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64) 계룡산 천도를 반대하고 .hwp
경북 인물열전 (64)
계룡산 천도를 반대하고 한양 천도를 주장하여 관철시킨 하륜(河崙)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5. 慶尙道 榮川郡 名宦 條]
이 웅 재
하륜(河崙1347-1416)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요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자(字)는 대림(大臨), 호(號)는 호정(浩亭)이고, 본관은 진주(晋州), 순흥부사(順興府使) 하윤린(河允麟)의 아들이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제자이다. 그는 조선조 건국의 원훈(元勳)이기도 하다.
1360년(공민왕 9) 국자감시(國子監試), 1365년 문과에 각각 합격하였다. 당시 시험관이던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은 그의 사람됨을 보고 아우 이인미(李仁美)의 딸과 결혼시켰다. 1367년에 춘추관검열 등을 거쳐, 1368년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으나 이듬해 당시 권력자 신돈(辛旽)의 비행을 공박하다가 파직되었다가, 1371년 신돈이 사형당하자 복직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대사성(大司成) 등의 관직을 지내고, 1380년(우왕 6)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3년상을 마친 뒤에 우부대언 등을 거쳐, 1385년에는 명나라 사신 주탁(周卓) 등을 서북면에서 영접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1388년 최영(崔瑩)이 요동(遼東)을 공격할 때에는 이를 반대하다가 양주(襄州:지금의 양양군)로 유배되었으나 위화도 회군 이후 복관되었다. 그해 가을 영흥군 왕환(永興君王環)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을 때에는 그가 가짜임을 밝혔는데 도리어 지방으로 추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윤이(尹彛)·이초(李初)의 변이 일어나게 되면서, 의혹은 풀려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었다.
조선왕조가 건국되면서 그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우선 계룡산 천도(遷都)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중지시켰으며 한양 천도를 주장하여 관철시키면서 1394년(태조 3)에는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가 되었는데,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는 바람에 사직을 하였다.
그러나 곧 다시 부름을 받아 예문춘추관 학사가 되었고, 그때 마침 명나라 태조(太祖)가 표전문(表箋文)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문책을 하자 표를 지었던 정도전(鄭道傳)을 명나라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여 정도전과 반목하기도 하였는데, 명나라에서 그 글을 지은 정도전을 소환하자 그를 대신하여 스스로 명나라에 들어가 일의 전말을 상세히 보고하여 명태조의 오해를 푸는 등 그 후에도 명나라에 자주 왕래하면서 외교에 공이 컸다.
하지만, 정도전의 미움으로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좌천되었고, 더구나 그때 항복한 왜인을 도망치게 했다 하여 또다시 좌천되었다가 얼마 뒤 충청도 도순찰사가 되었다.
1398년(태조 7)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이방원(李芳遠)을 적극 지지하여 공을 세우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진,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으로 진산군(晋山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우정승(右政丞)이 되었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 다시 방원을 도왔고, 이 해 명나라 태조가 죽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명나라에 가서 정종의 왕위계승을 승인받아 귀국,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을 거쳐 진산백(晋山伯)에 봉하여졌다.
이 해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영삼사사(領三司事)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관제를 개혁하였으며, 영사평부사 겸 판호조사(領司評府事兼判戶曹事)로서 저화(楮貨)를 유통시키게 하였다.
1402년에 의정부좌정승이 되어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를 겸임하였으며, 등극사(登極使)로서 명나라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고 조선왕조의 완전한 인준을 표하는 고명인장(誥命印章)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또 권근, 이첨과 함께 『삼국사략(三國史略)』을 편찬하였으며, 1409년(태종 9)에는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1405년에는 좌정승 세자사(世子師)가 되고, 다음해에는 중시독권관(重試讀券官)이 되어 변계량(卞季良) 등 10인을 뽑았다.
1416년에 70세로 치사(致仕)하였고, 치사한 뒤에도 왕명을 받아 노구를 이끌고 함길도(咸吉道)에 있는 선왕(先王)의 능침(陵寢)을 순심(巡審)하고 돌아오는 중 정평군아(定平郡衙)에서 죽었다.
그는 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것을 이용하여 인사청탁을 많이 받는 한편, 통진 고양포(高陽浦)의 간척지 200여 섬지기를 농장으로 착복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공신이라 하여 묵인되기도 하였다.
『동국여지승람』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혜리원(惠利院)」조에는 그가 지은 서문(序文)이 소개되어 있다.
… 내가 경오년 봄에 울주(蔚州)에 가려는데, 길이 경주의 성남(城南)을 지나게 되어 천왕사(天王寺)에서 유숙하였다.… 그 90리의 길을 왕래하는 사이에 추위와 더위와 비오는 때와, 혹은 날이 저물었을 때에 머물러 쉴 곳이 없었다. 도둑도 염려되고 맹수도 두려워서 신음하고 불안해하면서 수풀 속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또 천왕사에서 자게 되었는데, 나그네들과 수졸(戍卒)들의 길 다니는 어려움에 말이 미치게 되었다. …상인이 만면에 희색을 띠며 말하기를, ‘나의 원사가 이미 낙성하였습니다. 그때 그대는 바야흐로 중국에 가게 되었으므로 감히 청하지 못하였고, 양촌(陽村) 권(權)공이 이미 기를 써 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원(院)의 이름을 짓지 못하였으니, 부디 그대는 이름을 지어 주셔서 나의 원사를 빛나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이에 명명(命名)하여 혜리원(惠利院)이라 하고, 이어 그 전후에 서로 이야기한 것을 차례로 적어서 서문(序文)을 짓는다.” 하였다.
인품이 중후, 침착, 대범하였으며,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음양(陰陽)·의술(醫術)·성경(星經)·지리(地理)에도 능통하여 조선조 초기의 성리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로 있을 적에는 『태조실록(太祖實錄)』의 편찬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문집 『호정집(浩亭集)』이 있다. 후대에 그를 한나라의 장자방(張子房:張良), 송나라의 치규(稚圭)라 일컫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2012.3.28. 원고지 16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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