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수필 순례 36)
차마설(借馬說)
이 곡 지음
이웅재 해설
나는 집이 가난해서 말이 없기 때문에 간혹 남의 말을 빌려서 타곤 한다. 그런데 노둔하고 야윈 말을 얻었을 경우에는 일이 아무리 급해도 감히 채찍질을 하지 못하면서도 금방이라도 쓰러지고 넘어질 것처럼 전전긍긍하기 일쑤요, 개천이나 도랑이라도 만나게 되면 말에서 내려서 걸어가곤 한다. 그런 까닭으로 후회하는 일이 거의 없다.
반면에 발굽이 높고 귀가 쫑긋하며 잘 달리는 준마를 얻었을 경우에는 의기양양하여 방자하게 채찍을 갈기기도 하고 고삐를 놓기도 하면서 언덕과 골짜기를 마치 평지인 양 생각하고 매우 유쾌하게 질주하곤 한다. 그러므로 간혹 위험하게 말에서 떨어지는 환란을 면하지 못한다.
아아,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달라지고 뒤바뀔 수가 있단 말인가? 남의 물건을 빌려서 잠깐 동안 쓸 때에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진짜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경우에야 더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그런데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어느 하나도 남에게 빌리지 않은 것이 또 무엇이 있다고 할 것인가?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힘을 빌려서 존귀하고 부유하게 되는 것이요,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빌려서 총애를 받고 귀한 신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식은 어버이에게서, 지어미는 지아비에게서, 비복(婢僕)은 주인에게서 각각 빌리는 것이 또한 심하고도 많은데, 대부분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기만 할 뿐 끝내 돌이켜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 어찌 미혹(迷惑)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혹 잠깐 사이에 그 동안 빌렸던 것을 돌려주어야 하는 일이 생기게 되면, 만방(萬邦)의 임금도 독부(獨夫)1)가 되고 백승(百乘)의 대부(大夫)도 고신(孤臣)이 되어버리는 판인데, 더군다나 미천한 자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맹자(孟子)도 말하기를 “오래도록 빌려 쓰고서 돌려주지 않았으니, 그들이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2)라고 하였다.
내가 이 말을 접하고서 느껴지는 바가 있기에, 차마설을 지어서 그 뜻을 부연해 보았다.
♣해설:
이곡(李穀:1298∼1351)은 고려 말엽의 학자로,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이며, 찬성사 이자성(李自成)의 아들이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이다. 백이정(白頤正), 정몽주(鄭夢周), 우탁(禹倬)과 함께 경학(經學)의 대가로 꼽힌다.
한학4대가인 계곡(谿谷) 장유(張維)와 마찬가지로 13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1310년) 고향을 떠나 동해 바닷가인 경북 영해지방의 토호인 진사(進士) 함창 김씨(咸昌金氏) 김택(金澤)의 사위가 되어 장인의 후원으로 도평의사사의 서리로 진출한 후, 1317년(충숙왕 4) 20세의 나이에 성균시, 즉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고 3년 뒤에는 당당히 문과(文科)에 급제(及第)를 한다. 그러나 신흥사대부의 신분으로는 환로(宦路) 진출이 쉽지 않아 1332년(35세 때) 원(元)나라 과거 정동행성 향시(征東行省 鄕試)에 수석, 이듬해에는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당당히 급제하여 원나라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 檢閱官)에 제수된다. 이후 원나라와 본국 고려, 양국에서의 벼슬길이 활짝 열리게 된다.
1334년 귀국하여 가선대부 시전의부령직보문각(嘉善大夫 試典儀副令直寶文閣)을 제수받았다. 이듬해 다시 원나라에 가서 정동행중서성 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 左右司員外郞) 등의 벼슬을 거쳤다. 이때 원나라는 정동행성을 통해 고려의 내정에 깊이 간섭하고 있었다. 그런데 원나라의 요구 중에서도 가장 견디기 어렵고 고통스럽던 것이 바로 다름 아닌 공녀제도였다. 공녀제도는 고려의 조혼풍습까지 유발시키며 그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에 그는 원나라 순제에게 간하여 공녀제도를 폐지하도록 건의하여 중지토록 하기도 했다.
1344년 또다시 귀국, 이듬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으며,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하고,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3조의 실록편찬에도 참여했다.
문장이 뛰어나 원나라에서도 존경받았다. 가전체 작품 「죽부인전(竹夫人傳)」을 비롯하여 100여 편의 시가 『동문선 東文選』에 전하며 저서로는『가정집』4책 20권이 전한다.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이「차마설(借馬說)」은『가정집』제7권에 실려 있으며, 번역은『한국고전종합DB』의 것을 따랐으나, 문맥의 이해를 위하여 약간의 윤문(潤文)을 하였음을 밝힌다.
부귀, 권세뿐만 아니라 우리의 본성마저도 모두가 일시적으로 빌려온 것일 뿐인데, 그것을 본래부터 내 것인 양 자만하고 위세를 부리는 우리 인간들의 못난 모습이 그의 글을 통해서 너무나도 명백하게 드러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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