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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 고전수필 순례 19)
붕당(朋黨)
류성룡 지음
이웅재 해설
아, 우리나라가 점차 쇠약해진 데에는 그렇게 된 유래가 있다. 명종(明宗) 때에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ㆍ이량(李樑)의 무리가 20여 년 동안 서로 이어 정권을 잡으니, 충성스럽고 어진 이는 억눌려 등용되지 못하고, 기강은 무너져 어지럽고 탐관오리가 풍조를 이루어 이미 쇠약해져 떨치지 못할 조짐이 있었다.…
명종 말년에 이르러 권신과 간신들이 제거되니 자못 정치를 새롭게 하려 하였다. 이에 산림에 숨어 있던 선비들을 불러들여 조정에 벼슬하는 이가 많게 되니, 사림들이 즐거워하여 태평성대를 기대할 만하였다. 명종이 승하하고 금상(今上: 선조)이 즉위하게 되어서는 더욱더 인재의 등용에 유념하게 되니, 그 당시 건의하는 자들은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을 즐겨서 초야에 버려진 현사(賢士)가 없게 하는 아름다운 일로써 임금에게 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등용된 사람들은 대체로 말과 행동이 서로 맞지 않는 이가 많으며, 그중에는 혹 선비라는 이름을 가탁하여 시속의 좋아하는 것만 따르는 자가 있기도 하였다. 그래서 공도(公道)를 저버리고 당파를 위해서 죽는 폐습이 점차로 이루어지고, 직분을 지키고 임금을 받드는 의리는 점점 쇠퇴해져서 서로서로 부추기고 추천하여 당성(黨性)이 성한 자는 중요한 지위에 오르고 형세가 고립된 자는 낮은 벼슬에 억눌려 있게 되었다.
고(故) 상공 이준경(李浚慶)이 이것을 근심하여 고치고자 하였는데, 당시 사류라고 이름하는 자들이 떼 지어 일어나 공격하여 착한 이를 미워하는 일이라 하였다. 이에 이준경은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죽었다.
이때부터 조정은 둘로 나뉘어 당파의 화가 비로소 일어나더니, 이이(李珥)와 정철(鄭澈) 등이 일어나게 되어서는 더욱 분열되었다. 사대부들이 나와서는 조정에서 논의하고, 들어가서는 집에서 꾀하는 짓이 오직 피차간에 이기고 지는 것, 같은 당파끼리는 두둔하고 다른 당파는 공격하는 것으로 일삼아 번갈아 승부가 갈리더니, 계미년(1583, 선조 16: 이이를 공격하는 동인 세 사람을 모두 귀양 보내는 ‘계미삼찬[癸未三竄]이 있었던 해)ㆍ기축년(1589, 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사건을 계기로 동・서인들 사이의 세력 다툼인 기축옥사가 일어난 해)에 이르러서는 극도에 달했다.
일찍이 이에 대해 논평한다면, 명종 때에는 권신이 정권을 잡았으므로 폐단이 권력을 독점하는 데에 있었고, 금상 때에는 조신(朝臣)들이 당파를 만들었기 때문에 폐단이 권력의 분산에 있었다. 권력을 독점하게 되면 정사에 옳고 그름을 논하지 못하되 그래도 한군데로 귀착되는 것이 있지만, 분산되게 되면 시끄럽고 어지러워서 모양도 이룰 수가 없다. 그 밖에 또 틈을 타서 부정한 방법을 통하고, 어두운 곳에 의지하여 몰래 자신의 사욕을 이루는 무리가 세월이 갈수록 불어나 기강과 풍속이 크게 무너지게 된 것이다.…
옛날 소동파(蘇東坡)는 일찍이 화(和)와 동(同) 두 글자를 논하기를, “동은 물에 물을 탄 것 같고, 화는 국에 양념을 한 것과 같다.”하였다. 그러므로 신하들의 습성에 조화롭게 지내는 것은 좋으나, 부화뇌동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람마다 진실로 부화뇌동하는 것을 숭상한다면 천하는 또한 위태하다고 하겠다.
천하의 사리(事理)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보다 더 큰 것은 없다. 옳고 그름을 가린 뒤에야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밝힐 수 있고,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밝힌 뒤에야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자신에게 행한다면 나쁜 냄새를 미워하고 좋은 빛깔을 좋아하는 것처럼 자신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바르게 될 것이다. 이것을 남에게 행한다면 선(善)을 보고는 그에 미치지[及] 못할 것처럼 걱정하고 악(惡)을 보면 끓는 물에 손을 대는 것처럼 겁을 내어서 온 세상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바르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간사하고 사심을 품어 이(利)와 녹(祿)을 구하여 한번 이름을 사림에 붙이면 비록 죄악이 낭자하여 직분을 망가뜨려서 온갖 못된 짓을 하더라도 남으로 하여금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고, 한 번이라도 그 잘못을 논하는 자가 있으면 당장에 그를 시기하고 질투한다고 공격을 하게 되면, 옛 사람의 이른바, 선은 작은 것이라도 기록하지 않는 것이 없고, 악은 미세한 것이라도 폄시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하였는데, 이래서야 어찌 모든 일이 정밀하게 다루어지고 사물은 그 근본을 다스려서 이름에 따라 실적(實績)을 책임지우며 허위가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정치가 장차 시행될 수 있겠는가? 아, 시속(時俗)의 병폐가 이미 오래되었구나! 정치를 아는 신하와 기미를 아는 선비가 아니라면 누가 이것을 알 수 있겠는가?…
임금이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다하여 거울처럼 맑고 저울처럼 평형을 이루어 위에서 내리 비추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러한 것을 이룰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각각 자기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현란시키고 번복하여 형상이 만 가지일 것이니, 임금이 그것에 좇아 옳고 그름을 살피고자 한다면 문틈 사이로 싸움을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니, 어떻게 그 승부의 바른 모습을 알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 하게 되어 온 세상의 인심이 점점 더 퇴폐해져서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니, 환란이 어찌 생기지 않으랴. 슬픈 일이다.…
♣해설: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며 동인의 일원으로, 조선의 5대 명재상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의성 출신이며,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황의 제자로 조목(趙穆)·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수학하였다.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라 절친한 사이로서 그의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이 글은『대동야승(大東野乘)』중의 『운암잡록(雲巖雜錄)』에 실려 있는, 당쟁의 폐단을 개탄한 글로 요즈음의 정국에도 일침을 가하고 있는 글이라 할 것이다.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DB를 따랐으나 부분적으로 윤문을 하였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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