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 고전수필 순례 15)
김시습전(金時習傳) [상]
이 이 지음
이웅재 해설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으로 강릉인(江陵人)이다. 신라 알지왕(閼智王)의 후예(後裔)에 왕자 주원(周元)이란 이가 있었는데, 강릉에 살았기 때문에 자손들이 인하여 본적(本籍)으로 삼았다.(김주원은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 선덕왕이 후사가 없이 작고하자 뭇 신하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으나, 불행하게도 홍수로 알천[閼川]이 범람하여 건너올 수 없게 되자, 대신들이 이는 하늘의 뜻이라 하여 상대등 김경신[金敬信]을 원성왕으로 추대하자 그는 명주[溟州:강릉]에 도피하여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일설에는 그가 도피 중 잠시 은거하여 지내던 곳이 주왕산이라 한다.) 그 뒤…일성(日省)이 음사(陰仕)로 충순위(忠順衛)가 되어 선사 장씨(仙槎張氏)에게 장가들어 한성에서 시습을 낳았다.
김시습은 나면서부터 천품이 남달리 뛰어나서 생후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알았다. 최치운(崔致雲)이 보고서 기이하게 여겨 ‘시습’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시습은 말은 더디었지만 정신은 놀랄 만하여 글을 보면 입으로는 읽지 못했으나 그 뜻은 모두 알았다. 세 살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고, 다섯 살에 『중용』과 『대학』에 통달하니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 하였다. 명공(名公) 허조(許稠) 등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보았다.
장헌대왕(莊憲大王: 세종)이 듣고 승정원으로 불러 시(詩)로 시험하니 과연 빨리 지으면서도 아름다웠다. 하교(下敎)하기를, “내가 친히 보고 싶으나 세속의 이목을 놀라게 할 듯하니, 그 가정에 권면하여 드러내지 말고 잘 가르치도록 하게 하라. 그의 학업이 성취되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리라.” 하고, 비단을 하사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에 그의 명성이 온 나라에 떨쳐 이름을 부르지 않고 5세(五歲)라고만 불렀다.…
노산(魯山: 단종)이 3년 만에 왕위를 손위(遜位)하게 되었는데 이때 시습의 나이 21세였다. 삼각산에서 글을 읽다가 서울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그 소식을 듣고 즉시 문을 닫아걸고 3일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다가 방성대곡(放聲大哭)을 하고는 서책을 모조리 불살라 버렸고, 발광(發狂)을 하여 뒷간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불문(佛門)에 의탁(依託)하고 승명(僧名)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그의 호는 여러 번 바뀌어 청한자(淸寒子)ㆍ동봉(東峰)ㆍ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ㆍ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사람됨이 생김새는 못생기고 키는 작았으나 뛰어나게 호걸스럽고 영특하였으며 단순하고 솔직하여 위의(威儀)가 없으며 강직하여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못했다. 시속(時俗)에 마음을 상하고 분개한 나머지 울분과 불평을 참지 못하고, 세속을 좇아 어울려 살 수 없음을 스스로 헤아리고는 드디어 육신에 구애받지 않고 세속 밖을 방랑하며 노닐어 나라 안의 산천치고 그의 발자취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명승(名勝)을 만나면 곧 거기에서 머물러 살았고, 고도(故都)를 찾아가면 반드시 발을 구르며 슬픈 노래를 불러 여러 날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총명하고 뛰어남이 남달라서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은 어렸을 때에 스승에게서 배웠으나, 제자(諸子)와 백가서(百家書)는 배우지 않고서도 섭렵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한번 기억하면 일생 동안 잊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 글을 읽거나 책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지만, 고금(古今)의 문적(文籍)을 꿰뚫지 않은 것이 없어 남의 질문을 받으면 응대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의 문장은 물이 솟구치고 바람이 부는 것과도 같고, 산이 감추고 바다가 머금은 것과도 같으며, 신이 선창하고 귀신이 답하는 것과도 같아 얼핏 보아서는 여러 단계의 의미가 드러나 사람으로 하여금 그 실마리를 잡아내지 못하게 하였다. 성률(聲律)과 격조(格調)는 애써 마음을 쓰지 않아도 그 뛰어남은 생각이 고상하고 원대함에 이르고 통상적인 정(情)에서 멀리 벗어나 있으므로 문장이나 다듬어 수식하는 자로서는 따라갈 바가 되지 못하였다.…
스스로도 명성(名聲)이 너무 일찍부터 높았다고 생각하였는데, 이제 하루아침에 세상을 도피하여 마음은 유교에 두고 행동은 불교를 따라 시속(時俗)에서 해괴하게 여김을 취하여, 일부러 광태(狂態)를 지으며 이성을 잃은 모양을 하여 진실을 가렸다. 학자로서 학문을 배우겠다고 하는 이가 있으면, 나무토막이나 돌멩이로 때려 보기도 하고, 또는 활을 당겨 쏘아 보려고도 하여 그의 성의를 시험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문하에 머물러 있는 이가 적었고, 또 산전(山田) 개간하기를 좋아하여 비록 부귀한 집의 자식일지라도 반드시 김을 매고 거두어들이는 수고를 거치도록 하였기 때문에 끝까지 학업을 전수받는 자는 더욱 드물었다.
산에 가면 나무껍질을 벗겨 시를 쓰기를 좋아하였는데 한참 읊조리다가 문득 곡하고는 깎아 버리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종이에 쓴 후 남에게는 보이지 않고 물이나 불에 던져 버리기도 하였다. 또 어떤 때에는 나무를 조각(彫刻)하여 농부가 밭갈이하는 모습을 만들어 책상 옆에다 두고 종일토록 골똘히 들여다보다가 또한 울면서 태워 버리기도 하였다. 때로는 심은 벼가 이삭이 패어 나와 탐스럽게 되었을 때에 술에 취한 채 낫을 휘둘러 모조리 쓸어 눕히고는 목놓아 통곡하기도 하였다. 그 행동거지가 종잡을 수 없었으므로 크게 속세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산에 있을 때에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서울의 소식을 물어보고,… 인망 없는 인물이 고위 고관에 임명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반드시 통곡하되,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어서 이 사람이 이 직책을 맡게 되었나.” 하였다. 당시의 이름난 공경(公卿)인 김수온(金守溫)과 서거정(徐居正)은 국사(國士)로서 칭찬하였다.
♣해설: 이이(李珥: 1536~1584)의 본관은 덕수(德水)로,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등이며, 아명은 현룡(見龍),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사후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이원수(李元秀)와 정경부인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다. 이 글은『율곡선생전서』제14권 잡저(雜著) 중의 「김시습전」에 나오는 것으로,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DB를 따랐으나 부분적으로 윤문을 하였음을 밝힌다.
(속 ․ 고전수필 순례 15 ) 김시습전(金時習傳.hwp
'우리의 고전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속 ․ 고전수필 순례 17) 용병편(用兵篇) (0) | 2010.07.19 |
---|---|
(속 ․ 고전수필 순례 16) 김시습전(金時習傳) [하] (0) | 2010.06.06 |
(속 ․ 고전수필 순례 14) 노송(老松) (0) | 2010.05.02 |
(속 ․ 고전수필 순례 13) 산가서(山家序) (0) | 2010.04.13 |
(속 ․ 고전수필 순례 12) 아이들이 지켜야 할 사소한 예절 이것저것 (0) | 2010.04.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