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물열전

경북 인물열전 (66) 정도전을 이은 조선조 초기의 문학 담당자 권근(權近)

거북이3 2012. 12. 29.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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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인물열전 (66)

 

          정도전을 이은 조선조 초기의 문학 담당자 권근(權近)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4. 慶尙道 安東大都護府 人物 條]

 

 

                                                                                                                                                이 웅 재

 

 

권근(權近: 1352-1409)는 고려말 조선초의 학자이며 문신이다. 본관은 영가(永嘉: 안동의 옛 이름), 어렸을 때 이름은 진(晉), 자는 가원(可遠)·사숙(思淑), 호는 양촌(陽村),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공민왕 원년에 출생하였고, 아버지는 검교 좌정승(檢校左政丞) 권희(權僖)이며, 국재(菊齋) 권부(權溥)의 증손이다. 네 차례에 걸쳐 부인을 얻었으니, 처복(妻福)은 크지 않았다고 할 수가 있겠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다.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그의 수제자인 정몽주(鄭夢周)에게서도 배웠다. 공민왕 때, 18세에 병과 제2인으로 급제하여 관계에 나아가 친명파에 가담하였고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밀직(密直)에 이르렀다. 고려 말에는 탄핵되어 충주(忠州)의 양촌(陽村)에 귀양 가서 살게 되어 양촌을 호로 삼았다고 한다.

이개(李塏)가 찬술한 권근의 신도비문(神道碑文)에 의하면, 권근의 묘지는 원래 경기도 광주(廣州) 오포(五浦)에 있었는데 후에 충주(忠州)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비문은 왕명에 의하여 지어졌다는 점으로 미루어 당시 국왕이었던 세종(世宗)의 특별한 배려가 있었던 것 같다고 하였다. 안동 권씨는 원조가 김행(金幸)이었는데 고려 태조를 도운 공으로 권씨를 하사받았던 데에서 시작하여 한 일가에 9명이 봉군(封君)되기에 이를 정도로 매우 번성한 집안이라고 하였다.

조선이 개국되자 1393년 왕의 부름을 받고 계룡산(鷄龍山)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 천감(天監), 화산(華山) 등을 짓고, 왕명으로 태조의 아버지인 환조(桓祖)의 비문을 지었다.

이후 새 왕조에 출사하여 예문관춘추학사(藝文館春秋學士) 겸 대사성·중추원사 등을 지냈다. 명 나라의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우리나라에서 보낸 표전(表箋)의 말에 희롱하고 모욕하는 글자가 있다고 화를 내어 표문을 지은 정도전(鄭道傳)을 소환하였다. 정도전이 병을 칭탁하고 가지 아니하자 태조가 난처하게 여기었다. 이에 권근이, “이 표(表)는 신이 정총(鄭摠)과 더불어 윤색(潤色)하였습니다. 신이 가서 변명하겠습니다.” 하니, 태조가, “경에게는 노부모가 있기도 하고 불러들이라는 황명도 없었으니 반드시 갈 필요는 없다.”라고 말하였지만, 공이 굳이 가기를 청하였다.

공이 압록강을 건널 즈음 사신(使臣) 송패라(宋孛羅)가 여러 재상들과 입대할 때에 할 말들을 두루 물었으나 공에게는 미치지 아니하였다. 공이 가로되 “대인께서는 어찌 유독 나하고는 의논을 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으니, 송패라는 낯빛을 고쳐 말하기를 “우리 황상께서는 사람의 충직함을 보시면 비록 죄가 있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풀어 주십니다. 지금 그대가 불러들이라는 명령이 없었는데도 스스로 가니, 충신이므로 황제께서도 결코 물으심이 없을 것인즉 그대가 또한 어찌 대답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금릉(金陵)에 도착하여 황제에게 아뢰기를, “우리나라가 사대(事大)하는 데 있어서 표전(表箋)을 쓰지 않을 수 없는데, 신 등이 해외(海外)에 생장(生長)하여 배운 것이 표전 쓰는 방법에 능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 임금의 충성을 명백하게 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신들의 잘못일 뿐, 우리 임금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하니 황제가, “옳다.” 하고 더 이상 문제삼지 아니하였다. 이듬해 봄에 황제의 칙서(勅書)를 받들고 우리나라에 돌아왔다.

이렇게 명나라에 들어가 두 나라의 관계를 호전시켰으나, 정도전 일파의 시기로 불안한 위치에 있게 되었다. 1398년 정도전 일파가 숙청되자,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거쳐 대사헌을 지내고, 오랜 폐단이었던 사병(私兵)의 폐지를 주장하여 왕권확립에 큰 공을 세웠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으로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고, 대사성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거쳐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이사(貳師) 등을 역임하였고, 왕명으로 하륜(河崙) 등과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조동일(趙東一)에 의하면 그는, “고려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왕조를 이룩할 것인가 하는 싸움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일단 이색이나 이숭인과 함께 구속되었다가 풀려났다. 이성계가 태조로서 왕위에 오를 때에는 시골에 우거하고 있었다. 그대로 머물렀더라면 고려를 위해서 충절을 지킨 사람이라고 평가되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평이 후대에 이따금씩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태조를 찾아가 건국을 칭송하는 노래를 바치고 노선 전환을 했다.…태조 때는 정도전의 시대였다면, 태종 때는 권근의 시대였다. 태종은 정권을 잡고 권근을 중요시했다.”고 했다.(조동일, 한국문학통사2, 지식산업사, 1983.9.17. p.247.)

조동일은 이어서 “정도전 다음에는 권근이, 권근 다음에는 변계량이 문학을 좌우하는 거물이었다.”고 기술하였다.(상동, p.257.)

문장에 뛰어났으며, 경학(經學)에도 밝아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구결(口訣)을 정하였다. 또한 그의 『입학도설(入學圖說)』은 후일 이황(李滉) 등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이황의 사단칠정론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학문을 하려면 마땅히 뜻을 세우는 것이 먼저이니 뜻이 서지 않으면 만 권의 책을 읽은들 무슨 이익이 있을 것인가.”라 하였고 또, “내가 대학을 읽음에 읽기를 오래하고서야 그 뜻에 의문이 없어졌었는데, 다시 읽기를 오래하니 구절구절마다 의문이 생기었고, 또 읽기를 오래하니 조금씩 탁 트여 관통되더라.”라고 하였다.

문집 『양촌집(陽村集)』40권 외에 저서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사서오경구결(四書五經口訣)』,『동현사략(東賢事略)』이 있고, 작품에 조선의 문물을 찬양한「상대별곡(霜臺別曲)」이 있다. (2012.12.25. 원고지 17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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