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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쓰기 13) [사고의 폭을 넓히자 ③ 필연성과 우연성의 해후]

거북이3 2008. 12. 8. 00:57

 (수필 쓰기 13) [사고의 폭을 넓히자 ③ 필연성과 우연성의 해후]

                                                                  

                                                            이 웅 재

 함박눈이 펄펄 날린다. 바람이 분다는 증거다. 함박눈은 그 바람을 즐기는 듯하다. 일반적으로는 ‘바람’이란 부정적 의미로 이해되는데 말이다. ‘바람 잘 날 없다’든가 ‘바람 앞의 등잔불’이 그렇고 ‘모진 풍파(風波)에 휩쓸려’ 같은 표현들도 그렇다. 헌데 함박눈은 바람 부는 대로 이리 펄럭, 저리 펄렁거리는 것이다. 그렇다. 가만히 보면 즐기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잔한 느낌을 가져다주고 있는 분분편편(紛紛片片)한 춤사위, 그 춤사위에 이어져 어디선가 애절한 한 가닥 노랫소리라도 들려오는 듯싶다.

 그렇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노랫소리, 그러니까 그것은 ‘바람노래’ 곧 ‘풍요(風謠)’일 것이다. 우리에겐 일찍이 ‘풍요(風謠)’가 있었다. “바람과 같이 떠돌아다니는 노래”(임동권. 한국민요사. 집문당. 1964. p.35.) 그것은 ‘민요’(최철. 향가의 본질과 시적 상상력. 새문사. 1983. p.244.)일 수밖에 없다. 풍요와 같은 소위 4구체 향가뿐만 아니라, 흔히들 귀족문학이라고 일컫는 10구체인 사뇌가(詞腦歌)까지도 “세상 사람들이 희롱하고 즐기는 도구(夫詞腦者 世人戱樂之具)”라 하였음은 물론, “이 노래들은 사람의 입으로 전파되어 왕왕 여러 담장이나 벽에까지 씌어졌다.”(균여전. 제7가행화세분.)고 하였으니,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민요였던 것이다.

 이 노래는 양지(良志)라는 중이 영묘사(靈廟寺)라는 절에 어른의 키보다도 훨씬 큰 삼존불상을 만들 때 성안의 선남선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하면서 부른 노래라고 한다. 영묘사라는 절의 터는 본래 커다란 연못이었는데 두두리(豆豆里)의 백성들이 하룻밤 사이에 메우고 지었다고 하는 절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21. 경주부 佛宇 條) 이런 것으로 보아서 비록 양지라는 중이 지팡이에다가 포대를 걸어놓고 그 지팡이로 하여금 불자(佛者)들의 집 앞에 가서 스스로 땔랑땔랑 소리를 내 가지고 시주를 받아오는 신통력이 있는 스님이긴 하지만 그들 선남선녀의 진흙 운반은 부역의 성질을 지니고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서민들에게는 탐관오리, 조세, 부역 따위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가져다주는 존재들일 수밖에는 없다. 그것은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무서운 존재들이다. 저절로 불평불만이 일어나지만 오늘날과 같이 개명한 시대, 민주화된 사회도 아니니 드러내놓고 그 불평불만을 터뜨릴 수도 없다.

 이제 풍요의 전문을 보도록 하자.

 

 ①오다 오다 오다

 ②오다 서럽도다

 ③서럽다 우리네여

 ④공덕 닦으러 오다


 짧은 형식의 노래이면서도 특히 반복구가 많다. 풍요의 민요적인 성격은 이러한 구조적인 면에서도 드러난다. 민요는 독특한 시어, 까다로운 리듬 등을 싫어한다고 한다.(이상섭. 문예비평용어사전. 민음사. 1976. p.90 참조.) 반복구는 까다로운 리듬이 아닌 초보적인 리듬을 생성시키는 구실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노동요의 경우에 더욱 두드러진다. 노동에서의 힘겨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짧고 단순한 음의 반복이나 후렴구의 사용이 효과적이다. 노동요 중에서도 이 풍요처럼 집단노동요의 경우에는 더욱더 반복구나 후렴구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것은 일체감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다. 여럿이서 같은 음을 함께 반복함으로써 공동체의식을 느끼자는 것이다.

