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쓰기

(수필 쓰기 41) [미래 지향적인 글쓰기]

거북이3 2009. 12. 6. 18:08

 (수필 쓰기 41)  [미래 지향적인 글쓰기]

                                                                    이   웅   재


 우리에게 미래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희망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두려움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미래, 그것은 항상 불확실성으로 우리를 기다리게 만든다. 그것이 반가운 존재이든, 아니면 기피하고픈 상황이든 우리는 그걸 기다릴 수밖에는 없다. 아일랜드 출신의 프랑스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가 1952년에 지은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는 그러한 현대인의 기다림을 교묘하게 형상화시켜 보여준다고 하겠다.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을 뿐인 황량한 시골길이다. 허름한 점퍼를 걸친 에스트라공이 길가에 앉아 열심히 구두를 벗으려 애쓴다. 거기에 낡은 연미복을 입고 더럽혀진 검은 넥타이를 맨 블라디미르가 나타난다. 그들은 고도라 불리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고도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들은 언제부터인가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현재도 불확실하다. 블라디미르는 오늘이 토요일이라고 하고, 에스트라공은 아니 금요일, 어쩌면 목요일인지도 모른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가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이 며칠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기다린다. 그들에게는 기다리는 일밖에는 모두가 무의미하다. 그래서 엉뚱한 행동, 앞뒤가 맞지 않는 대화로써 일관하고 있다. 에스트라공의 말을 들어보자.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아무도 안 오고, 아무도 안 떠나고, 참 지긋지긋하군.”

 그게 우리가 미래를 대하는 태도인 것이다. 기다리는 동안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잠시 자살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까 죽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러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너무 철학적이다. 부조리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극단적인 상황 설정이라서 우리 평범한 일상인들로서는 쉽게 따를 수 없는 측면들이 부각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제는 우리 일상인들의 기다림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기다림’이란 낱말이 없었다면 얼마나 삭막하였을 것인가? 손끝이 따갑도록 타 들어가는 담배를 뻑뻑 빨아대며 초조하게 그 무엇인가를 기다려 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다. 아무리 짜증이 나고 삶에 권태를 느끼는 사람일지라도 ‘기다림’을 잃지 않은 한 그는 아직 이 지구상에 살아남아 있을 마땅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인생은 정녕 기다림에서부터 시작하고 기다리면서 생활하고 기다리다가 죽어가는 것이 아니랴? 삶이란 기다림의 연속, 그 짧은 일생일망정 우리는 기다림을 지니고 있기에 즐거울 수도, 서러울 수도, 또는 만족할 수도, 초조 불안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기다림이야말로 우리 인간 세상의 모든 감정을 포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강이 풀리면 배가 오겠지

배가 오면은 님도 탔겠지.


님은 안 타도 편지야 탔겠지.

오늘도 강가에서 기다리다 가노라.    (金東煥, ‘강이 풀리면’)


 기다림 중에서도 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가장 즐거운 기다림일 것이다. 님이 올까, 편지라도 올까 기다리는 마음은 아름답다. 내게도 저와 같은 기다림이 있었으면 하는 부러운 마음이 든다. 그래서 함께 기다려주고픈 마음까지 든다. 기다리는 마음은 따뜻하다. 기다리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면 내 마음까지 따뜻해질 것만 같다.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자.


가만히 오는 비가 낙수 져서 소리하니

오마지 않는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

열릴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崔南善, ‘혼자 앉아서’)


 육당의 시조에도 ‘오마지 않는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라고 노래를 했다. 약속은 하지 않았어도 마음은 늘 ‘그 사람’에게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닫혀있는 문이 금방이라도 열릴 듯이 느껴지는가? 당장이라도 님께서 저 문을 밀치고 들어설 듯한 두근거리는 마음, 그런 마음을 한 번쯤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金素月, 가는 길)


