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60)
이규보가 극진히 대하였던 화가 안치민(安置民)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1. 慶尙道 慶州府 寓居 條]
이 웅 재
『신증동국여지승람』권21, 경상도 경주부 우거 조와 『동국이상국집』 권12, 고율시(古律詩) 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볼 수가 있다.
“안치민(安置民)의 자는 순지(淳之)이고, 호는 기암(棄菴)이다.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이규보(李奎報)가 정동성(征東省) 막료(幕僚)로 있을 때에 시를 지어 보냈는데, 그 시(「迴安處士置民詩卷 [在軍幕]」)에,
‘고아한 정취 황정견(黃庭堅: 송나라 때 시인)의 시보다 낫고
풍부한 문장 유자후(柳子厚: 당나라 때의 柳宗元)의 풍도 남아 있네.
다만 한하건대 나라를 빛내는(한림원 등에 벼슬하여 외교와 관련된 문장 따위를 짓는 일)솜씨가 되지 못하고서
마치 풀 속에서 읊조리는 가을벌레 같고녀.’
라 하였다.”
또 최자(崔滋)의 『속파한집서(續破閑集序)』를 보면, “안순지(安淳之)는 다 금석(金石)에 그 글이 기록되어 있어 달과 별이 서로 찬란하게 빛나듯 하니 한의 문과 당의 시가 이즈음에 전성이었다.”라고도 하였다.
사실 그는 당시의 이름난 화가였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그는 벼슬을 하지 않았으므로 생몰연대마저도 명확하지가 않다. 따라서 그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최고 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글 등을 통해서 생생하게 살아있다. 뿐만 아니라 해좌칠현(海左七賢)의 좌장격인 오세재(吳世才, 1133~?)는 그가 살고 있는 경주에 찾아가서 거기에서 죽었을 정도임을 보면, 당대의 문인이나 화가들 중에서는 대단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런 점들을 상고하여 보면 그는 아마도 오세재와 비슷한 연배이며, 이규보보다는 상당히 연상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동문선』 제60권 서(書)에 나오는, 이규보가 군중(軍中)에서 안치민에게 답하는 편지(「軍中答安處士置民手書」)를 보면 그에 대한 면모를 개략적이나마 알 수가 있기에, 그 글을 살펴보기로 한다.
모월 모일에 모(某)는 아룁니다. 제가 서울에 있을 때부터 처사(處事)의 이름을 들은 지가 무척 오래되었사오나 길이 천 리나 떨어져 있어 서로 만나 볼 수가 없었으므로, 다만 간절히 생각만 하고 있던 차에 지난해 11월 동쪽을 정벌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종군(從軍)한다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지만 처사(處士)를 만나 보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앞으로 만날 날이 있을 줄 알면서도 다만 이 도회(都會)에 난리가 치열한데 잘 계시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어 그것이 걱정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 후 도회(都會)에 들어오자 시급히 만나 뵙고 싶었으나, 군문(軍門)은 굳게 잠겨 있고 수하(誰何)가 매우 엄중했으며, 또한 처사께서는 이 도회의 사람이니, 만약에 서로 만난다면 군중(軍中)에서 의심하는 자가 있을까 걱정이 되어 감히 만나 뵙지 못했었습니다.
어제 군막(軍幕) 안의 첨판(簽判) 박 낭중(朴郞中)이 거처하는 곳에서 처사께서 마침 박공(朴公)과 이야기하실 때 마주쳤는데, 제가 평소에 안면이 없었으나 그 수염과 머리카락이 흰 것과, 치의(緇衣·僧服)ㆍ치관(緇冠·僧冠) 차림을 한 모습이 마치 세상에서 그린 도객(道客)이나 거사(居士) 같아서 곧 스스로 알아차리고 함자(銜字)를 묻지 않았으며, 무릎을 마주대고 담화하기를 마치 전에 마음껏 같이 서로 놀던 처지처럼 하여, 한두 가지 일에 대해서는 대략 상세한 일까지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에 포지사(浦池寺)에서 박공(朴公)과 함께 있을 때 특별히 처사를 맞이하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조용히 이야기하며 각기 시(詩) 몇 편을 지은 다음 헤어졌었는데, 제가 이틀 동안 만나 뵌 것이 자못 지난날에 연연히 쌓였던 회포를 위로할 수가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글월을 올려 깊이 우러르고 공경(恭敬)하는 뜻을 펴고자 하면서도 지금까지 미루다가 미처 못 하였는데, 문득 이달 모일(某日)에 보내주신 편지 여러 폭을 받아 보니, 말씀마다 고상(高爽)하여 표표(飄飄)히 날아가듯 구름을 능가하는 기운이 있었습니다. 제가 보고 난 후에 참으로 선풍(仙風) 도운(道韻)이 있음을 알고 탄복하고 절도(絶倒)했으며, 지난번 것과 비교해 볼 때 깊은 맛을 더하였고 감사함을 느낀 것도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다만 글 가운데에서 저를 이태백(李太白)에 비유하셨는데 이태백은 천인(天人)이라 그의 말은 모두 하늘 신선의 말이라, 제가 비록 정신과 생각을 몽땅 소모하여 백일(百日) 만에 비로소 한 수의 시를 얻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이적선(李謫仙)이 만취(滿醉)하여 잠깐 사이에 부른 한마디의 말과는 비슷하지도 못할 것이니, 처사(處士)께서는 저에게 잠깐 동안도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까? 어찌 과분한 말씀으로 장차 제 평생의 안중에도 차지 못할 조그마한 복마저 날려 보내려고 하십니까?…
저는 태백과 비유해 볼 때 멀리 떨어진 것이 마치 하늘과 땅의 차이 같은데 처사께서 방불하다 하오니, 이는 심히 지나친 것이오며, 마치 저를 속여서 희롱하려는 것 같으니, 제 마음에 조금은 원망이 없지도 않습니다. 겸해서 깨우쳐 주신 도적을 잡는 일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이미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니, 제 어찌 가볍게 누설하겠습니까?…
박 첨판(朴簽判)이 저와 함께 불국사에 가서 놀기로 약속하였는데 처사께서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그 고장에는 아름다운 강산이 많고 또 적병(賊兵)의 침략이 조금 그치었으니, 마땅히 처사와 더불어 평복 차림으로 유람을 하면서 때로는 글을 지어 읊기도 하면서 조금이나마 답답한 마음을 풀어보도록 하십시다. 군중(軍中)에서 저에게 후히 대해 주던 아무개는 저와 처사가 교유한다는 말을 듣고 비단을 보내와서 묵죽(墨竹)을 구하는 것이 심히 은근하니, 저를 위하여 한번 그려 주실 수 있으신지요?
나머지 말씀은 만나서 하기로 하고 할 말 다 못하고 이만 재배(再拜)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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