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물열전

경북 인물열전 (53) 이성계의 사람됨을 알아보았던 술 300잔의 이달충

거북이3 2010. 10. 3. 23:08

경북 인물열전 (53)

   이성계의 사람됨을 알아보았던 술 300잔의 이달충(李達衷)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1. 慶尙道 慶州府 人物 條]

                                                                                                                               이  웅  재


 이달충 (李達衷, 1309?-1385)은 고려 말기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요, 자는 지중(止中), 호는 제정(霽亭),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첨의참리(僉議參理) 이천(李蒨)의 아들이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를 거쳐 공민왕 때 전리판서(典理判書)·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하였다.

 1359년(공민왕 8) 호부상서로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었다가 팔관회(八關會) 때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면되었으나, 1366년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다시 기용되었다.

 신돈(辛旽)의 전횡 시절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신돈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은 상공(相公)이 주색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하고 직언한 일로 인하여 다시 파면되었다가, 1371년 신돈이 주살(誅殺)된 후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고 1385년(우왕 11)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성품이 강직하여 굽히지 않았으며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鑑識)이 있었다.

 일찍이 동북면(함경도) 도순문사(都巡問使, 도지사)로 있을 때 고을을 순시하다가 안변부(安邊府)에 이르렀는데, 그 부하 장수 하나가 이성계와 다투고 그에게 와 일러바쳤다.

 그런데 이성계를 부른 이달충은 그를 보자 자기도 모르게 뜰에 내려가 맞아들인 뒤 술을 대접하면서, 부하에게 절대로 그와는 겨루지 말라고 일렀다. 이성계의 아버지 환조(이자춘)가 이달충에게 사례하였다.

 이달충이 서울로 돌아갈 적에 환조가 들에서 전송하였는데, 이성계는 환조의 뒤에 서 있었다. 환조가 잔에 술을 부어 돌리니 이달충이 서서 마시었으나 이성계가 잔에 술을 부어 돌림에 이르러서는 이달충이 무릎을 꿇고 마시었다. 환조가 괴이히 여겨 물으니, 이달충이 말하기를,

 “귀랑(貴郞)은 참으로 비범한 사람입니다. 공께서도 아마 미치지 못할 것이며, 공의 가업을 번창하게 할 사람은 반드시 이 아드님일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한다.

 이달충의 아들 이전(李竱)은 나중에 이성계가 임금이 된 뒤 술에 취해 실언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헌사가 상소하여 그를 율(律)대로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그 아비 달충은 일찍이 신의로 나와 벗하던 사람이니, 전(竱)이 만일에 참형을 당하게 되면 달충의 영혼이 나를 무엇이라 하겠는가? 그의 죄를 용서하라.”

하고, 명하여 도죄(徒罪)로 해남현(海南縣)에 보내고, 그 집은 적몰(籍沒)하였는데, 전(專)은 도형(徒刑)으로 복역 중 죽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전라도 전주부 고적 조에는, 청사(廳事)의 북쪽에 녹균정(綠筠亭)이 있었는데, 목사 한계상(韓系祥)이 정을 바꾸어 누(樓)로 만들었고, 이달충이 그 편액을 관풍루(觀風樓)로 고치고 기문을 적었다고 한다.

 그의 시문은 이제현이 크게 칭찬한 바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5권 강원도 간성군(杆城郡) 누정 조에는, 청간역(淸澗驛) 동쪽 수리(數里)에, 돌로 된 봉우리가 우뚝 일어서고 층층이 쌓여 대(臺) 같은 만경루(萬景樓)가 있다. 이달충이 그 형승을 보고 지은 시에서는, “바다를 구경하러 와서 만경대에 오르니, 구름 안개에 쌓인 물결이 하늘에 닿아 들어오네. 만일 이 물이 술로 변한다면, 어찌 하루에 3백 잔을 기울일 뿐이랴.” 하였다.

 같은 책 강원도 통천군 산천 조를 보면, 고을 동쪽에 있는 금란굴(金幱窟)에는 굴 구석에 석 자쯤 되는 석벽이 있는데, 돌무늬가 누렇고 아롱다롱하여 중들의 이른바 가사의 금란(金幱: 상하의가 하나로 이어진 황금색 옷)과 같고, 면목견비(面目肩臂)의 몸체 형상은 없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이 돌 아래 나타났다고들 했다고 한다. 이를 보고 이달충이 읊었다.

 “보살이 무엇 하러 돌 사이에 머물러서 우리 세속 사람들 고생스레 찾게 하는고.… 소리로 구하고 빛으로 본다는 것이 벌써 허망된 것이요, 눈이 부딪치면 도(道)가 있다니, 더욱 어려운 것이네.”

 같은 책 제46권  춘천도호부 산천 조에서는 소양강(昭陽江)을 두고 다음과 같이 읊었다.

 “강이 맑으니 어찌 매실로 갈증 풀겠는가, 강물이 흘러가니 나의 회포를 실어 보낼 수 있겠구나. 강 언덕을 빙 둘러 향기 나는 풀을 뜯고, 강의 돌을 사랑하여 푸른 이끼에 앉노라. … 술 사는 것 어찌 십천두(十千斗)만으로 논하랴, 사람을 만나면 문득 3백 잔씩 마시리라. ….” 그는 ‘술’ 하면 ‘3백 잔’은 마셔야 마신 것처럼 느껴졌는가 보다.

『동문선』 제49권 「잠(箴)」에는, 유비자(有非子, 허물이 있는 사람)가 무시옹(無是翁, 옳음이 없는 노인)을 찾아가 문답하는 과정을 통해서 모든 것을 자기에게서 구해야 한다는 내용의 「애오잠병서(愛惡箴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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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전해지며, 문집으로는 제정집(霽亭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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