 소월의 시는 온통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립다/ 말을 할까.’하니 왈칵 그리움이 쏟아져 내린다. 마음속에서만 생각하고 생각했던 말, 입안에서만 뱅뱅 돌리던 말, 용기를 내보자고 큰맘 먹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그립다’ 말을 꺼냈을 때 상대방의 반응은 어떠할까? 불안하기만 하다. 그런 심정이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로 표현된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도 고백을 할 수 있는 시간은 별로 없다고(서산에는 해 진다고) 재촉을 하는 것이다. 용기가 나지 않아서 꾹꾹 참고 ‘그냥 갈까’ 생각해 보지만, 도저히 발걸음이 쉬 떨어지질 않는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도 서로서로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연달아 흐르고 있는데, 서정적 자아는 왜 저처럼 망설이기만 하는 것일까? 시를 읽고 있는 내가 더욱 안타까워진다. 다음의 시는 또 어떤가?


들 가에 떨어져 나가앉은 메 기슭의

넓은 바다의 물가 뒤에,

나는 지으리, 나의 집을.

다시금 큰길을 앞에다 두고

길로 지나가는 그 사람들은

제각기 떨어져서 혼자 가는 길.

하얀 여울 턱에 날은 저물 때,

나는 문간에 서서 기다리리.

새벽 새가 울며 지새는 그늘로

세상은 희게, 또는 고요하게,

번쩍이며 오는 아침부터,

지나가는 길손을 눈여겨보며,

그대인가고, 그대인가고.     ('김소월, 나의 집')


 인생이란 ‘제각기 떨어져서 혼자 가는 길’일 것이다. 더구나 ‘들 가에 떨어져 나가앉은 메 기슭의/ 넓은 바다의 물가 뒤’로는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마도 남다른 속사정을 마음속으로 삭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사연이 있는 사람들, 서정적 자아도 그와 비슷한 사람이리라. 그러니 그처럼 인기척조차 드문 곳에다가 ‘나의 집’, ‘나만의 집’을 짓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는 제각기 바쁜 하루가 이슥해질 때쯤 ‘나는 문간에 서서 기다리리.’하고 드디어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기다리는 사람은 나타나질 않는다. 하루 가지고는 안 된다. 저물녘의 기다림만으로는 ‘그대’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새벽 새가 울며 지새는’ 아침부터 기다려야겠다고 새로이 다짐해보는 것이다.

 A․ 모로아는 ‘삶의 기술은 하나의 기대를 걸어 놓고 그것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기대’라는 것은 ‘기다림’으로 바꾸어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철저한 계획에 의한 기대야 두말 할 필요도 없겠거니와 그렇지 않고 막연하게 무엇을 기다리는 기대라 하더라도 역시 우리는 그러한 기대가 있기에 인생을 지루하게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요, 또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나가게 되는 것이다. 사옹(沙翁: Shakespeare)도 말했다. ‘역경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기대만이 약이다.’라고. 현실이 괴롭고 슬프면 그럴수록, 우리는 기대라는 낱말에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내일이면, 내년이면…, 아니, 그 언젠가는 내게도 행운의 여신이 찾아오겠지…. 가능하다면 운명의 여신이여, 라케시스(Lachesis)여, 내게 기쁨을 주소서. 과거를 주관한 아트로포스(Atropos)는 내게 이 세상을 살아볼 수 있게끔 행운을 선사하였나이다. 그런데 현재의 여신 클로토(Cloto)는 내게 이렇게 고난의 나날들을 살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라케시스여, 미래의 운명을 점지해 주시는 여신이여, 부디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역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기도라도 드릴지 모른다. 미래에의 향상을 바라는 마음은 현재를 (설령 그 현재가 쓰라린 형극의 길일지라도) 살찌게 하는 것이다. 이상에의 발돋움이 없다면 현실은 얼마나 비참해질 것인가? 좀더 나아지겠지 나아지겠지 하며 속아 사는 게 인생이 아니겠는가? 기다림이란 낱말은 누구에게나 ‘사람 팔자 알 수 없다!’라고 큰소리 치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활력소이다. 기다림은 인생의 조미료, 생활의 비타민이다. 복권 한 장으로 일주일 동안을 기대 속에 살아가는 사람은 기다림이 있으므로 해서 행복한 축에 끼일 수 있다고들 한다. 기다림, 기다림,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서도 어디선가 행복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말, 우리들의 친구이다.

