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제방(百花齊放) 6(복숭아꽃,살구꽃)
이 웅 재
이제 산수유 꽃이나 매화꽃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개나리, 벚꽃도 거의 져 가고 있다. 아쉽다.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님이 떠나가는 것 같다. 3월이 다 가도록 그렇게도 오기 싫어하더니, 4월도 가기 전에 떠나려 하는 봄 아가씨가 한 대 쥐어박고 싶도록 얄밉다. 허전하다. 백화제방(百花齊放)의 뿌듯한 기쁨이 사라져 가는 듯한 느낌에 울컥 서러움이 몰려온다. 발걸음을 돌려 아파트로 향한다. 아, 그런데 아파트 한쪽 모퉁이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기척이 있다. 조심조심 다가가 보니 바로 복숭아꽃이 피어 있는 것이 아닌가? 내 어찌 복숭아꽃을 모른 척할 수가 있으랴? 그래서 ‘제방(齊放)’은 아니지만, 꽃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했다.
‘복숭아꽃’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아마도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아닐까 싶다. 동진(東晋) 때의 시인 도잠(陶潛: 字는 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이상향 말이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付岩洞)에는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집터인 무계정사(武溪精舍)가 있다. 안평대군이 무릉도원에서 노닌 꿈을 꾸고, 화가 안견(安堅)에게 꿈에 본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의뢰했던 곳이다. 안견은 백련동(白蓮洞)에서 부암동으로 내려오는 골짜기 무계동(武溪洞)을 배경으로 3일 만에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그렸다고 한다.
무릉도원을 읊은 한시(漢詩)도 있다. 유명한 이태백(李太白)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이 그것이다.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무슨 일로 청산에 사느냐 묻는다면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웃으며 대답하지 아니하고 마음만 스스로 한가하겠노라.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복숭아꽃이 물결에 흘러 아득하게 떠가니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인간세계가 아닌 별천지가 여기 있구나.(필자 역)
복숭아는 무릉도원을 비롯하여 신선세계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신화 속에서는 10개나 되는 해 중에 9개를 쏘아 떨어뜨린 유궁후(有窮后: 善射者 곧 名弓이라는 의미) 예(羿)가 서왕모(西王母)에게서 3천 년에 한 번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는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천도(天桃) 복숭아를 얻어다가 냉장고(?)에 고이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 아내인 항아(姮娥. 嫦娥라고도 한다.)가 이게 웬 떡이냐(아니, 웬 복숭아냐) 하고 홀랑 먹어버린 후, 나중에 그러한 사정을 알게 되고는 그냥 있다가는 도저히 살아남을 것 같지가 않아서 달나라로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았다는 것이다. 그 아내는 지금도 달나라에서 토끼와 함께 방아를 찧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던가? 월궁항아(月宮姮娥)란 말은 그래서 생긴 것인데, 지금쯤 유궁후 예도 그런 소문을 들었을 터이니 항아의 존망(存亡)이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그래서일까? 복숭아꽃의 꽃말이 ‘용서(容恕)’란다.
‘복숭아’ 하면 또 생각나는 말이 있다. 도화살(桃花煞)이다. 색기(色氣)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화살이 있는 사람은 유흥업이나 연예인 등 화려한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무슨 뚜렷한 근거가 있는 얘기가 아니니까 ‘믿거나 말거나’다. 복숭아는 사투리인 ‘복사’라고 해야 보다 정감이 뚝뚝 듣는다. 부천에 가면 ‘복사골문학회’가 있어, 이름만 들어도 친근감이 묻어난다.
‘복숭아꽃’ 하면 생각나는 말이 또 있다. 바로 ‘살구꽃’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이원수(李元壽) 작사 홍난파(洪蘭坡) 작곡의 ‘고향의 봄’이란 노래다. 살구꽃은 그래서 ‘고향의 꽃’이다. 이호우(李鎬雨)의 ‘살구꽃 핀 마을’은 그래서 고향마을이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 없는 밤을 꽃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은 초당(草堂)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살구꽃 핀 마을’은 수줍은 아가씨가 나와서 반겨줄 것만 같은 마을이다. ‘아가씨의 수줍음’이라는 꽃말처럼.
살구꽃과 관련된 옛날 일화도 있다. 삼국지의 영웅 조조(曹操)가 뜰에 심어놓은 살구나무에 살구가 주렁주렁 달려 애지중지했는데, 어찌된 셈인지 매일 열매가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서 하인들을 모두 모이게 하고서는 이 맛없는 개살구나무를 베어 버리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한 놈이 “이 살구는 맛이 좋은데 참말로 아깝습니다.”라고 하였단다. 살구를 몰래 따 가는 도둑은 그런 방법으로 잡을 일이다.
복숭아꽃과 살구꽃 덕분에 기분이 좋아져서 집으로 들어가려던 발걸음을 다시 탄천으로 돌렸다. 언제라도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어주는 탄천 산책길로 접어드니, 청둥오리가 날아간다. 왜가리도 질세라 그 뒤를 따르더니 빙글 타원을 그리며 강가 수풀에 내려앉는다. 학교가 파하였는지 싱그러운 웃음을 흩날리며 여학생들이 한 떼 몰려 지나간다. 그녀들의 종아리가 신선하다. 선 머슴애들도 왁자지껄 시끄럽게 떠들며 몰려간다. 활기가 넘친다. 비교적 널따란 냇물에는 팔뚝만한 잉어들이 유유히 헤엄친다. 지난여름 장마 때에는 물이 들었다 난 자리에 미처 빠져버리는 물길 따라 냇물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어른 손바닥 두 개 정도 크기의 자라 한 마리가 굼실대는 것도 보였었다. 사람들이 조심스레 잡아서 냇물에 놓아주고 있었다. 세상이 두 배 정도는 아름다워졌을 것이다. (2012.5.1. 원고지 15매)
'계절의 문턱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화제방(百花齊放) 8(토끼풀,괭이밥[오이풀]) (0) | 2012.05.06 |
---|---|
백화제방(百花齊放) 7([유채꽃]장다리꽃,애기똥풀) (0) | 2012.05.03 |
백화제방(百花齊放) 5(꽃다지,냉이꽃,쇠뜨기) (0) | 2012.04.29 |
백화제방(百花齊放) 4(조팝나무,제비꽃,민들레) (0) | 2012.04.29 |
백화제방(百花齊放) 3(벚꽃,앵두꽃,산당화) (0) | 2012.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