 이 풍요에서 반복구를 제외한다면, 이 노래는 ③과 ④로써 의미망(意味網) 구축이 완결된다. 아주 단순하다. 이 단순함은 집단에게는 꼭 적합한 형태라 하겠다. 집단 속에서도 개개인의 개성이 강하게 되면 의견 따위가 분분해져서 분열을 초래하게 되지만, 개인으로서는 상대하기 힘든 어떤 대상이 눈앞에 있을 때에는 자신을 집단 속에 파묻어버림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 들게 되어서 자동적으로 집단의식이 발현하게 될 것이고, 일단 집단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계기만 성립되면 그 다음부터는 저절로 그 집단의 단순논리를 추종하게 마련이다. 풍요의 구성이 단순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부터 이 노래가 의미하는 바를 하나하나 짚어나가기로 하자. 힘없는 백성이기에 느껴야 하는 서러움이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노래된 말이 어미의 변형조차 없는 ‘서럽다’라는 형태로 드러난 것이리라. ③에서의 이 ‘서럽다’는 이미 ②에서 ‘서럽도다’로 그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러니까 반복된 표현으로서 강조된 표현이다. 그냥 단순한 반복으로서의 강조만으로 끝난 것도 아니다. ‘서럽다 우리네여’는 영탄을 포함한 도치이다. 영탄도 강조를 위한 표현이다. 그런데 또 도치까지 된 것이다. 곧, 이 ‘서럽다’란 표현은 반복․ 영탄․ 도치로서의 3중 장치에 의한 강조이다. 단순한 표현인 것 같으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상당한 무게를 느끼게 만들어주는 조사법(措辭法)의 사용이다.

 노력동원에 끌려나온 서러운 심정이 그토록 무게를 지니고 있지만, 그러한 불평불만을 겉으로 드러내서 표현하지 않고 독백조의 어조로 나타내었기에 더욱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노래를 부른 사람들은 힘없는 서민들인 것이다.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깊숙한 내면의식의 표출이라서, 드러난 것은 단순하지만 내재적인 의미는 상당히 뿌리가 깊다. 이 ‘서럽다’는 풍요 창자들의 내면은, 18,9세기의 것이긴 하지만 김의령(金義齡)의 ‘농요(農謠)9수’의 표현 중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심정의 하나라고 하겠다.


 자식 녀석 즐겁게 장난치지만(孩子方嬉戲)

 어찌 그 몸에 신역(身役) 있음을 알리오.(寧知身有役)

 인생이 어찌 귀하지 아니하리요마는(人生豈不貴)

 너를 나 논 게 무슨 소용이리오.(生爾復何益)

          [안대회. 문헌소재 민요의 조사와 그 가치해명. 최철 편저. 한국민요론. 집문당. 1986. p.147.]

 

 생명의 탄생은 세상 그 어느 일보다도 가장 경사스럽고 존귀한 일이라야 한다. 생명의 탄생은 양기(陽氣)만으로도 안 되고 음기(陰氣)만으로도 불가능하다. 음양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음양의 만남이 필연적으로 조건으로서 주어진다. 그런데 그 만남은 필연적인 것 같으면서도 매우 우연스러운 일로 이루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필연성과 우연성의 해후, 거기서 생겨나는 것이 하나의 생명이다. 따지고 든다면 필연성과 우연성의 해후만으로도 안 된다. 그 만남 이후에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희박한 확률상의 가능성에 의하여 생명은 탄생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우연성일 수밖에 없고, 그 우연성이 너무나도 우연성에 의한 결과이기에 그것은 또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성격을 띤다.

 그러한 힘들고 힘든 과정을 거쳐 탄생하게 되는 생명이니만치 귀하고 값진 것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생명이, 그 생명체의 움직임이 왜 서럽게 보여야만 하는 것일까? 새로 태어나는 생명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별개로, 그는 귀족계급의 일원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또는 서민의 몸으로서 출산될 수도 있다.

