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35)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가시밭길을 걸었던 문장가 최해(崔瀣)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1. 慶尙道 慶州府 人物 條]
이 웅 재
최해(崔瀣: 1287[충렬왕 13]~1340[충혜왕 복위 1]는 자를 언명보(彦明父) 또는 수옹(壽翁)이라 하고, 호는 졸재(拙齋) 혹은 예산농은(猊山農隱)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신라 최대의 문장가인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의 후예로, 아버지 최백륜(崔伯倫)은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추관(秋官: 법관)을 거쳐 민부의랑(民部議郞)에 이르렀으며, 원(元)으로부터 고려왕경유학교수(高麗王京儒學敎授)를 제수받기도 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대호군(大護軍) 임수(任綏)의 딸로 진양군부인(晉陽郡夫人) 임씨이다. 대대로 경주에서 살았던 전형적인 지방 사대부가 출신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여 9살 때에 능히 시를 지었으며, 자라면서 학문이 날로 진보하여 크게 선배들의 탄복한 바가 되었다. 17세 때(1303년: 충렬왕 29)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학관(成均學官)에 보임되었다.
그렇게 뛰어난 그의 재능은 그만 아버지에 의해 고난을 맞이하게 된다. 아버지는 그를 너무나도 끔찍이 아꼈다. 그것이 오히려 화근이 된 것이었다. 성균관의 학유(學諭) 자리에 결원이 생기자 최해와 이수(李守)가 경쟁하게 되었는데, 이수를 추천한 당시의 정승 최유엄(崔有渰)에게 최백륜이 자못 불손한 언사로 욕설을 퍼붓는 바람에 최백륜은 고란도(孤蘭島)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최해의 벼슬 생활은 고단하게만 되었던 것이다.
벼슬에 오른 지 17년이 지난 34세 때에야 겨우 정8품 예문춘추관주부(藝文春秋館主簿)를 거쳐 장흥고사(長興庫使: 정5품)에 오르게 되었다. 그 사이에 부모님의 죽음을 겪고 두 차례의 폄출(貶黜: 벼슬 따위가 낮은 자리로 떨어지거나 파직을 당함)로 좀처럼 중앙 무대에서 자신의 경륜을 펼칠 기회가 없었다.
이렇게 국내에서는 자신의 뜻을 펼치기 어려웠던 그는 1321년(충숙왕 8) 원나라의 과거에 응시하여 제과(制科)에 합격을 한다. 그때 함께 응시했던 안축(安軸)은 떨어졌고, 1등을 했던 송본(宋本)이 그의 시재(詩才)에 감탄하여 오랜 동안 교유하였던 것을 보면, 그의 시재가 얼마나 뛰어났던 것인지를 능히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처음 임명된 벼슬이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盖州判官)이었는데 그곳에 부임을 하고 보니, 벽지(僻地)였을 뿐 아니라 한직(閒職)이라서, 5개월 후에 병을 핑계하여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귀국은 금의환향이었다. 예문(藝文), 성균(成均), 전교(典校) 등 세 관(館)의 성원들이 영빈관에 까지 나와 맞이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듯 귀국 후 성균관승(成均館丞), 예문응교(藝文應敎), 지제고(知制誥) 등 문한직(文翰職)을 역임하였다.
당시 충숙왕은 4년 여의 원(元) 억류생활로 국내의 지지자를 늘일 필요가 있어 국정개혁을 단행하고 있었다. 최해는 그러한 충숙왕을 도와 고려의 유민문제(流民問題:고종 41년 포로로 잡혀간 숫자만 해도 20만 명을 상회함.)에 관심을 가지고 유민송환을 추진하는 등 노력을 하였으나, 기존의 부원(附元) 세력들과 왕의 측근들(예수[隸竪]라고 불리는 왕의 총애를 받는 폐신[嬖臣]들)의 무고로 그만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검교성균대사성(檢校成均大司成)을 끝으로 1330년(충숙왕 17)경(?) 관직에서 물러난 듯싶다.
그는 벼슬하고 쫓겨나는 것으로 기쁨과 노여움을 삼지 않았고, 치산(治産)에도 힘쓰지 않았으며 평생을 시주(詩酒)로 벗을 삼았고, 이제현(李齊賢), 민사평(閔思平)과 가까이 사귀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세속에 아부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남의 선악을 밝혔다. 그래서 윗사람의 신망을 사지 못하여 출세에 파란이 많았다. 그는 독서나 창작에 있어서 스스로의 깨달음[自得]을 중하게 여겼다.
그의 성격 일단을 보여주는 일화 한 토막을 보자. 그가 일찍이 동래현을 지나다가 해운대에 올라 합포만호(合浦萬戶) 장선(張瑄)이 소나무에 제시(題詩)한 것을 보고 말하기를, “아아, 이 나무가 무슨 액운이 있어서 이런 졸렬한 시를 만났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그 부분을 파내고 흙을 발라버리고 갔다. 그가 안동쯤에 이르렀을 때, 장선이 그 사실을 듣고 노하여 맹장(猛將) 3,4명에게 이를 추격케 하여 뒤쫓아 가서 잡아오라고 하였다. 그들은 하인 한 사람을 잡아 가지고 돌아가서 문 밖에 큰 칼을 씌워 세워 놓았는데, 최해는 몰래 죽령(竹嶺)을 넘어 서울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래서 크게 유림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그 재주를 믿고 매사에 오만함이 이와 같았다.
말년에는 사원(寺院)의 밭을 빌려 농사를 지으며 저술에 힘썼다. 만년의 생활은 매우 곤궁했고 자식도 없었으므로 사후에는 친지들의 부의로 장사를 지내줄 정도였다. 40년 간 교우관계를 유지했던 이제현(李齊賢)은 그를 자신이 평생 두렵게 여긴 상대였다고 하며 그의 문학적 탁월함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가 지은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은 자전적 성격을 띤 글인데, 그는 이 전에서 자신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은자가 바야흐로 어릴 적에 이미 천리를 아는 것 같았고… 조금 장성하매 개연(慨然)히 공명에 뜻이 있었으나 세상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그 성품이 사후(伺候: 웃어른을 뵙고 문안을 드림)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또 술을 좋아하여 몇 잔 마신 뒤에는 남의 선악 말하기를 즐기며 무릇 귀로부터 들어간 것은 입에서 감출 줄을 모르므로 남에게 사랑받지 못하여 쓰였다가는 문득 배척되곤 했다. 비록 친우가 이를 애석히 여겨 혹은 권하고 혹은 책하여도 보았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은퇴 후, 고려 명현들의 시문을 가려 뽑은 저서를 짓고『동인지문(東人之文)』이라 이름하였는데, 이는 조선조 서거정의 『동문선(東文選)』의 선례(先例)를 보인 저서라 할 수가 있다. 기타 문집으로『졸고천백(拙藁千百)』,『예산농은졸고(猊山農隱拙藁)』,『귀감(龜鑑)』,『예산선집(猊山選集)』등이 있다. 『동문선』에 그의 시 34수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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