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32)
진도, 탐라의 삼별초군과 왜구를 무찌른 무장 김방경(金方慶)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4. 慶尙道 安東大都護府 人物 條]
이 웅 재
김방경(金方慶;1212~1300)의 자는 본연(本然)이고 본관은 안동이다. 어머니가 그를 임신하였을 때에 꿈에 구름과 노을을 먹고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구름 기운이 아직도 나의 입과 코에 있다. 아이는 반드시 신선(神仙) 가운데서 왔을 것이다.” 하였다. 출생한 뒤에는 조금만 성나는 일이 있어도 반드시 시가(市街)의 큰 길에 누워서 울었는데 소와 말이 피해 가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고종 때 16세의 나이로 음서(蔭敍)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으로 있을 때는 몽고군의 침략으로 위도(葦島)에 들어가 성을 쌓고 지내면서 방파제를 쌓아 바닷물을 막아 경작하게 하였더니 백성들이 처음에는 고통스럽게 여겼으나 가을에 풍족하게 추수를 하여 그 덕택에 살아나갈 수가 있게 되자, 모두들 그 방파제를 김공언(金公堰)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원종 때 임연(林衍)이 왕을 폐립(廢立)했을 때에는, 황제께 올리는 글을 가지고 원나라로 가 있었는데 원나라에 있던 세자가 군대 파견을 요청하였고, 왕은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나 몽가독(蒙哥篤)이 파견되면서 그와 함께 귀국하였다. 이에 앞서 최탄(崔坦)과 한신(韓慎)은 임연이 몽가독을 죽이고 제주(濟州)로 들어가려고 한다는 계책을 몽가독에게 알려주면서 그것을 빌미로 하여 사냥하러 간다고 핑계를 대고 거사를 하면 왕경[開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부추겼다. 오득공(吳得公)이란 자가 그 일을 몰래 알려주어 몽가독으로 하여금 사냥을 가지 못하도록 하였더니, 몽가독이 사실대로 알려주면서, “왕경을 멸망시키려고 하는 자가 어찌 다만 최탄 등만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다른 사람들의 이름도 알려주었으나, 이 일은 비밀에 부쳤으므로 전하지 않는다.
삼별초(三別抄)의 난 때에는 진도(珍島)를 거점으로 주군(州郡)을 침략하는 적군(賊軍)과 대적하다가 적들에게 포위당하기도 했다. 김방경의 군사들이 모두 죽을힘을 다하여 싸웠으나 화살도 돌도 다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 모두가 화살에 맞아 일어나지도 못하였고, 김방경 또한 여러 번 창에 찔렸지만 오히려 호상(胡床; 걸상처럼 된 간단한 접이 의자)에 앉아 군사들을 지휘하였는데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고 양양하였다.
드디어 진도의 적을 대파하매 적군들은 탐라(耽羅)로 달아나 내성과 외성을 쌓고 그 험준함을 믿고 더욱 날뛰었다. 김방경이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 탐라로 떠나려 하였는데, 각 도(道)에서 온 전선들이 모두 바람에 휩쓸려 없어졌으므로 호남(湖南)에서 온 160척만을 가지고 떠났다. 함대가 추자도(楸子島)에 이르렀는데 돌연 거센 바람이 불어서 어디로 가는지 방향도 모르는 채 떠가다 보니 탐라 근처였다. 바람과 파도가 얼마나 세찬지 전진도 후퇴도 불가능했다. 김방경이 하늘을 우러러, “사직의 안녕과 위태로움이 달렸는데 오늘의 성패는 어찌 하늘에 있지 않겠는가?” 탄식하였더니, 이윽고 풍랑이 멎어 함덕포(咸德浦)로부터 공격해 들어갔다. 적군이 더러는 항복하고 나머지는 자성(子城)으로 들어갔다. 김방경이 여러 장군들을 지휘하여 자성으로 쳐 들어가서 겁에 떨고 있는 주민들에게 말했다. “다만 큰 괴수들만 죽이려 할 뿐이니 겁내지 말라.”하고 그 우두머리 김윤서(金允叙) 등 6명을 잡아다가 네거리에서 참형에 처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친당(親黨) 35명을 사로잡고 항복한 무리 1,300여 명을 배에 나누어 싣고 귀환하였다. 김방경은 그 공훈으로 드디어 시중(侍中)이 되었다.
그해 가을, 황제의 명령을 받고 원나라에 갔는데, 황제는 문지기를 시켜서 빨리 들어오라고 독촉하고 김방경을 승상(丞相)의 다음 자리에 앉히고 자기 음식을 걷어서 주기까지 하였다. 또 금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비단으로 만든 옷과 금, 은 등을 주었는데, 이러한 총애와 우대는 일찍이 다른 사람은 받아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원종 15년(1274)에는 황제가 일본을 정벌하고자 함에 김방경이 먼저 대마도(對馬島), 일기도(一歧島)의 왜군을 크게 패퇴시키기도 했다.
충렬왕 원년(1275)에는 원나라에 가서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이러한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도 많아 가끔 반역죄로 몰리는 참소를 받아 고문을 당하여 몸뚱이가 온전한 데라곤 없이 기절했다가 다시 살아나기를 거듭하기도 하였으나, 그때마다 그의 무죄를 변호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겨우 죽음을 면하곤 했다.
김방경은 몸집은 작았으나 사람됨이 엄숙하고 굳세었으며, 국정을 잡아 수십 년 동안 다스리면서 몸은 근검하였고, 문하의 선비들을 천거하기를 좋아하여 수하에 많은 이름난 신료와 뛰어난 장수를 두었다.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며 늘 웃음을 띠고 지내었다. 마음이 관후(寬厚)하여 작은 절차에 구애되지 않았고, 전고(典故)를 많이 알았으며, 늙어서도 머리털이 희어지지 않고 추위나 더위에도 병드는 일이 없었다.
그가 신년축하차 원나라에 가 있었을 때였다. 황제는 그의 좌석을 승상 다음 자리에 앉게 했으며 진수성찬을 내려주고, 귀국하게 되자 활․ 화살․ 검․ 백우갑(白羽甲) 등을 내려주었다. 그때 승상 안동(安童)은 우리나라에 유익한 일을 해 준 사람이었는데, 변두리인 삭방(朔方)에 나가 있었다. 김방경이 상으로 받은 금과 비단을 그 부인에게 보내 주었더니, 부인은 “승상이 북쪽으로 가고 난 뒤 누가 곤궁한 처지에 있는 이런 부녀자를 생각해 주겠는가?”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러 번 왕에게 은퇴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충렬왕 9년(1283)에야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重大匡 僉議中贊 判典理司事 世子師)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비록 치사(致仕)하고 한가하게 살 때일지라도 나라를 근심하는 것을 자기집안 일과 같이 하였다. 나라에 큰 의논이 있으면 임금이 반드시 그에게 자문(咨問)하였다. 충렬왕 26년에 병으로 죽으니 나이가 89세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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