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물열전

경북 인물열전 (48) 권귀에게 아부하지 않아 자주 축척을 당했던 유석(庾碩)

거북이3 2010. 5. 26. 23:46

경북 인물열전 (48)

  권귀에게 아부하지 않아 자주 축척(逐斥)을 당했던 유석(庾碩)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4. 慶尙道 安東大都護府 名宦 條]

                                                                                                                    이  웅  재


 유석(庾碩:?~1250[고려 고종 37])은 황해도 평주[平山]에서 분관한 전북 고창의 무송 유씨(茂松 庾氏)로서, 평장사(平章事) 유필(庾弼)의 증손이고, 유응규(庾應圭)의 손자이며, 호부 시랑(戶部侍郞) 유세겸(庾世謙)의 아들이다.

 1216년(고종 3)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내시(內侍)로 있다가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을 거쳐 1235년(고종 22) 안동인(安東人)이 몽고병을 인도하여 동경(東京)으로 향할 때 충청주도안찰사(忠淸州道按察使)로 동남도지휘부사(東南道指揮副使)를 지내고 내시소부감(內侍小府監)을 거쳐 안동도호부사(安東都護副使)가 되었다.

 온 고을 백성들이 부모같이 사랑하며 신명(神明)같이 공경하였는데, 순문사(巡問使) 송국첨(宋國瞻)이 유석에게 이첩(移牒)하여 산성을 보수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일을 판관 신저(申著)와 함께 하도록 하자 유석은 탐오(貪汚)한 신저가 싫어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날마다 선비들과 더불어 글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내니 신저(申著)가 못마땅하게 여겨 당시의 권력자 최이(崔怡: 최충헌의 아들)에게 고소하였다.

 최이는 “성의 수리가 대사(大事)인데 부사가 힘쓰지 않으니 적병(狄兵)이 이르면 반드시 패배할 것이다.” 라고 하면서 그를 나주(羅州)의 암타도(巖墮島)로 귀양 보내게 하였다. 장차 귀양지로 떠나가려 하니 늙은이로부터 어린아이들까지 길을 막고 소리 내어 울며 말하였다.

 “하늘이시여, 우리 유공(庾公)이 무슨 죄가 있단 말입니까? 공이 가시면 우리들은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옷을 붙잡고 가지 못하게 만류하므로 압송하는 별초(別抄)가 소리쳐 꾸짖어 간신히 길을 열었다. 그 아내가 또한 아들딸들을 이끌고 함께 가는데, 관아에는 사유(私有)의 말이 다만 세 필 뿐이어서 어떤 이는 도보로 걸어가기도 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울면서 하루만이라도 더 머무르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아니하므로 할 수 없이 말과 하인을 내어서 호송하려 하였다. 이에 그의 아내가 사양하여 말하였다.

 “가장이 귀양을 가는 길이니 아내나 아들이 모두 다 죄인입니다. 어찌 하인과 말을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고을 사람들이 굳이 청하였으나 끝까지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여 말하기를, “이 같은 부인의 절개가 아니라면 어찌 우리 공의 배필이 되었겠는가?" 하였다.

 뒤에 다시 기용되어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서 선정을 베풀어 임기가 끝났으나 그곳 사람들의 간청으로 다시 3년을 더 유임하고 돌아왔다. 이어 예빈경(禮賓卿)으로 몽고사(蒙古使)의 관반(館伴)이 되었으나 예를 잃었다는 역관의 무고로 연화도(蓮花島)에 유배되었다가, 최이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그의 아들 최항(崔沆)이 민심을 수습하려고 명망 있는 사람을 기용할 때 지형부사(知刑部事)로 등용되었다.

 『고려사절요』권16 고종  37년(1250) 조를 보면, 이때에도 대장군 김보정(金寶鼎)과 이보(李輔) 등이 노비 문제로 송사한 일이 있었는데, 유석이 공정하게 법을 지키어 흔들리지 않으므로 두 사람이 그를 원망하여 최항에게 호소하여 안북도호부사(安北都護副使)로 내쫓았고, 그는 얼마 안 되어 졸하였다.

 이보다 먼저 어떤 병마사 한 사람이 강요주(江瑤珠)를 최이에게 바치었는데 이것이 전례가 되었다. 강요주는 용진현(龍津縣)에서 나는 해물 이름으로 잡기가 매우 어려웠다. 현인(縣人) 50여 호가 이로 말미암아 업(業)을 잃고 도망가 흩어져서 동네가 거의 텅 비게 되었다. 유석이 그것을 일절 금하였더니 흩어졌던 사람이 다시 모여 들었다.

 당시에 수령들이 다투어 백성들의 것을 빼앗아 권귀(權貴)에게 선물을 보내어 아첨을 하였는데, 유석이 공문을 내려 그것을 금하였다. 이에 그를 꺼리는 자가 있어 그 문서를 가져다 최이에게 보이니 최이가  말하기를, “유석은 나에게 선물을 바치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하지, 어찌 괴롭게 도내의 수령들에게까지 금하게 하느냐?"고 하였다.

 이와 같이 무릇 가는 곳마다 청백하게 법을 지키고 권귀에게 아부하지 않았으므로 자주 조그만 과실로 말미암아 축척(逐斥)을 당하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절조를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뒤에 박유저(朴惟氐)가 안동(安東)의 수령이 되어서 스스로 정치가 유석보다 못하지 않다 생각하였다. 하루는 홀로 앉아 있다가 성품이 질박하고 근면한 한 작은 서리를 보고 물어보았다.

 “백성들이 나를 유사군(庾使君)과 견주어  어떠하다 하더냐?" 

 서리가 대답하였다.

 “백성이 유사군을 칭찬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야 박유저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에 박유저가 부끄러워 굴복하였다.

 유석과 관련된 기록은 『삼국유사』권3, 전후소장사리(前後所藏舍利) 조에도 나온다.

 통도사(通度寺)의 사리는 워낙 귀한 보물이라 사람들이 항상 사리함을 열어 친견하기를 원했었던 모양이다. 속설에 의하면 옛날 두 안렴사(按廉使)가 전후하여 사리를 친견하기 위해 함을 열어 보았다. 처음에는 긴 구렁이가 석함을 지키고 있었으며, 두 번째는 큰 두꺼비가 지키고 있었다.

 그 후부터는 감히 함을 열어보지 못했는데, 근일에 상장군 김이생(金利生)과 시랑 유석(庾碩)이 고종의 명을 받아 절에 와서 사리를 친견하려고 하였다. 절의 중이 이전의 일로써 난처하게 여기었으나 김이생과 유석은 군사들을 시켜 사리함의 뚜껑을 열게 하였다. 이때 함이 조금 상하여 금이 간 데가 있었다. 마침 유석이 수정함(水晶函) 한 개를 가지고 있다가 시주하여 사리를 다시 봉안하였는데, 그 해는 강도로 서울을 옮긴 지 4년째인 1235년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