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쓰기

(수필 쓰기 44) [흥부와 놀부에 관한 단상]

거북이3 2010. 3. 11. 19:54

(수필 쓰기 44)  [흥부와 놀부에 관한 단상]

                                                                    이   웅   재


 ‘흥부와 놀부’는 그 제목만 가지고 보아도 ‘흥부’를 중심축에 놓은 이야기다. 자연히 이야기의 결말은 ‘착한 흥부’를 추켜세우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는 권선징악적인 구조를 지니게 된다는 말이다. 권선징악적인 구조의 이야기를 낡아빠졌다고 타기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이러한 구조의 이야기는 ‘재미있는 이야기의 공식’에 속하고 있는 실정이다. 선과 악의 대립이 분명하고 결말에 가서는 선이 악을 평정하는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한 관념은 특히 한국인들에게서 두드러진다. 동계 올림픽 때마다 우리는 안톤 오노를 성토하고 있지 아니한가? 비열한 방법을 타기(唾棄)하는 이러한 한국인들의 감정은 분명 정의(正義)를 수호하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는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 동포들은 자식들에게 부지런히 한국의 드라마 시청을  권한다고 한다. ‘언어 습득은 말할 것도 없고 권선징악을 확실하게 가르쳐 준다.’는 이유에서라는 것이다. 도발적 상상력과 기괴한(?) 인간관계가 등장하는 미국의 드라마와는 ‘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가 ‘흥부전’이나 ‘흥보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점도 ‘흥부’에게 무게를 두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흥부’의 주가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흥부보쌈’집과 ‘놀부보쌈’집이 그 대표적 현상이라고나 할까? ‘놀부보쌈’집 음식 값이 더 비싸다는 것도 어쩌면 문젯거리가 아닐까 싶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님들은 ‘놀부보쌈’집으로만 몰려들어 요즈음에는 아예 ‘흥부보쌈’집은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물었다.

 “너 이담에 자라서 흥부가 될래, 놀부가 될래?”

 그 대답은 천편일률적이다.

 “놀부요.”

 물어볼 때 분명히 ‘흥부’를 앞세웠다. 그런데도 ‘놀부’의 승리다. 이는 권선징악의 도덕적 가치가 몰락하고 있다는 대표적인 증좌가 아닐까? 왜 그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무슨 이유에서일까?


 우리나라는 1960년대 후반까지는 가난하기 그지없는 나라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제사정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시기가 ‘흥부’에서부터 ‘놀부’에게로 그 선호도가 바뀌어가는 시기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먹고사는 일이 여유로워지면서 ‘흥부’가 ‘놀부’에게 뒤처지기 시작한 것이다.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정착되기 시작하면서 ‘놀부’가 득세를 하기 시작하였다는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富)가 선(善)과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그러면서 흥부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게으름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놀부를 선망한다. 제사상에도 ‘밤’이니 ‘대추’, ‘감’이라든가 ‘배’ 따위를 종이에다가 써서 차려놓고, 그나마도 너무 여러 가지라고 몇 가지는 빼어버리라는 놀부를 두둔한다. 재벌이라고 해도 10원짜리 하나일망정 아껴야 된다는 사고가, 오랫동안 가난하게 살아왔던 우리 모두에게 먹혀들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물질 만능주의가 판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돈이 최고다. 그러한 사고방식이 바로 ‘흥부’는 왜 그렇게 무능력하고 게으르냐는 비난으로 돌변하게 된 것이다. ‘놀부’처럼 ‘놀’면서도 자신의 부(富)를 지키기 위해서는 10원짜리 하나라도 아껴야 되지 않겠느냐는 논리는 그런 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흥부’를 버리기엔 아직 찜찜한 구석이 있다. 그래서 변명거리를 찾아본다.

 먼저, 흥부를 게으름뱅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생각부터 바로잡아 보자. 그는 결코 게으름뱅이가 아니었다. 흥부와 그의 아내가 돈벌이를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를 살펴보면 그들에게 안쓰러운 느낌을 가질 수는 있을지언정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돈벌이를 위한 그들의 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강한영(姜漢永)의 『신재효 판소리 사설집』의『박타령』을 통해서 살펴보자.


