)가 많고 부자는 적은 편이다. 왕이나 벼슬아치, 그리고 부자 백성은 전포(氈布)로 만든 옷 한 벌을 입고, 스스로 지어 입는 사람(중류 계급)은 한 가지만 입고, 가난한 사람은 반 조각만 몸에 걸친다. 여자도 역시 그렇다.
이 나라의 왕은 마냥 정아(政衙)에 앉아 있으면 수령과 백성들이 모두 와서 왕을 둘러싸고 그 주위에 둘러앉는다. 각기 어떤 일에 대하여 도리를 내세워서 논쟁이 일어나고 소송이 분분하여 비상히 요란하게 입씨름이 벌어져도 왕은 못 들은 척하고서 듣고도 꾸짖지 아니하다가 거의 끝날 무렵이 되면 왕이 천천히 판결을 내리는데, "너는 옳고, 너는 옳지 못하다."고 한다. 그러면 왕이 내리는 한 마디로써 결정을 삼고 비록 불평이 있는 자도 다시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 나라의 왕과 수령 등은 3보(寶)에 대하여 심히 공경하고 믿는다. 왕과 수령 등이 만약 스승 되는 중을 대하게 되면 땅바닥에 그대로 앉고, 평상(平床)에 앉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왕과 수령이 자기 집을 떠나서 다른 곳에 갔다가 올 때에는, 그 가는 곳까지 스스로 자기가 앉았던 상자(狀子)를 가지고 자기 몸을 따라 오게 하여 그 곳에서도 자기가 전용하는 평상에 앉지, 다른 평상에는 앉지 않는다. 절이나 왕의 궁전은 모두 3층으로 짓는다. 제일 밑의 층은 창고로 쓰고, 위에 있는 두 층은 사람이 거처하는데, 큰 수령들의 집도 이와 마찬가지다. 집은 모두 지붕이 평평하며 벽돌과 목재로 지어져 있다. 그러나 그 밖의 백성들의 집들은 초가집이다. 중국의 한옥(漢屋)과 같아서 빗물이 아래로 흐르도록 지었고, 또 단층들이다.
토지에서 소출되는 것으로는 오직 전포(氈布)․ 코끼리․ 말 등이며 그 땅에서는 금과 은은 생산되지 않아 모두 외국으로부터 들여온다. 또한 낙타․ 노새․ 당나귀․ 돼지 등의 가축도 기르지 않는다. 그곳의 소는 모두 흰색인데, 일만 마리 중에 드물게 한 마리 정도가 붉거나 검은 것이 있다. 양과 말은 아주 적어 오직 왕만이 2,3백 마리의 양과 6,7십 필의 말을 소유하고 있다. 이밖에 수령과 백성들은 모두 다른 가축은 기르지 않고 오직 소를 기르는 것만 좋아한다. 우유와 버터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착민들은 착하여 살생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장의 점포에서도 가축을 잡는다든가 고기를 파는 곳을 볼 수가 없다. 이 중천축국에서도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함께 행하여진다.(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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