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물열전

경북 인물열전 31. 형제간의 우의를 위해 금덩어리도 강물에 던졌던 이조년

거북이3 2008. 11. 18. 23:49

경북 인물열전 (31)

  형제간의 우의를 위해 금덩어리도 강물에 던졌던 이조년(李兆年)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8. 慶尙道 星州牧 人物 條]

                                                                                     이   웅   재

 이조년(李兆年;1269년-1343년)의 자는 원로(元老)이고 호는 백화헌(百花軒) 또는 매운당(梅雲堂)이다. 성주 이씨(星州[京山]李氏) 이장경(李長庚)의 5형제 중 막내였다. 형제들의 이름은 이백년(李百年), 이천년(李千年), 이만년(李萬年), 이억년(李億年), 그리고 이조년(李兆年)으로서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 그들 형제간의 우애는 남달랐다고 한다. 특히 바로 위의 형 이억년과의 우애를 말해주는 형제투금(兄弟投金, 投金灘)이란 일화는 유명하다.

 고려 공민왕 때의 일이다.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아우가 황금 두 덩이를 주워서 형에게 하나를 주었다. 나루터에 와서 형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는데, 아우가 갑자기 금덩이를 강물 속으로 던지므로 형이 괴이하게 여겨서 물었다. 아우가 대답하기를, “제가 평소에 형님을 독실하게 사랑하였는데, 이제 금을 나누어 가진 다음에는, 형님을 꺼리는 마음이 갑자기 생깁니다. 이것은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라, 강에 던져서 잊어버리는 것이 낫겠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형도 “네 말이 참으로 옳다.” 하고, 또한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그 때 같은 배에 탔던 자는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뿐이었던 까닭에, 그 형제의 성씨와 거주하는 마을을 물은 사람이 없었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10권 양천현(陽川縣) 산천조 ‘공암진(孔巖津)’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초등학교 3학년 1학기 국어교과서 p.38에도 나온다.

 조선 후기의 문신 황덕길(黃德吉 :1750~1827)의 시문집인 하려집(下廬集)에 의하면, 여기 에 나오는 형제는 성주이씨 가승(星州李氏家乘)에 이억년 이조년 형제의 일화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개성유수(현 서울특별시장급)를 지냈던 이억년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경남 함양군으로 낙향할 때, 그 동생인 선생이 한강 나루 건너까지 배웅해 주다가 생긴 일이라고 한다.  공암진 터는 현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 구암공원(龜巖公園; 구암은 許浚 선생의 호)에 있는데, 그 안내문에도 이러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형제투금 전설부터 소개하다 보니 글의 선후가 바뀐 것 같다.

 선생은 20세 전에 벌써 용모가 빼어나고 총명하였으며 재능과 도량이 있어 초계(草溪) 정윤의(鄭允宜)가 고을 부사(府使)로 와서 한 번 보고 사위로 삼을 정도였다고 한다. 선생은 회헌 안향(晦軒 安珦)의 제자로 충렬왕(忠烈王) 때에 과거에 올라 비서랑(祕書郞)이 되어 왕을 따라 원(元) 나라에 조회를 하였다.

 뒤에 충숙왕(忠肅王)이 참소를 당하여 원 나라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선생이 이를 분히 여겨 원 나라에 가서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바쳐 왕의 죄 없는 것을 하소하니, 조정에서 모두 선생을 아름답게 여겼다.

 충혜왕(忠惠王)이 원 나라에 숙위(宿衛)하여 있을 때, 자못 근신하지 못하는 것으로 소문이 나자, 선생은 경계하는 말로 아뢰기를, “전하가 천자를 섬기고 있으니 마땅히 하루하루 새로워야 하겠는데, 어째서 예를 버리고 정욕에 방종하여 스스로 누(累)를 초래하십니까. 좌우가 모두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니 어디에서 바른 말을 듣고 바른 일을 보겠습니까. 원하건대 행실을 고쳐 경계하고 단정한 선비를 친히 하소서.”하고 간하기도 하였다. 왕이 그 말을 싫어하여 담을 넘어서 달아났다고 할 정도였다.

 조적(曺頔)의 난 때에는 백관들이 대부분 적에게 붙었는데 선생이 의리로 적(頔)의 당을 효유(曉諭, 曉喩; 깨달아 알아듣도록 타이름)하여 듣는 자가 모두 감격하였다. 그러나 왕이 아첨하는 소인을 가까이하고 충성하고 곧은 사람을 미워하므로 선생은, 자주 사직하기를 청하기도 하였다.

 왕이 송강(松岡)에서 탄자(彈子)로 참새 잡는 놀이에 빠졌을 때에는, 임금 앞에 끓어 앉아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벌써 참소를 받고 불우하던 때를 잊으셨습니까? 지금 악소년(惡少年)들이 전하의 위력을 빙자하여 부녀자들을 노략하고 재물을 강탈하여 백성들이 살 수가 없어서, 신(臣)은 그 화(禍)가 조석(朝夕)에 미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러함을 걱정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질구레한 오락 따위에나 빠지십니까? 전하가 늙은 신의 말을 들어서 아첨하고 간사한 자를 버리고, 어질고 선량한 사람을 쓰며 다시는 부질없이 노는 것을 멀리하신다면, 신은 비록 죽더라도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자주 간하여도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선생은 탄식하기를, “자주 간하여도 듣지 않으니 책임이 돌아갈 데가 없다. 이미 그 아름다움을 순하게 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 악함만 더하게 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사랑하는 도리가 아니니, 그만두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다음날에 필마(匹馬)로 고향에 돌아가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정당문학(政堂文學)의 직함으로서 죽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선생은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鄕里)인 성주에서 살 때 나라와 임금의 일을 걱정하여 잠 못 이루는 심정을 읊은 시조 다정가(多情歌)를 짓기도 했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선생은 키는 작았으나 성품이 치밀하고 용감하였으며, 의지가 굳세고 심지가 대담하였을 뿐만 아니라 매사에 엄격하여서 임금에게까지도 거리낌 없이 직간을 서슴지 않았으므로, 왕의 꺼리는 바가 되기도 했다. 선생이 궁중에 임금을 만나러 들어갈 적마다 임금은 선생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서도 “아, 이조년이 오는구나.”라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는 측근을 물리치고 몸을 단정하게 한 연후에야 선생을 맞이했다고 한다.


 이러한 선생을, 조선조 거유(巨儒)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은 ‘그는 난세에 태어나서 수많은 변고와 험난을 겪으면서도 혼미한 임금을 받들어 지조가 금석 같았고 충직한 깊이가 후세에 우뚝하여 고려 500년 역사의 제1인자’라고 찬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