   흥보가 품을 팔 제, 매우 부지런히 서둘러 상평하평1)김매기, 원산근산 柴草베기, 먹고 닷 돈 받고 장 서두리2), 십 리에 돈 반 乘轎 메기, 新産石漁3) 밤짐 지기, 時 매긴 公事 急走 가기, 방 뜯는 데 조역꾼, 담 쌓는 데 자갈 줍기, 봉산 가서 모내기 품 팔기, 大邱令4)에 藥駄傳5), 초상 난 집 부고 전키, 出喪할 제 銘旌6)들기, 空官7)되면 上直8)하기, 대장간에 풀무 불기, 멋있는 기생 아씨 他官愛夫 편지 전키, 부자집 어린 신랑 장가 들 제 雁夫서기9), 들병장수 술짐 지기, 초라니 판에 무투 놓기10), 아무리 벌어도 시골서는 할 수 없다. 서울로 올라가서 군치리집11) 종노릇 하다가, 소주 가마 눌려 놓고 뺨 맞고 쫓겨 와서, 매품 팔러 병영12)에 갔다가는 비교13) 밀리어서 태장14) 한 개 못 맞고서 빈 손 쥐고 돌아오니 흥보 아내가 품을 판다.

   오뉴월 밭매기와 구시월 김장하기, 한 말[斗] 받고 벼 훑기와 입만 먹고 방아 찧기, 삼[麻] 삶기, 洑 막기와 물레질, 베짜기와 머슴의 헌 옷 짓기, 喪故15)에 빨래하기, 婚장가에 진일하기16), 채소밭에 오줌 주기, 소주 고고 장달이기, 물방아에 쌀 까불기, 밀 맷돌 갈 제 집어넣기, 보리 갈 제 망웃17) 놓기, 못자리 때 망초18) 뜯기, 아이 낳고 첫국밥을 제 손으로 해 먹고, 運氣19)를 放通하되 절구질로 땀을 내니, 한 때도 쉬지 않고 밤낮으로 벌어도 늘 굶는구나.


 흥부가 한 일 ‘18+2’ 가지, 흥보 아내가 한 일 ‘18’ 가지, 요새 말로 해서 ‘알바’를 36 내지는 38가지를 했던 것이다. 그들이 한 일들을 보면, 그 당시로서는 안 해 본 일들이 없다고 말할 수가 있겠다. 하지만, 어디 ‘알바’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이던가? 요즘에도 시간 당 3,000원 내외의 수당을 받는 알바 가지고서는 아무리 애써 벌어보아도 넉넉한 생활을 하기에는 어림도 없지 않은가? 하루 8시간을 꼬박 일한다고 쳐도 3,000원×8(시간)=24,000원밖에 안 된다. 그렇게 한 달 내내 부산을 떨어 보았자 2,4000원×30(일)=720,000원을 넘을 수가 없다. 요즈음 유행어가 되어버린 88만 원에도 훨씬 못 미치는 돈벌이가 아닌가?

 그렇게까지 노력했는데, 흥부는 왜 가난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자산(資産)이 없었다. 유산은 놀부가 독차지했던 것이다. 유산 하나 받지 못한 흥부를 요새의 ‘상속법’을 들고 나와 ‘놀부’의 독식을 막아버린다면 좋기는 하겠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흥부’답지 못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흥부는 흥부다워야 한다. 그 흥부의 흥부다움이 그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는 모순된 사회 구조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부(富)의 축적은 자본과 노동으로 이루어지는데, 그에게는 자본이 없었던 것이다. 노동 하나만 가지고서는 제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게 당시의 시대상황이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은 다양한 노동시장이 형성되어 있지도 않았던 시대가 아니던가?

 그로 하여금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던 또 하나의 족쇄(足鎖), 그것은 바로 너무나도 많은 자식들이었다. 조선조 역대 왕들 중에 가장 많은 자식을 두었던 분이 세종대왕인데, 세종은 아들 18명과 딸 4명 등 도합 22명을 두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는 분이다. 그런데 그것도 흥부의 기록은 깨지 못한다. 앞에서 인용했던 『박타령』의 일절을 보자.