 자식이 즐겁게 노는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한없는 기쁨에 젖어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인생은 그럴 수만은 없으니 문제이다. 부모가 서민이기에 선택권 없이 주어진 서민의 신분, 그래서 그 아이에겐 장차 신역(身役)이 기다리고 있게 된다. 그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모습이 부모의 마음을 찢어 놓는다. 귀한 것이 인생이지만, 너를 낳아 놓은 것이 무슨 소용이겠느냐는 넋두리는, 그 넋두리를 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처절한 심정의 표출이다.

 ‘서럽다’는 한마디는 논리적인 수십, 수백 마디의 말로서도 따라잡을 수 없는 말이다. 자의적이지 못한 탄생은, 필연적일 만큼 우연적인 소치이기에 처음 그것은 경탄의 의미를 띠게 될 것이다. 그것이 ①에서의 초발성(初發聲) ‘오다’의 내포 의미가 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는 것이 두 번째의 ‘오다’일 것이다. 그런데 생명의 확인이 달성되는 순간, 그것은 현실에 대한 인식을 동반하고야 만다. 세 번째의 ‘오다’는 바로 그러한 현실 인식의 부르짖음에 해당한다. ①에서의 ‘오다 오다 오다’는 이러한 경탄과 확인, 그리고 현실 인식의 표출이라 하겠다. 그것은 점층적인 반복에 해당한다. 단순한 반복이 아닌, 한발 한발 서민생활의 괴로움을 터득해가는 과정의 표현이라 할 수가 있겠다.

 ②는 그러한 결과의 표현이다. 결국 ‘오다’라는 표현의 점층적 반복에서 최종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서럽도다’였던 것이다. 한편, ‘오다 서럽도다’는 서로 대등한 입장의 나열이 된다.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이 서러운 일로 되어버리는 것이다. ①과 ②는 바로 이러한 현시적(顯示的)이지 못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겠는데, ‘풍요’ 전체의 현시적인 의미망 구축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이승에 태어나게 되었고, 서민으로 태어나게 되었고, 그리고 영묘사로 오게 된 ‘우리네’는 ①과 ②가 없어도 노래가 존재할 수 있듯이, 이 세상에 없어도 관계없는 존재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①과 ②가 없어도 이 노래가 존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나, 실질적으로 ①, ②가 없는 ‘풍요’는 상상할 수가 없다. 그것은 ‘풍요’를 ‘풍요’적이지 못하게 만든다.

 ③에서의 ‘우리네’는 말하자면 귀족집단 또는 지배계급에 대한 서민대중을 가리킨다. 단수가 아닌 복수적 표현은 개체에 대한 ‘백성’, 집단으로서의 ‘서민대중’이기 때문이다. 개체이기를 부정하는 ‘서민대중’이라는 말이다. 개체에의 부정은 개체로 주어진 현실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크다는 현실인식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집단 속에 묻어버림으로써 개체로서의 불안감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인식의 작용이 ‘우리네’로 드러났다고 하겠다.

 마지막 ④의 ‘공덕 닦으러 오다’를 보자.

 ‘공덕 닦으러’라는 의도형의 사용은 그러한 의도로써 어떠한 결과를 기대하자는 의도라고 할 수가 있다. ‘공덕’을 닦는 일은 현실의 서러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에 해당한다. ③에서의 ‘우리네’가 개체를 부정하였듯이 ④에서의 공덕 닦는 행위는 현실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섯 번째로 사용된 ‘오다’는 앞에서 말한 바의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도다)’ 전체를 아예 부정해 버리자는 것이다. 서럽고 괴로운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저항이나 반항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힘이 없기 때문이다. 참고 견디며 내일을 위한 공덕 닦음만이 그들에게 주어진 길이다. 이렇게 1000여 년이 훨씬 넘는 과거의 ‘풍요’에서부터 서민대중의 삶은 ‘인고의 삶’의 모습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것은 다분히 반어적이다. 서러움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 공덕 닦음이라고 하는 인고의 삶으로 부각되는 것은, 마치 이별의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면서, 산화공덕의 축복을 바치고,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는 ‘진달래꽃’의 인고와 유사하다.

