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 힐빙, 그리고 웰다잉
이 웅 재
“‘뚱이’는 일주일에 3번, 1시간씩 물 위를 걷는다. 수조 안에 설치된 특수 러닝머신 위를 구른다. 몸이 물에 반쯤 잠긴 체 하는 걷기 물리치료다. 애완견 '뚱이'는 퇴행성 무릎 관절염을 앓아서 운동부족 상태다. 물속 육상 훈련을 통해 하체 근육을 단련하는 중이다.”
조선일보 2012.02.14.자 김철중 의학전문기자의 ‘…애완견 노령화’란 글의 서두 부분이다. 글을 좀더 따라가 보자.
“최근에는 줄기세포 치료도 받았다. 자기 몸속의 줄기세포를 실험실에서 증폭시켜 다시 이식받아 활력을 늘리는 치료다. 1회 비용이 100여만 원이다.”
‘웰빙’, ‘웰빙’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많이 들었다. 중앙대학교 박헌렬 교수는 “단순히 잘 먹고 잘사는 ‘웰빙’이라는 개념은 이제 ‘힐빙(Heal-Being)’으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기적인 관리를 통해서 온갖 공해요소들로부터 침해를 받은 인체를 회복시키고 치유하여 활기차고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철중 기자의 글을 보니 이제는 사람뿐만 아니라 애완견마저도 ‘힐빙’ 시대에 접어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힐빙’까지도 애완동물들에게 물려주고 나면 우리 인간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마지막으로 남은 것 중 하나가 ‘웰다잉(Well Dying)’이 아닐까 싶다. 고령화사회로 접어들면서 유행되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9988234’, 99살까지 88하게 살다가 23일 앓고 4[死; 죽자]는 말이다. 그게 요새는 또 ‘9988124’로 조금 바뀌었다. 그것은 점차 ‘웰다잉’에 대한 기대치가 상승되어 가고 있다는 말은 아닐까?
생명체는 반드시 죽게 마련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앞으로 죽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 과연 어느 것이 더욱 중요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판가름이 나질 않는다.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다. ‘생사가판(生死可判: 사느냐 죽느냐를 능히 판단함)=사생가판(死生可判)’처럼 서로 바꾸어도 뜻에 별 차이가 없는 말로서는 ‘생사관두(生死關頭: 죽고 사는 것이 달린 매우 위태로운 고비)=사생관두(死生關頭)’, ‘생사존망(生死存亡: 살아서 존재하는 것과 죽어서 없어지는 것)=사생존망(死生存亡)’, 같은 의미의 ‘생사존몰(生死存沒)=사생존몰(死生存沒)’ 등이 있어서 피장파장이었다. ‘생사경(生死境)=사경(死境)’도 같은 범주로 치부할 수 있을 듯했다.
그래서 바꿔치기를 할 수 없는 말들을 찾아보았다.
‘생사대해(生死大海)=생사고해(生死苦海)’, ‘생사유전(生死流轉)’, ‘생사육골(生死肉骨: 죽은 사람을 살려 내어 뼈에 살을 붙인다는 뜻으로, 큰 은혜를 베풂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생사골육(生死骨肉)’, ‘생사입판(生死立判: 사느냐 죽느냐가 당장에 결정됨)’ 등 여섯 개의 낱말은 ‘생(生)’이 먼저였다.
다음 ‘사(死)’가 앞에 나오는 말들을 찾아보았다.
‘사생(死生)=사명(死命)’, ‘사생결단(死生決斷)’, ‘사생계활(死生契闊: 죽고 사는 것을 같이하기로 약속하고 동고동락함)’, ‘사생동고(死生同苦: 죽고 사는 고생을 함께한다는 뜻으로, 어떤 어려움도 같이함을 이르는 말. )≒사지동고(死地同苦)’, ‘사생유명(死生有命: 죽고 사는 것이 운명에 달려 있다는 뜻으로,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 등으로 일곱 개, ‘死’쪽이 오히려 하나가 더 많았다.
그 이외에도 ‘생사(生死)를 확인할 길이 없다’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과 같이 ‘생(生)’ 이 먼저 나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살생부(殺生簿)’, ‘사생간(死生間)에’와 같이 ‘죽음’이 먼저 나오는 말도 있었다. 좀더 찾아보면 또 여러 가지 낱말이나 관용구들이 있겠지만 언어를 통해서 본 ‘삶’과 ‘죽음’은 거의 대등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웰빙’, ‘힐빙’에 대한 노력은 계속해야 한다. 농작물을 해치는 진딧물을 죽이기 위해서 농약을 뿌리는 일은 ‘힐빙’을 해치는 행위이다. 농약 대신 무당벌레를 키우자. 무당벌레는 진딧물의 천적이다. 무당벌레도 한국산 무당벌레가 더욱 효과적이다. 유럽산 무당벌레는 하루에 진딧물 70마리를 잡아먹는 데 비해, 국산 무당벌레는 100마리 이상을 잡아먹는다. 무당벌레를 대량으로 길러 방생하는 일도 ‘웰빙’을 위한 훌륭한 노력이라 할 수가 있겠다.
그러나 ‘웰다잉’이 더욱 중요할 수도 있다. 아직은 그 방법이 널리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하지만, 소생의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 산소호흡기 등 의료기기를 사용한 부자연한 생명 연장과 같은 일은 분명 ‘웰다잉’이라고 할 수가 없을 듯하다. 그래서 우선은 보건복지부 지정 생명윤리정책연구센터에서 벌이고 있는 ‘사전의료의향서’ 같은 것을 신청하여 그 확인증(카드)을 항시 휴대하는 일 따위로부터 ‘웰다잉’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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