   스물다섯 되는 子息 다른 사람 子息 낳듯 한 배에 하나 낳아, 三四 歲 된 然後에 낳고낳고 했어야 四十이 못다 되어 그리 많이 낳겄느냐. 한 해에 한 배씩 한 배에 두셋씩 대고 낳아 놓았구나. 그래도 아이들은 七七日이 지나며는 안기도 하여 보고, 百日이 지나며는 업기도 해 보고, 첫돌이 지나면 손 잡고 걸어 보고, 三四 歲가 되면 衣服 입고 다녔어야 다리에 골이 오르고 몸이 活潑할 터인데, 이 집 子息 기르는 法은 덕석20)을 결21) 때에 세 줄로 구멍을 내어 한 줄에 열 구멍씩 첫 구멍은 조그맣고 차차 구멍이 커 간다. 한 배에 낳은 子息 둘이 되나 셋이 되나 앉혀 보아 앉으며는 첫 구멍에 목을 넣고, 하 루 몇 때씩을 암죽만 떠 넣으면 불쌍한 이것들이 울어도 앉아 울고, 자도 앉아 자고, 똥 오줌이 마려우면 덕석 쓴 채 앉아 누어, 世上에 난 然後에 실오라기 하나라도 몸에 걸쳐 본 일 없고, 한 번도 문턱 밖에 발 디뎌 본 일 없고, 다른 사람 얼굴 보아 소리 들어본 일 없고, 그저 앉아 큰 것이라 때 묻은 여윈 낯이 터럭이 거칠거칠. 冬至 섣달 강아지가 아궁에서 자고 난 듯, 덕석 쓴 채 새고 나면 빼빼 마른 몸뚱이가 대강이를 엮어 놓은 듯, 못 먹고 앉아 크니, 원 무르게 되어서 큰 놈들은 스무 살씩, 작은 놈들은 열칠팔 세, 남의 子息 같으면 農事하네, 나무하네, 한창들 벌이를 하련마는 원 늦되어서 부르는 게 어메, 아비. 飮食 이름, 아는 것이 밥뿐이로구나.


 지방의 학생 감소로 인한 소수 인원의 초등학교의 경우를 제외하고 보아도 흥부의 자식 숫자는 너무 많다. 서울의 경우 교동초등학교가 한 학급당 15명 정도이고, 용산초등, 강서 공진초등, 종로 숭신초등, 서초 언남초등, 중구 남산초등 등이 모두 평균 20명 미만이니, ‘흥부’네의 경우는 한 학급을 만들고도 남는 숫자이다. 그러하니, “한 때도 쉬지 않고 밤낮으로 벌어도 늘 굶는구나.”하는 말이 빈말일 수가 없다. 요즈음에는 아이들을 너무 낳지 않아서 출산장려금까지 주고 있는 형편이니, 흥부는 시대마저 잘못 타고 난 듯하다.

 그런 판국에 흥부의 마음씨는 또 너무나도 착했다. 다음 대목을 보자.


   이날도 흥보댁이 여러 자식놈들의 어메 밥 소리에 정신을 못 차려서, 벗은 발에 두 손을 불고, 里門 밖에 나서보니 흥보가 方將22) 건너올 제, 지지도 메도 아니하고 빈손 치고, 정신 없이 비틀비틀 오는 거동, 漕創23)배 격졸24)로서 일천 석 실은 곡식 풍랑에 파선하고 십차 刑訊25) 삼년 滯囚26)의 고생을 겪고 오는 모양. 다섯 바리 雇馬馬夫27) 관가 봉물28)을 싣고 갔다 백 냥짜리 말 죽이고, 酒幕 酒幕 빌어먹어 빈 채29) 들고 오는 모양, 정색이 말 아니어 흥보댁이 깜짝 놀라 손목을 잡으면서, "어찌 그리 지체하고, 어찌 그리 심란한가. 오죽 시장하며, 오죽 춥겄는가."

   자세히 살펴보니 쑥 들어간 두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간신히 살 가리운 고의 뒤폭 툭 미어져 빳빳 마른 볼기짝에 몽둥이 맞은 자리 구렁이가 감겼는 듯. 흥보 아내 대경하여, "애겨, 이게 웬일인가 저 몹쓸 독한 사람, 굶은 사람을 쳤네 그려." 가슴 탕탕, 발 구르니 흥보가 달래어, "자네 그게 웬 소린가. 형님 댁에 건너가니 형님이 반기시고 좋은 술 더운 밥을 착실히 먹 인 후에 쌀 닷 말 돈 석 냥을 썩 내어 주시기에 쌀 속에 돈을 넣어 오쟁이30)에 묶어지고 汗出沾背31)오노라니, 이 너머 깊은 골짜기에 설금찬32) 두 사람이 몽둥이 갈라 쥐고 솔밭에서 왈칵 나와 볼기짝을 때리면서, '이놈, 목숨이 크냐, 재물이 크냐.' 한 번 호통에 정신 놓아, 졌던 것 벗어 주고 겨우 살아오느라고 서러워서 울었으니 형님은 원망 마소."


