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49) 자신은 충신불사이군, 자.hwp
경북 인물열전 (49)
자신은 충신불사이군, 자손들에게는 조선조 관직 진출을 허락한 길재(吉再)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9. 慶尙道 善山都護府 人物 條]
이 웅 재
길재(1353~1419)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로서,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금오산인(金烏山人)이며 시호는 충절(忠節), 구미(龜尾)의 해평(海平)사람이다. 금주지사(錦州知事) 길원진(吉元璡)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토산(兎山: 황해도 金川郡)의 사족(士族)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증된 김희적(金希迪)의 딸이다. 포은 정몽주(鄭夢周), 목은 이색(李穡)과 함께 여말삼은으로 불린다.(길재 대신 陶隱 李崇仁을 넣기도 한다.)
1363년(공민왕 12) 11세 때 선산(善山)의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 신라의 중 阿道가 있었던 곳으로 겨울인데도 산중턱에 복숭아꽃ㆍ오얏꽃이 만발해 있었으므로 절을 세우고 도리사라고 불렀다고 한다.)에서 처음 글을 배웠으며, 18세 때인 1370년 상산사록(商山司錄) 박분(朴賁)에게 『논어』와『맹자』를 배우면서 성리학을 접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관료로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개경에 갔다가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이 날로 성취되자, 사람들이 수근거리며 말했다.
“우리 문도(門徒)를 계승하여 배우는 자 중에서는 재보가 마땅히 제일이다.”
1374년 생원시, 1383년(우왕 9)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고, 그해 중랑장 신면(申勉)의 딸과 결혼하였다. 1386년 진사시에 합격, 청주목(淸州牧) 사록(司錄)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고, 이듬해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었다가, 또 그 다음해에는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하여, 후학을 가르치고 이끌었는데 여러 생도들이 그에게 잘 복종하며 따랐다.
1389년(창왕 1)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고려의 쇠망을 짐작하여 늙은 어머니에 대한 봉양을 구실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390년 계림부(鷄林府)와 안변(安邊) 등의 경사교수(經史敎授)로 제수되었으나 아울러 나아가지 않았다. 우왕의 죽음을 듣고 채과(菜果)와 혜장(醯醬) 등을 먹지 않고 마음으로 3년상을 행하였다.
조선 태종의 잠저(潛邸) 시에는 서로가 강마(講磨: 학문이나 기술을 갈고 닦음)를 따라했으나,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정종 2)에 이방원(李芳遠)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였으나,
“지난날 전하와 더불어 반궁(泮宮: 성균관과 문묘를 아울러 이르는 말)에서 시를 읽은 적이 있었으므로, 이제 신을 부르신 것은 옛 정을 잊지 않으심으로 아옵니다. 하지만, 신씨(辛氏) 조정에서 과거에 올라 벼슬하고 왕씨가 복위하자 곧 고향으로 돌아와 일생을 마치려 하였는데, 이번에 옛 일을 기억하고 부르시오니 올라와서 뵙고 곧 돌아가고자 하오며, 벼슬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닙니다.” 하였다.
태종이 말하였다.
“공이 한 말은 실로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말한 것이어서 그 뜻을 뺏기 어려우나, 부른 것은 나이지마는 벼슬을 준 것은 상감이니, 상감께 아뢰는 것이 옳을 것이오.” 하였다. 이에 임금께 글을 올렸는데 그 대략은, “신이 듣기에 여자에게는 두 남편이 없고,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없다 하였으니, 늙은 어미를 봉양하도록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시어, 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려는 뜻을 이룩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이에 정종이 권근에게 자문(諮問)한 끝에 그 절의를 높이 여겨 예를 다하여 대접하고 집에 돌아가 조신(操身: 행동을 삼감)할 것을 허락하고, 그 집을 복호(復戶: 조선 시대에, 충신ㆍ효자ㆍ군인 등 특정한 대상자에게 부역이나 조세를 면제하여 주던 일)하게 하였다.
1402년(태종 2)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불교식 장례법을 따르지 않고 성리학적 가례(家禮)를 따랐다. 이듬해에 어머니에 이어 큰 아들이 죽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주자가례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1403년에는 지군사(知郡事) 이양(李楊)이 길재를 방문했다가 그의 농토가 메말라 생산이 별로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좋은 전답을 선사했으나, 사는 것을 충당할 수 있을 만큼 조그마한 땅만 차지하고 나머지는 되돌려 보냈다. 이후 스승 박분과 권근이 죽자 심상(心喪) 3년을 행했다.
세종이 즉위한 뒤 길재의 절의를 기리는 뜻에 그 아들 길사순(吉師舜)을 서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주었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지극하였고,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탐욕스러움이 없이 깨끗하였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경학(經學)을 강론할 때면 반드시 정주학(程朱學)의 뜻에 합당함을 취하였으며 항상 밝은 도학으로써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데 힘썼다.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으며, 김숙자(金叔滋)를 비롯하여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등이 그의 학맥을 이었다.
세종이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를 추증하고 그의 절의를 기리는 정문(旌門)을 세우고, 청풍서원(淸風書院)에 제향하였다.
충신도(忠臣圖) 찬(贊)에 이르기를, “송산(松山: 송악산)의 왕기(王氣)는 이미 재가 되었고, 참 임금 일어나 큰 운수가 열렸는데, 오히려 옛 임금 그리며 절개를 보전하고, 표연히 돌아와 자릉대(子陵臺: 자릉은 嚴光의 字. 漢 光武帝와 같이 유학하였는데, 광무제가 즉위하자 은거하였다. 광무제가 찾아서 諫議大夫 벼슬을 주려 하였으나 사양하고 富春山에서 밭갈며 평생을 마쳤다.『후한서』 권 113 嚴光傳)에 누웠도다.”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인동현(仁同縣) 조를 보면, 인동현 금오산(金烏山: 불가에서는 해주의 北崇山에 대하여 南崇山이라고도 한다.)에 숨어 살았다 하며, 그의 묘소는 인동현에서 서북으로 14리 떨어진 오태산(吳泰山)에 있으며, 부(府)에서 20리 거리에 상거한 금오산 아래 구며리(仇㫆里)에는 관찰사 남재(南在)가 세운 길재사(吉再祠)가 있다.
세종이 즉위하던 해인 1419년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문집에 《야은집》 《야은속집(冶隱續集)》,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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