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물열전

경북 인물열전 (51)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고도 억울하게 죽은 김득배

거북이3 2010. 8. 29. 20:26

경북 인물열전 (51)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고도 억울하게 죽은 김득배(金得培)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8. 慶尙道 尙州牧 人物 條]

                                                                        이  웅  재

김득배(1312~ 1362)는 호가 난계(蘭溪),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고을 아전 김조(金祚)가 딸을 두었는데 이름이 김만궁(金萬宮)이었다. 나이 일곱 살에 부모가 거란(契丹)의 군사를 피하여 백화성(白華城)으로 가다가, 군사가 가까이 쫓아오자 창황(蒼黃)하여 길옆에 버리고 달아났다. 사흘 뒤에 수풀 밑에서 찾았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밤이면 무엇인가가 와서 안아주고 낮이면 가곤 하였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서 그 자취를 밟아 가 보았더니 곧 호랑이였다.

 15세가 된 뒤에 호장(戶長) 김밀(金謐)에게로 출가하여 김록(金祿)을 낳았고, 판전의(判典醫) 김록이 세 아들을 낳았는데, 그 맏아들이 김득배(金得培)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이 되고, 전객 부령(典客副令)이 되었다. 공민왕(恭愍王)을 따라 원 나라에 들어가서 숙위(宿衛)하였는데, 왕이 즉위한 뒤에 우부대언(右副代言)을 제수받고, 1357년(공민왕 6)에는 서북면 홍두왜적방어도지휘사(西北面紅頭倭賊防禦都指揮使)가 되고, 이어서 추밀원 직학사(樞密院直學士)가 되었으며, 다시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가 되어, 서경윤 상만호(西京尹上萬戶)를 겸하였다.

 1359년(공민왕 8)에 홍건적(紅巾賊)의 위평장(僞平章) 모거경(毛居敬)의 무리가 의주(義州)를 함락시키고 부사(府使) 주영세(朱永世)와 고을 백성 천여 명을 죽이매, 김득배가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과 함께 군사를 거느려 진격하였는데, 모두 아홉 번 싸워서 개가(凱歌)를 아뢰고 돌아오자, 수충보절 정원공신(輸忠保節定遠功臣)의 칭호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제수받았다.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이 또 삭주(朔州)와 이성(泥城)을 공격하고 개경을 점령하여 수개월 간 주둔하고 있으면서, 소와 말을 도살하여 그 가죽을 둘러 성으로 삼고 그 위에 물을 부어 얼음판을 만들어 사람이 타고 올라갈 수 없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불태워 죽이고 혹은 아이를 밴 여자의 젖을 도려 구워먹는 등 잔학한 일들을 자행하였다. 이에 왕은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의 지휘 아래 김득배를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삼고 안우·이방실·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20만 군사를 거느리고 홍건적을 치게 하였다. 정세운이 진격하기를 독촉하여 모든 장수들이 개경을 포위하자 정세운은 물러가 두솔원(兜率院)에 주둔하였다. 때마침 눈비가 내려 적의 방비가 허술하였다. 이 틈을 이용하여 적군을 대파하고 개경을 수복하여 난을 평정하였다. 이때 적의 머리 10여 만을 베었다고 한다.

 평장사(平章事) 김용(金鏞)은 본래 정세운과 임금의 은총을 다투었는데, 안우・ 김득배・ 이방실 등이 큰 공을 세우자 왕의 신임이 두터워질 것을 염려하여 거짓으로 꾸민 조서를 이용하여 안우·이방실 등을 시켜 정세운을 죽이게 하였다. 김용은 그것을 빙자하여 김득배 등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김득배 등을 몽땅 죽일 것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김용은 “안우 등이 함부로 주장(主將)을 죽였으니 이것은 전하를 무시한 일로서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주장하여 안우를 죽였다. 왕은 안우가 죽은 후 그의 어린애들이 발가벗고 길가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가엾이 여겨 궁중으로 불러 그 아이가 희망하는 곳으로 보냈다.

 김용은 다시 홍언박(洪彦博), 류탁(柳濯) 등과 함께 임금의 승인을 받아 방문(榜文)을 널리 붙였다. “안우 등은 신하의 본분을 잊고 함부로 정세운을 죽였다. 안우는 처형되었는데 누구든지 김득배와 이방실을 체포하면 급수를 세 계단 올려 등용할 것이다.”하고 대장군 오인택(吳仁澤) 등을 보내 김득배를 체포하게 하였다. 김득배는 기주(基州)에서 이방실이 붙잡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부하 몇 사람을 데리고 도망하여 산양현(山陽縣)에 있는 선대의 묘지 옆에 숨어서 지냈다. 하지만, 장모의 자백으로 인하여 체포되어 상주(尙州)에서 51세로 효수(梟首)되니 듣는 자가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의 문인(門人) 포은 정몽주(鄭夢周)가 왕에게 청하여 시체를 거두고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그 뒤 상주 옥성서원(玉成書院)에 봉안하였다. 그 제문에 말하기를, “생각해 보면 당신이 솔선하여 대의(大義)를 제창하고 온 나라가 이에 호응하여 삼한(三韓)의 왕업을 회복하였으니 그 공으로써 죄를 덮어주어야 했다. 그러나 태산 같은 공로는 칼끝의 피로 변하였다. 나는 장렬한 충신의 혼령이 반드시 영원히 지하에서 소리 없이 울 것을 짐작하는 바이다. 아! 운명이다.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라고 하였다. 포은이 김득배의 영전에 바쳤던 제문과 만시는 지금도 포은문집 중에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조정에서는 김득배에게 문무겸전의 극칭인 문충(文忠)의 시호를 내렸다.

 그의 두 동생도 뛰어난 인물이다. 아우 김선치(金先致)는 전라도 도순문사(全羅道都巡問使)류탁(柳濯)을 따라 왜적을 쳐서 수십 명을 죽였고 벼슬을 여러 번 옮기어 호부낭중(戶部郎中)이 되었다. 공민왕 때에는 원수 이암(李嵒)을 따라 적을 쳐서 일등으로 녹공(錄功)되어 이부시랑(吏部侍郞)에 뽑히었다.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시켰을 때에는 여러 장수를 따라 수복(收復)하였고, 누차 벼슬을 옮겨 밀직부사(密直副使)와 계림부윤(鷄林府尹)을 거쳐 동지밀직(同知密直)에 승진하였으며 신우(辛禑) 때에는 낙성군(洛城君)으로 봉하여졌다. 또 아우 김득제(金得齊)도 홍건적의 침입 때 대장군으로 공민왕의 피난길을 호종하고 서경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우고 벼슬이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세간에서는 그 삼형제를 삼원수(三元帥)라 일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