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해, 지구, 과학의 발달

‘억지로’가 아닌 ‘저절로’, ‘스스로’

거북이3 2013. 5. 28.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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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지로’가 아닌 ‘저절로’, ‘스스로’

                                                                                                                                                                       이 웅 재

겨울의 땅은 단단했다. 연약한 새싹 하나가 그 단단한 지표면을 뚫고 힘들게 솟아오른다. 이어서 또 하나, 다시 하나…그렇게 하여 숲이 이루어졌다. 숲은 산을 기름지게 했다. 보기에도 좋았다. 산과 산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다. 골짜기에는 졸졸졸 물이 흐르고 있었다. 자연은 그렇게 해서 하나의 풍경을 이루었다.

사람의 인총이 많아지자 주거용 가옥이 모자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이쪽에도 아파트, 저쪽에도 아파트…그렇게 하여 아파트 숲이 이루어졌다. 이쪽 아파트와 저쪽 아파트 사이에는 널찍하고 시원한 포장도로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 도로로 많은 사람들과 자동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인파(人波)가 넘쳐난다고 하고, 자동차가 홍수(洪水)를 이루고 있다고 표현하고들 있다.

아파트 숲, 인파, 자동차의 홍수…. 그것은 또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풍경1과 풍경2는 꽤나 닮은꼴이라는 생각이다. 그렇다. 가장 현대적이고 제일 과학적인 것도 알고 보면 자연의 모습을 빼닮은 것이다. 모든 기본 설계도는 자연에 있는 것이다. 자연은 현대 문명의 위대한 스승이다. ‘자연’을 제외하면 ‘현대’는, ‘과학’은 설 자리가 없다.

‘自然’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라고 한다. 한자의 뜻으로 직접 풀이해 보자. ‘自然’의 훈음(訓音)은 스스로 자, 그럴 연. 그러니까 ‘자연’이란 ‘스스로 그러한 것’, ‘저절로 그러한 것’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말하자면 ‘억지로’가 아닌 것이 ‘자연’이다.

골짜기를 흐르는 물, 물의 천성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를 제1의로 삼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흐름으로 형상화가 된다. 막히면 멈추었다가 다시 사정이 호전되면 ‘1박2일’의 긴장감을 의식하면서 스르르 ‘물 흐르듯’ 자연스레 흘러간다.

『물의 세계사』(스티븐 솔로몬, 주경철·안민석 옮김, 민음사)에서 스티븐 솔로몬은 말했다. 인류 문명은 ‘물에 대항하는(against)’ 역사로 시작됐다고. 그리고 ‘물과 함께(with) 하는’ 것으로 문명은 성장했다고 했다. 이제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를 해야 한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인류는 지속가능한 성장과 생태계 균형을 위해 ‘물을 위하여(for)’ 살아갈 시기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물을 사랑해야 한다. 물이 없으면 공기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아니 모든 생명체들은 살아갈 수가 없다. 지구상의 70%는 물이다. 우리의 몸도 70%가 물이다. 지구를 살리려면, 우리가 살아가려면, 물을 소중히 여기고 물을 위하여 살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물을 닮아야 한다. 노자에서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물을 거역하고 있다.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물의 속성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다. 골짜기에서 졸졸졸 흐르는 물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만 흐른다. 일방통행이다. 순행(順行)만을 하면서, 최대한으로 제 몸을 낮추는 것이 물이다. 그런데 인간은 어떠한가?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의 포장도로에는 인파도 자동차의 홍수도 쌍방통행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물의 속성과는 정면으로 어그러지는 역행(逆行)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 세계에서는 사기, 강도, 살인 등의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저절로 그러함’이라고 했다. 인간처럼 의도적 행위를 하고 있지 않은 식물들도 저절로 환경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도록 ‘저절로 그러함’을 지향한다. 층층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관목 산딸나무는 꽃이 너무 작아 벌이나 나비가 찾아오기가 힘드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각각의 주장을 버리고 작은 꽃들은 서로 협력하여 공처럼 동그랗게 모였고, 그것도 모자라 꽃차례를 싸고 있는 포(苞)라는 부분을 희고 큰 꽃잎처럼 보이도록 변화하고 있다. ‘저절로 그러함’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스컹크’가 악취 나는 화학물질을 내뿜는 일과도 별반 다르지 않은 식물들의 ‘타감작용(他感作用)’도 ‘저절로 그러함’을 수행하고 있는 일이다. 허브나 제라늄과 같은 화초의 방향(芳香), 마늘의 항균성 물질인 알리신(allicin), 토마토 밭에 질경이가 나지 못하는 것, 소나무 아래에서 대부분의 풀들이 자라지 못하는 일,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저절로 그러함’에서 생기는 현상들이다.

근래에 삼림욕이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피톤치드(Phytoncide) 때문이라고 한다. 피톤치드란 ‘식물’(Phyton)과 ‘죽이다’(Cide)를 뜻하는 그리스어의 합성어로서 자기 방어를 위해서 공기 중에 내뿜는 살균성 물질을 총칭하는 용어인데, 그것이 사람의 몸에는 무척 이롭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저절로 그러함’ 곧 ‘자연’적인 현상이다. 민들레, 질경이 등 로제트(rosette)형 식물들의 특성도 ‘자연’적인 것이다.

‘억지로’가 아닌 ‘저절로’, ‘스스로’, ‘자연’적인 것으로서의 건강 회복, 인성 회복, 그것이 ‘힐링(Healing)+웰빙(wellbing)’ 곧 ‘힐빙(Healbing)’이랄 수가 있겠다. 힐빙의 개념 속에는 ‘억지로’가 아닌 것, ‘저절로’, ‘스스로’, ‘자연’적인 것이면 모두가 다 포함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음악, 미술, 문학, 연극, 영화 등의 순수한 인간의 감성을 변화시켜 줄 수 있는, 우리들이 ‘예술’이라고 지칭하는 모든 장르를 통한 감정의 순화에 의한 치료도 ‘힐빙’의 범주 안에 속함은 물론이다.

                                                                                                                                (2013.5.27. 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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