 물론 기다림이라고 해서 모든 기다림이 다 바람직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도저히 가능성이 없는 일을 그저 기다리기만 한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의 커다란 부덕이다. 오뉴월 더위에 쇠불알 늘어져 떨어지길 바라고 숯불 피워 놓고 구워먹으려 기다린다든가, 감나무에서 저절로 감이 익어 떨어지기만을 기다린다는 것은 오히려 생활을 정체 내지는 후퇴시키기는 할지언정, 생활을 윤택하게 하지는 못한다. 바로 이렇게 모든 일이 저절로 되어지기만을 바라는 것을 우리는 숙시주의(熟柿主義)라고 하여 따돌림을 주는 것이다. 숙시주의, 감이 익어 저절로 떨어지더라도 뭐 삿갓이라도 구멍을 뚫어 입에 물고 있어야 그 감이 입으로 굴러들어 올 것이 아닌가? 무조건적인 기다림은 무용지물이라는 말이렷다? 역시 요행을 믿는 것보다는 피땀 흘려 노력하는 것이 제일이라는 말일 것이다. 역시 불로소득이란 타개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미련스럽게 기다리기만 한대서야 무엇이 이루어질까?

 

 옛날 미생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어느 여인과 다리[橋]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다. 마침 그 날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는데, 아하, 그 여인은 나오지를 않는다. 모처럼 만나기로 한 약속인데, 이제나 나올까 저제나 나올까 초조한 마음을 달래며 끈기 있게 기다렸으나 종무소식이었다. 물은 불어 배꼽을 간질이는데 미생은 생명을 걸고 여인을 그대로 기다린다. 그 용기만은 진실로 가상타 하겠으나, 결국 미생은 물에 쓸려 그에게는 유일한, 오직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여기서 미생지신(尾生之信)이란 말이 나왔으니, 우직스런 믿음을 일컫는 말이다.

 빗발치듯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 목숨을 걸어 놓고서 적이 좀 더 접근하기를 기다리는, 그래서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기다림은 병법의 A, B, C이겠지만, 미생과 같은 일분의 여유조차 없는, 융통성이란 쥐꼬리만큼도 없는 믿음으로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는 기다림은 우리들로 하여금 숨 막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기지가 풍부하고, 처세술에 밝은 현대인들이야 전후곡절과 이해득실의 미세한 차이까지도 계산하여 행동을 하는 판인데, 미생지신이라니, 그런 말은 골동품 상점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고들 생각해 버릴 것이 아닌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가짜도 진짜로 둔갑시키는 현대판 둔갑술을 능숙하게 부리는 사람들에게는, 여인과의 하찮은 약속(?) 때문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 미생의 고사는 어디 될 법이나 한 얘기인가? 그러한 일이 실제로 있게 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topic news감이 될 것이다.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은 뉴스감이 못 되지만 사람이 개를 물었다면 굉장한 뉴스감이라든가? 뉴스란 어찌 보면 비정상적인 것, 비상식적인 것이 아닌가?

 기다림도 합리적인 기다림이어야만 한다. 준비가 없이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현재가 편안하고 별 탈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항상 다가올 미래에 대하여 만반의 대비를 하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춘추좌씨전”의 ‘거안사위하라. 사즉유비요, 유비면 무환이라.(居安思危 思則有備 有備無患)’는 말은 실생활인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명심해야 할 금언이 아닐까?