 서러움(풍요), 슬픔(진달래꽃)을 인고의 공덕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비극적 타개 방식을 택하지 않을 때, 그것은 박목월의 ‘나그네’와 같은 달관(達觀)의 서러움만으로 점철된다. 여기에는 ‘공덕 닦음’으로서 현실을 벗어나고자 함과 같은 탈출구가 없다. 그러나 정이 있고 풍류스러움이 있어 나름대로 일말의 위안을 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풍요의 ‘오다’가 단지 생명 탄생의 비경(秘境)만을 읊을 수 있는 현대사회에 불리어졌다면,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나 이호우의 ‘개화’류의 노래로 불리어졌음직도 하다. 진통을 겪고 생명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는 신비로움을 강조할 수 있는 자유를 ‘풍요’에 나오는 ‘성안의 선남선녀들’은 지닐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과는 다른 당시 서민들의 모습이었다.

 공덕을 닦음으로써 기대되는 결과, 그것은 내세에의 안녕일 것이다. 다섯 번이나 반복되는 ‘오다’는, 알고 보면 ‘오다’와는 상대적인 것 ‘가다’를 전제로 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오다’에서 ‘가다’까지의 공간적인 거리를 ‘공덕 닦음’으로 메우려는 것이 ‘풍요’이다. 공덕 닦음만이 ‘오다’와 ‘가다’를 연결시켜 줄 수가 있다. 공덕은 가기 위한 통로로 매개항이 된다.

 내세에 대한 관념은 유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내세를 위하여 제시된 것이 양지(良志)다. 양지의 설화를 신비화시킴으로써 내세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키자는 의도인 것이다. 양지 설화의 신비화는 그의 선조나 출신지를 알 수 없다는 양지설화 모두(冒頭)에서부터 드러난다. 지팡이가 혼자서 시주를 받아온다는 전술한 내용에 이르면 그야말로 그 ‘신이(神異)로움은 측량할 수가 없음’에 이른다. 그뿐만이 아니다. 역시 전술한 바, 영묘사의 삼존불상뿐만 아니라 천왕상(天王像), 전탑의 기와, 천왕사(天王寺) 탑 아래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의 주불삼존(主佛三尊), 그 좌우의 금강신(金剛神), 하나의 작은 전탑(磚塔)과 삼천 개의 부처 등도 만드는 등 대공예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그 외의 여러 가지 재능에도 뛰어났다고 했으니, 없는 재주가 없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또 글씨도 잘 써서 영묘사와 법림사(法林寺) 두 절의 현판도 썼다고 했다. 이 모두가 내세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키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다’의 원문 ‘내여(來如)’를 보자. 불교에서 ‘여(如)’가 나타내 주는 뜻은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변하지 않는 자체, 곧 모든 법(法)의 본체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 본체를 찾아오는 것이 ‘내여(來如)’라는 말이겠다. 이 ‘내여(來如)’를 거꾸로 하면 ‘여래(如來)’가 된다. ‘여래(如來)’는 여실(如實)한 이치에서 왔다는 뜻으로, 여실한 이치에서 갔다는 ‘여거(如去)’와 상대가 된다. 한편, ‘여래(如來)’는 ‘향하이타(向下利他; 아래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함을 향하는 일)’요, ‘여거(如去)’는 ‘향상자리(向上自利; 위로 자신의 이롭게 함을 향하는 일 )’이라고 한다. 따라서 필연성과 우연성의 해후로 태어난 서민대중은 ‘오다[來如]’를 반복함으로써 여래(如來)로서의 이타(利他)의 공덕을 닦아 그 상대인 ‘여거(如去)’로서의 자리(自利)의 내세를 원망(願望)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한마디로 서민의식으로서의 서럽고 괴로운 개체 및 현세를 부정하고 공덕을 닦음으로써 여래여거(如來如去)를 노래한 것이 풍요(風謠)였던 것이다. 이제 그 서럽고 괴로운 서민대중들은 더 이상 풍요를 부르지 않아도 될 때가 되지는 않았는지? 바람 풍(風) 자의 ‘几’ 안쪽에 있는 䖝을 없애버리고 대신 그칠 지(止) 자를 넣으면 ‘지(凪)’자가 된다. 그 뜻은 ‘바람이 자고 파도가 그친다’는 뜻이다. 흑인마저도 대통령이 되는 시대이니 우리 서민대중들에게도 그 ‘지(凪)’ 자의 평화로움을 누릴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생각을 펼쳐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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