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59) 집권자의 수하를 강물에 .hwp
경북 인물열전 (59)
집권자의 수하를 강물에 던져버린 김지대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6. 慶尙道 淸道郡 人物 條]
이 웅 재
김지대(金之岱;1190∼1266)는 고려 고종 때의 문신이다. 신라 경순왕의 넷째아들인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7세손이다. 고조의 휘는 순보(順輔)이고, 증조는 좌승선 세익(左承宣 世翊), 조부는 동정(同正) 봉기(鳳麒)이며, 시중(侍中) 여흥(余興)의 3남이다. 1190년(고려 명종 20년)에 청도 대성리(淸道 大城里)에서 태어났다. 통상 청도 김씨(淸道金氏)의 시조로 불린다. 초명은 중룡(仲龍), 문무를 겸한 명신으로 고려의 8대시인이며, 다도(茶道)로서도 널리 이름이 드러났다고 한다. 학문에 힘쓰고 글을 잘하였으며, 풍모가 헌칠하고 깨끗하며 척당(倜儻: 뜻이 크고 기개가 있음)하여 큰 뜻을 가졌다.
1217년(고종 4) 3만 명의 거란 병이 침입하였을 때, 태학생(太學生)으로서 군대에 자원하여 아버지를 대신해 출전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군사가 호신용의 의미로 방패에 기이한 동물(예: 용, 호랑이, 기린 등)이나 도깨비 등을 그리는 것이 유행이었으나, 그는 “국가의 환난은 신하의 환난이요, 어버이의 근심은 자식이 근심할 바이다. 어버이를 대신하여 나라에 보답한다면 충과 효를 함께 닦을 수 있을 것이다(國患臣之患 親憂子所憂 代親如報國 忠孝可雙修).”라는 시를 지어 붙였다. 원수 조충(趙沖)이 병사를 점검하다가 이것을 보고 비범한 사람이라 여겨서 가까이에 두고 중용(重用)하였다.
이듬해 기묘년에 개선하여 돌아와서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조충이 지공거(知貢擧:과거 시험관)가 되어 그를 일등으로 발탁하고 전주사록참군(全州司錄參軍)에 제수하였다. 그는 고아와 과부 등 어려운 사람들을 구휼하고 강호(强豪)의 세력을 억제하여, 호남의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였다.
뒤에 내직으로 들어와 보문각(寶文閣:장서 등을 관리하면서 왕을 모시고 경서를 강론하던 관청) 교감(校勘:경서 및 외교 문서를 조사하고 교정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을 맡았고, 당대의 대학자인 최자(崔滋) 등과 교유하였다.
1240년 전라도안찰사 시절에, 진도에서 최우(崔瑀)의 아들 만전(萬全; 崔沆의 옛 이름)이 수하 통지(通知)와 함께 온갖 못된 일을 저질러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만전은 김지대가 신임 안찰사로 부임해 오자,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온갖 요구를 제시하였다. 김지대는 가벼운 것만 처리해 주고 백성에게 좋지 않은 일들은 어물쩍 넘겨버리곤 했다.
어느 날 그는 짐짓 만전의 소굴인 진도(珍島)의 절로 가보았다. 사또가 행차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만전은 나와 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불쾌한 기색 없이 여유만만한 걸음으로 그 절 누각 위에 올라섰다. 거기에는 퉁소, 거문고 같은 여러 가지 악기가 있었다. 그는 원래 악기에도 능한 터수라 그 중 퉁소 하나를 집어 들고 몇 곡조 불어본 후, 다시 거문고를 끼고 앉아 또 몇 곡조를 뜯었다. 만전은 그제야 나와 맞으며 "마침 몸이 좀 괴로워 자리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사또가 오신 것을 미처 몰랐군요." 하고 곧 술상을 차려 그를 대접하였다.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유쾌히 웃으며 그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만전이 청하는 바 몇 가지 일을 처리해 주었더니, 만전은 또 다른 몇 가지를 청하는 것이었다. 그는 “내가 돌아가서 천천히 처리하겠으니 통지를 보내어 말씀하시지요.”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이에 만전이 통지를 보내자, 그는 관병들에게 명하여 통지를 꽁꽁 묶어 강물에 던져 버리게 했다. 뒤에 만전이 집권하였지만, 그가 워낙 곧고 청렴하여 감히 해칠 수가 없었다.
만전의 무리 통지를 잡아 죽이던 그 무렵 민간에 돌아다니는 도둑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고는 가끔 친히 옥(獄)을 검열해 보곤 했었는데, 하루는 옥에 갇힌 죄수들을 직접 실사해 나가는 중 문득 어떤 여자가, "아이구, 사또님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20여 년 전 사또께서 젊었을 적, 저의 아버님께서 사또께 부탁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을 기억하시겠습니까?" 하면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가 곰곰 기억을 더듬어 보니, 성 밖에 점 잘 치는 이가 있다고 하여 여러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갔던 일이 생각났다. 그 점치는 늙은이는 특히 그를 칭찬하더니,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딸을 불러내어 뜰아래에서 절을 하도록 하며, "이분은 뒷날 귀인이 될 것이요, 너는 이분의 은혜를 입을 때가 있을 것이니 잘 보아 두었다가 잊지 말아라." 했던 적이 있었다. 그가 놀라 여자에게, "아, 네가 그 점치던 영감의 딸이더냐?" 하고 곧 사실을 조사하여 그 여자가 억울한 것을 밝혀내어 풀어준 일도 있었다.
1255년에는 판사재사(判司宰事)가 되어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진사를 뽑았고, 1258년에는 몽고병이 북쪽 변방을 침입하자 북계지병마사(北界知兵馬事) 홍희(洪熙)가 여색만 탐하고 군무를 제대로 돌보지 않으므로, 나라에서는 그를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로 승진시켜 파견하였다. 그가 부임하여 군기를 엄히 세우고 민심을 추스르니, 서북 40여 성이 안도하게 되었다.
1260년에는 정당문학이부상서(政堂文學吏部尙書)에 오르고, 1261년에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서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자, 조정에서는 수(품계보다 직책이 높을 때 직함 앞에 ‘守’자를 붙인다.)태부중서시랑평장사(守太傅中書侍郎平章事)로 치사(致仕)토록 하고 오산군(鰲山君:鰲山은 지금의 淸道)에 봉하였다. 그의 무덤은 청도에 있으며, 시호는 영헌(英憲)이다. 조선 숙종조(肅宗朝)에 남계서원 (南溪書院)에 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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