 ‘기다림’이란 일반적으로 희망감을 수반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그와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가 있다. 선생님의 꾸지람을 들어야 되는 학생의 떨리는 심정, 수술실에 들어간 중환자의 용태를 기다려야 하는 그 가족들의 불안하고도 초조한 기다림, 맞선을 보고 상대방의 행동거지로 보아서는 퇴짜임에 거의 틀림없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고 마지막 결정적인 말을 기다려야 하는 노처녀의 안쓰러운 기다림, 당장 비죽이 밀고 나오려는 뒤를 잔뜩 그러잡고 줄 지어 서 있는 맨 끝에 가 서서 앞자리 사람들의 용무가 빨리 끝나기를 기다려야 하는 공중변소 앞에서의 고통스러운 기다림, 그런가 하면 임종을 앞에 두고 마지막 가는 이의 희미한 숨결을 지키며 울먹거려야 하는 유족들의 기다림 등 바랄 만한 것이 되지 못하는 기다림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운명을 미리 점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자신이 앞으로 삼일밖에 살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떤 행동으로써 그 나머지 삼일의 시간을 메꿀 것인가? 어떠한 심정으로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지낼까? 발광을 해 버릴까? 체념을 해 버릴까? 아마도 평온한 마음으로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귀에는 시계 초침 소리가 마치 자신의 몸을 갉아먹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그는 시간의 빠름을 새삼 절감할 것이며, 모든 아름다운 현상들이 하나같이 시들하게 보일 것이다. 잠자는 시간마저도 아까워 충혈된 눈을 한 채 깨어 있을 것이고, 그래서 그는 꼭 해 놓아야 할 일들도 흐리멍텅한 정신 때문에 정작 완결 짓지 못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에게는 세수하는 시간도 아깝고, 밥 먹는 시간도 아깝고, 그 아깝다고 생각하는 시간마저도 아깝고, 살아서 움직이는 시간 하나하나가 아까울 것이다. 그는 급기야 살아 있는 시간도 아까워져서 삼일이란 제한되어 주어진 나머지 삶마저도 다 채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 이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에게는 삼 일 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나는 내 운명에 의해 피살되기는 싫다. 나는 그 삼 일 간의 시간 중 단 얼마라도 아끼고 싶다. 황금 같은 그 시간을 어떻게 사치스럽게 기다림으로 보내고 있을 것인가. 나는 나의 남은 시간을 저축하겠다.?

 그는 한 장의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목숨을 끊는 바로 그 시간은 제한되었던 삼 일째의 맨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야기가 소설 투를 흉내 냈지만, 그의 기다림은 인생의 어떤 기다림보다도 가장 참기 어려운 곤혹의 기다림이 되었을 것이라 짐작이 된다.

 기다림은 이렇게 로마 신화에 나오는 두 얼굴을 가진 신(神), 성과 집의 문을 지키며, 전쟁과 평화를 상징한다‘는 야누스(Janus)’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두 개의 얼굴 중 어느 것이 진짜 얼굴인가? 기다림은 우리에게 있어서 때로는 반가운 손님이요, 때로는 밉살맞은 방문객이다.

 송나라 사람 하나는 나무 등걸에 부딪쳐 죽은 토끼를 얻고, 그 이후로는 아예 농사지을 생각 같은 것은 하지도 않고 나무 등걸만 지키고 앉았더라는 고사가 있다. 그것을 우리는 ‘수주대토(守株待兎)’라고 한다. 그 사람이 이후로 다시 토끼를 얻을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이와 같은 기다림이란 아무리 해 봐야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 송인은 기다림에 대한 건전한 정신 자세를 지니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긍정적인 일이 찾아오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부정적인 결과가 도래한다고 했다. 이왕이면 머피와는 거리를 유지하고 샐리와 친해지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희망적인 기다림, 설렘이 뒤따르는 기다림으로 살면, 하루하루가 즐겁고 활기찬 나날이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글을 쓸 때에도 될 수 있으면 긍정적인 미래를 설계하는 데 도움을 주는 글을 쓰는 일이 바람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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