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수필 순례 34) 박대양(朴戴陽)의 동사기.hwp
(고전수필 순례 34)
朴戴陽의 東槎漫錄 중 東槎記俗[하]
박대양 지음
이웅재 해설
국내의 군함은 35척 이내인데, 그 가운데 견고하고 완전한 것은 16척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다 노후하여 쓸 수 없으며, 상선은 3백 척이다. 그리고 횡수하(橫須賀; 요꼬스카)에서 바야흐로 군함을 제조하고 있다고 한다.
해ㆍ육군의 상비병은 3만 7천 8백 23인이고, 예비병은 4만 2천 6백 6인이며, 후비병(後備兵; 豫備役을 마치고 복역하던 兵役)은 1만 6천 80인이고, 민군(民軍)이 88만 5천 90인이다. 단 해군의 훈련 상태는 육군에 미치지 못한다.
각 학교의 교사된 자는 매월 여러 생도를 시험하여 원점(圓點)의 많고 적은 것으로써 우열[殿最; 고려ㆍ조선 시대에, 관찰사가 각 고을 수령의 치적을 심사하여 중앙에 보고하던 일. 殿은 맨 아래 등급을, 最는 맨 위 등급을 말하는데, 고과 평정의 뜻으로 썼으며, 해마다 음력 유월과 섣달에 시행하였다.]을 정하는 것을, 우리나라 계획(計劃)의 법[館學儒生의 평소 성적을 따져서 시험의 등급을 정하는 일.]과 같이 한다. 연한이 되어 전(殿; 열등)의 성적을 한 자는 다시 1년 더 연장한다. 졸업하면 졸업장을 주고, 생도는 졸업장을 받는 날부터 술을 마시며 즐겁게 놀 수 있다. 조가(朝家)에서 곧 그들을 녹적(祿籍; 벼슬아치의 봉록에 관한 문적)에 올리고, 그 배운 바를 실행하게 한다.
녹아도(鹿兒島; 카고시마현)의 속지(屬地)에 조선촌(朝鮮村)이 있다. 옛날 만력(萬曆; 명 神宗의 연호) 임진년(1592, 선조 25)에 우리나라 사람으로 포로로 잡혀간 사람이 처음 살았는데 지금은 수천여 호가 되었다. 자기들끼리 서로 혼인하고, 일본 사람과는 가취(嫁娶)하지 않는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풍속이 변하지 않는다. 일본 사람이 말하기를, “녹아도 사람은 언어와 의복은 비록 일본 사람이나 그 마음은 종내 한국 사람이다.”라고 하는데, 그 말은 믿기지가 않는다. 비전주(肥前州)에도 한국사람 한 사람이 살았는데 그의 후예가 불어나서 지금은 50여 호가 되었다고 한다.
이 땅에는 항상 큰 바람이 많다. 그러므로 화재가 종종 일어난다. 만약 한 집에서 실수하여 불을 내면, 급히 거리의 종을 친다. 차례차례로 잇따라 쳐서 잠깐 사이에 종소리가 사방에 퍼진다.
농사도 짓지 않고 장사도 하지 않는 무뢰배(無賴輩)들이 스스로 한 사(社)를 이루어, 격검(擊劍)하고 용기를 숭상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들이 있다. 이들을 완고당(頑固黨)이라고 하는데 혹은 남을 위하여 원수를 갚고, 혹은 남의 급난(急難)에 달려가 구하는 것을 옛날의 유협자(游俠者)들과 같이 한다. 이 사람들이 그 도당(徒黨)을 거느리고 실화한 집에 이르러, 가산(産家)의 많고 적은 것으로써 값을 정하고는 불을 끄는데, 먼저 한 개의 커다란 물통을 옥상(屋上)에 올려놓은 뒤에 우두머리 되는 자가 기(旗)를 잡고 그 곁에 서서 여러 사람을 호령하여 일제히 힘을 쓰게 한다. 만약 불이 맹렬하고 연기가 불어나서 그 기세가 위급하면, 물통 속에 들어가서 기를 휘둘러 용기를 내 보인다.[가용(賈勇); 춘추시대 齊의 高固가 晋의 軍陣으로 돌격해 들어가 큰 돌로 진나라 군사를 거꾸러뜨려 사로잡고, 뽕나무를 뿌리째 뽑아가지고 돌아오면서 제나라 군사들에게 “용기가 필요하다면 나의 남은 용기를 사 가라.”고 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春秋左傳 成公 2년>] 만약 혹시 힘이 지쳐서 기가 눕게 되면, 불은 비록 껐을지라도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모든 장사는 크고 작은 것을 물론하고 나라에서 관할하여, 다 세가 부과된다. 그러니 반드시 인지(印紙)를 붙인 뒤에라야 판매할 수 있다. 만약 증명하는 표가 없으면 순사가 붙잡아 벌금을 바치게 하는데, 차등이 있다.
길원(吉園)ㆍ유교(柳橋)는 기녀(妓女)를 기르는 곳이다. 기녀에는 색기(色妓)와 예기(藝妓)의 구별이 있다. 색기는 문에서 외인을 받아들여 창부(娼婦) 노릇하게 맡겨 두고, 날짜를 계산하여 세금을 받아 공용(公用)에 보충한다. 예기가 남과 사통하다가, 만약 순사에게 붙잡히면 벌금 40~50원의 처벌을 받아야 하며, 세 번 거듭 현장에서 붙잡히면 징역을 살린다.
무릇, 떼지어 술 마시고 밤에 이야기 하는 일은, 오후 10시를 지나지 못한다. 만약 혹시 시간을 넘게 되어 또한 순사에게 붙잡히면, 벌금을 바치고야 풀려난다.
무릇, 제택(第宅)을 다듬는 일은 정묘의 극치를 다하여, 나무 하나 돌 하나에도 다 눈의 슬기와 손의 기교를 거친다. 다만 방안에는 반드시 기둥 하나가, 깎지도 않고 다듬지도 않은 채 굴곡이 있고 예스럽고 기이하여 (다른 구조와) 격식이 어울리지 않는 것이 있는데, 여러 집을 두루 보아도 집집마다 이런 것이 있었다. 그곳 사람에게 물으니, 운치(韻致)가 좋기 때문이라고 한다.
은행을 설치한 뒤부터는, 비록 공경재상(公卿宰相) 같이 호귀(豪貴)한 사람이나 부상 대고(富商大賈)라도 집에 재산을 쌓아 두는 일이 없고, 다 은행에 맡겨두고 소용에 따라 계산해 찾아 쓴다. 그러므로 집에 갖고 있는 집물(什物)은 복식(服飾)과 그릇과 일용품에 지나지 않을 뿐이요, 그 나머지는 텅 비어 있다. 그런 까닭에 비록 화재가 있을지라도 다만 집만 태울 뿐 가산(家産)에는 미치지 않는다.
신호ㆍ동경 두 곳의 음료수는 다 수백 리 밖의 달고 시원한 샘물을 홈통으로 물을 끌어서 물이 땅속으로 지나가게 하고는, 골골샅샅이 기계를 설치하고 집집마다 우물을 두고서 마르는 일 없이 쏟아지게 한다. 그러므로 다른 곳 사람들이 동경ㆍ신호의 사람들을 지목하여 ‘수돗물 마시는 사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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