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37) 간신(奸臣) 신돈(辛旽)에.hwp
경북 인물열전 (37)
간신(奸臣) 신돈(辛旽)에게 호통을 쳤던 간신(諫臣) 이존오(李存吾)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1. 慶尙道 慶州府 人物 條]
이 웅 재
이존오(李存吾:1341∼1371)는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이고, 자를 순경(順卿), 호는 석탄(石灘), 또는 고산(孤山)이라 한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썼으며, 강개(慷慨)한 뜻과 절조가 있었다. 용모는 단정하고 맑았으며, 몸가짐은 정중했고 말수가 적었다. 나이 10여 세 때에 홍수가 난 것을 보고, “넓은 벌판은 모두 묻혔건만/ 높은 산만이 홀로 굽히지 않네.[大野皆爲沒 高山獨不降]”란 시구를 지어 사람들이 특이하게 여겼다.
1360년(공민왕 9)에 문과에 급제하여 수원서기(水原書記)에 임명되고, 선발되어 사관(史官)으로 보직(補職)되었다. 이후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정도전(鄭道傳) 등과 친교를 두터이 했다.
점차 벼슬이 올라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다. 당시에 신돈(辛旽)이 정권을 잡아 불법(不法)을 자행할 뿐만 아니라, 참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이존오가 분연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말하기를, “요망한 물건이 나라를 그르치니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소(疏)를 올려 극언(極言)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그를 불러 꾸짖는데, 그때 신돈이 임금과 걸상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이존오가 이를 보고 눈을 부릅뜨고 꾸짖기를, “늙은 중이 어찌 이같이 무례한가?” 하니 신돈이 두렵고 놀라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걸상에서 내려앉았다.
임금이 더욱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고 찬성사(贊成事) 이춘부(李春富) 등에게 국문토록 했다. 이춘부가 물었다. “너는 젖비린내가 아직도 가시지 않은 애송이인데, 아마도 반드시 어떤 노회(老獪)한 자의 사주를 받았을 것이다. 숨김없이 바른대로 고하여라.”하니, “애송이로 아무 것도 모르는 자를 왜 언관(言官)에 임명했습니까? 언관으로서 어찌 바른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때 이존오의 나이가 스물다섯이었다. 신돈의 무리가 기어코 그를 죽이려 들었으나, 이색(李穡) 등의 옹호로 극형은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폄직(貶職)되었다. 이에 국인들이 그를 칭찬하기를, “이존오는 참으로 정언(正言)답다.” 하였다.
하지만, 그는 공주(公州) 석탄(石灘)에 은둔하여 살았는데 신돈의 세도가 더욱 극심해지니 근심과 분함으로 병에 걸렸다. 병세가 극히 위독해졌을 때에, 그는 사람을 시켜 부축하여 일으키게 하고는 말하였다.
“신돈이 아직도 기세가 성한가? 신돈이 죽어야 내가 죽겠다.” 하고는, 자리에 다시 눕기도 전에 죽으니, 그때의 나이가 31세였다. 그가 죽은 지 석 달 만에 신돈이 처형되었으니,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임금도 그의 충정을 기리어서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을 추증(追贈)하고, 그의 열 살 난 아들 이래(李來)에게 친필로 ‘간신 이존오의 아들 안국(諫臣存吾之子安國)’이라고 써서 정방(政房: 인사 행정을 다루는 기관)에 내려 보내 장거직장(掌車直長)에 제수하였다. 안국은 이래의 어렸을 때 이름이었다.
동국여지승람 권18 부여현 산천 석탄(石灘) 조(條)를 보면, 그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볼 수가 있다.
“고려의 정언(正言) 이존오가 글을 올려 신돈을 탄핵하였다가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그 뒤에 이곳에 살면서 여울 위에 정자를 짓고 한가로이 시를 읊으면서 그 몸을 마쳤는데, 일찍이 시를 짓기를,
“백제 옛 나라 장강(長江) 굽이에, 석탄(石灘)의 풍월이 주인 없는 지 몇 해이런가. 들불이 언덕을 사르니 평탄하기 손바닥 같은데, 때때로 소가 묵은 밭을 가네. 내가 와 정자 짓고 승경(勝景)을 더듬으니, 온갖 경치 아름답게 앞으로 몰려드네. 구름과 연기는 교사(蛟蛇)의 굴에 끼었다간 사라지고, 산 아지랑이 아물거리며 먼 하늘에 떠 있다. 흰 모래 언덕 뚝 끊기매 갯물이 들어오고, 큰 암석이 연달아 물가에 비꼈구나. 조각배 저어 남으로 올효조(兀梟窕)로 돌면, 돌난간 계수나무 기둥이 맑은 물을 굽어본다. 돌부처여, 그대는 의자왕 시대의 일을 목격하였으리라. 오직 들 두루미 와서 참선(參禪)하고 있구나. 상상해 보니 옛날 당 나라 장수가 바다를 건너왔을 때, 웅병(雄兵) 10만에 북소리 둥둥 울렸으리. 도문(都門) 밖 한 번 싸움에 나라 힘을 다했으나, 임금이 두 손 모아 결박을 당하였다. 신물(神物; 용을 가리킴)도 빛을 잃고 제자리 못 지켰나. 돌 위에 남긴 자취 아직도 완연하다. 낙화암(落花巖) 아래에는 물결만 출렁대고, 흰 구름 천년 동안 속절없이 유연(悠然)하다.” 하였다.
이존오는 천성이 효성스럽고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다. 형 이양오(李養吾)가 일찍이 객지에 나갔다가 그의 노비 세 사람과 함께 도적에게 살해되었다. 이존오가 몇 달 뒤에 그 소식을 듣고 달려가서 시체를 거두어 묻으려 했으나 이미 백골이 되어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이에 그가 말하기를, “우리 형은 남과 달리 육손이다.”라 하고는 이것을 증거로 시체를 찾아 장사지내고, 한편 관청에 알려서 도적들을 모두 붙잡아 처형하게 했다.
신돈의 전횡을 풍자한 시조 1수를 비롯하여, 3수의 시조가 『청구영언』에 전해지며, 여주 고산서원(孤山書院), 부여 의열사(義烈祠), 무장 충현사(忠賢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석탄집』 2권이 있다. 신돈을 풍자한 시조는 다음과 같다.
구룸이 무심탄 말이 아마도 허랑하다.
중천에 높이 떠이셔 임의로 다니면셔
구태야 광명한 날빗츨 따라가며 덮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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