 형님집에 양식 얻으러 갔다가 양식은커녕 몽둥이를 맞고 오면서도 아내에게는 "자네 그게웬 소린가. 형님 댁에 건너가니 형님이 반기시고 좋은 술 더운밥을 착실히 먹 인 후에 쌀 닷 말 돈 석 냥을 썩 내어 주시”었다고 두둔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흥부를 어찌 모르는 척할 수가 있는가? 오늘날 같으면, 흥부는 그토록 가난하게 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그러한 실정이 신문이나 방송에 보도라도 되는 경우, 각계의 온정이 답지하였을 것임은 틀림없는 일일 것이다. 흥부는 분명 시대를 잘못 만났다. 아니, 알려진 바는 없지만, 작자를 잘못 만났다. 어째서 현실적인 가능성이 전혀 없는 ‘제비다리 고쳐주고’ 그 보은(報恩)으로 흥부를 재탄생시켰는가? 그것은 현대적 감각으로 보아 로또복권에 당첨시키는 결구(結構)보다도 더욱 허황된 구성법의 사용이 아니었을까? 장황하게 열거한 놀부 심술이 무화(無化)되는 느낌이다.

 허술한 구성(構成)은 자제해야 한다는 점을 실감하게 만들어주는 하나의 사례가 아닐까 한다. 마지막으로 놀부의 심술보를 한번 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무려 67가지나 되는 다음과 같은 심술보를 가진 놀부다.


   사람마다 五臟六腑33)로되 놀보는 五臟七腑인 것이 心思腑 하나가, 왼편 갈비 밑에 兵府주머니를 찬 듯하여 밖에서 보아도 알기 쉽게 달리어서 心思가 毋論 謝絶하고, 一望無際로 나오는데 똑 이렇게 나오것다.

   本命方34)에 伐木하고 蠶絲角35)에 집짓기와 五鬼方36)에 이사 권코, 三災37)든 데 婚姻하기, 동네 主山38)을 팔아먹고, 남의 先山에 偸葬하기, 길 가는 過客 양반 재울 듯이 붙들었다 해가 지면 내어 쫓고, 一年苦勞 外上 私耕39) 農事지어 秋收하면 옷을 벗겨 내어쫓기, 初喪난 데 노래하고, 疫神40) 든데 개 잡기와 남의 露積에 불 지르고, 가뭄 농사 물꼬 베기, 불붙은 데 부채질, 夜葬할 때 왜장치기41), 婚姻뻘에 바람42) 넣고 시앗 싸움에 符同하기, 길 가운데 허방43)놓고, 外上 술값 억지 쓰기, 顫動다리44) 딴죽치고45), 소경 衣服에 똥칠하기, 배앓이 난 놈 살구 주고, 잠든 놈에 뜸질하기, 닫는 놈에 발 내치고, 곱사등이 잦혀놓기, 맺은 호박 덩굴 끊고, 패는 穀食 모가지 뽑기, 술 먹으면 逅辱하고46), 場市間에 抑賣하기, 좋은 網巾 편자47) 끊고, 새 갓 보면 땀대48) 떼기, 窮班 보면 冠을 찢고, 乞人 보면 자루 찢기, 喪人을 잡고 춤추기와 女僧 보면 劫奪하기, 새 草殯49)에 불 지르고, 小大祥에 祭廳치기, 애 밴 계집의 배통 차고, 우는 아이 똥 먹이기, 遠路 行人의 路費 도둑, 急走軍50) 잡고 실랑이질, 官差使51)의 傳令 도둑, 鎭營校卒52) 막대 뺏기, 地官을 보면 佩鐵깨고, 醫員 보면 鍼 도둑질, 물 인 계집 입 맞추고, 喪輿 멘 놈 刑問 치기, 만만한 놈 뺨 치기와 孤單한 놈 險談하기, 菜蔬 밭에 물똥 싸고, 수박 밭에 외손질53)과 小木匠54)이의 대패 뺏고, 초라니55)패 떨簪56) 도둑, 옹기짐의 작대기 차고,  장독간에 돌 던지기, 소매치기 盜者贖金57), 고무盜賊58)의 끝돈 먹기와 茶啖床에 흙 던지기, 計骨59)할 때 뼈 감추기, 어린 애의 불알을 발라 말총으로 호아매고, 弱한 老人 엎드러뜨리고, 마른 肛門60) 생짜로 하기, 祭酒甁에 개똥 넣고, 蛇酒甁에 砒霜 넣기, 穀食 밭에 牛馬 몰고, 父兄 年甲61)에 벗질하기, 귀먹은 이더러 辱하기와 소리할 때 잔말하기, 날이 새면 行惡질, 밤이 들면 도둑질을 平生에 일삼으니 제 어미 붙을 놈이 三綱을 아느냐 五倫을 아느냐. 굳기가 돌덩이요 慾心이 족제비라 네모진 小櫨62)로 이마를 비비어도 진물 한 점 아니 나고, 대장의 불집게로 불알을 꽉 집어도 눈도 아니 깜짝인다.…

   

                          (10.3.10. 원고지 47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