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문턱에서

백화제방(百花齊放) 11(라일락,가막살나무)

거북이3 2012. 5. 14.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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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화제방(百花齊放) 11(라일락,가막살나무)

 

                                                                                                                                                                                                       이 웅 재

 

 

돌단풍에게 막말을 한번 하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였다. 아마 이제는 놈도 내가 물을 주는 날짜를 계산에 넣어줄 것이다. 발걸음이 저절로 가볍다. 아파트 현관 근처에 다다랐더니 어디서 향긋한 냄새가 내 코를 잡아끈다. 냄새, 아, 이때는 ‘냄새’보다는 ‘내음’이라는 표현이 그 어감상 훨 낳을 듯싶은데, 다행이었다. 작년 8월 31일자로 ‘내음’이라는 말이 표준어의 자격을 얻어서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내음의 발원지는 라일락이었다. 꽃의 모양이 정(丁)자형인데다가 향기가 뛰어나서 ‘정향(丁香)나무’라고도 한다. 진하지만 천박하지 않은 향기, 고고하면서도 오만하지 않은 향기, 사람을 끌어당기면서도 강제하지 않는 향기, 정녕 향기다운 향기라서 ‘정향(丁香)’인 것이다. 내한성(耐寒性) 및 내건성(耐乾性)이 강하고 공해라든가 병충해에도 강한 꽃나무이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하게 생긴 나무가 있는데, 무더기로 꽃이 피어 있는 모습이 수수이삭과 비슷하다고 해서 ‘수수꽃다리’라고 한다. 그래서 라일락은 ‘서양수수꽃다리’가 되었다. 영어로는 라일락(lilac), 프랑스어로는 리라(lilas)라고 한다. 노래 “베사메무쵸”의 가사에 나오는 ‘리라꽃’이 바로 라일락이다.

제주도에 갔을 때였다. 단일 건물로서는 동양최대의 사찰이라는 약천사(藥泉寺)엘 들렀는데, 이 절은 층수로 보아서는 3층에 불과하지만 법당은 아주 넓었다. 이 절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면 2층 회랑(回廊)의 바깥쪽 4면 벽에 108만 좌(座)의 불상이 진열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 불상들을 경이로운 눈으로 관찰하고 있는데, 아래층 법당에서 갑자기 군악대 연주소리가 들린다. 20-30여 명의 해군 복장 비슷한 제복을 입은 외국인들이 사람들마다 악기를 하나씩 들고 메고 연주회를 하고 있어 법당 안이 온통 각종의 악기 소리로 가득 찼다. 헌데, 그 노랫소리가 범패(梵唄)와는 사뭇 다른 무척이나 귀에 익은 대중적인 것이었다. ‘베사메 무쵸(Besame Mucho)’, 영어식으로 말하자면 ‘Kiss me much’의 스페인어 제목의 노래이다. 법당에서, 그것도 외국인이 ‘키스해 주세요, 많이많이’를 연주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독일의 국악팀이라 했다. 그리고 이런 연주는 가끔 볼 수 있는 일이란다. 법당도 이젠 많이 현대화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더랬다.

라일락은 뜻밖에도 서글픈 전설을 지니고 있는 꽃이다. 영국의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 ‘라일라’라는 예쁜 아가씨가 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청년이 있었는데, 결혼할 때까지는 서로 순결을 지키기로 약속을 하였더란다. 어느 날 라일라가 들판에서 꽃을 꺾고 있었는데, 망나니 목동 하나가 그녀의 순결을 빼앗았고, 그 충격으로 그녀는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져 자살을 하고야 말았다. 약혼자 청년은 그녀를 찾아 묻어주었고 무덤에 그녀가 평소 좋아하던 보랏빛의 예쁜 꽃을 한 무더기 가져다가 뿌려 주었는데, 이튿날 아침에 보니 꽃잎이 모두 하얗디하얀 빛깔로 변해 버렸다. 자신의 순결을 그렇게 표현하였던 것이다. 이후 사람들은 그 꽃을 ‘라일락’이라고 했다고 한다. (http://blog.naver.com/yoonsookro에서 요약 인용)

2012년 일산 호수공원에서 개최된 세계꽃박람회에서는 이름도 생소한 미스김 라일락이 선보여서 이채로웠다고 한다. 1947년 미국 군정청 소속 식물 채집가였던 Elwin M. Meader가 삼각산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던 수수꽃다리의 종자를 미국으로 가져가 개량해서 ‘미스김 라일락(Miss Kim Lilac, Syringa patula "Miss Kim")’이라는 품종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당시 식물자료 정리를 도왔던 한국인 타이피스트 미스 김의 성을 따서 붙인 명칭이라는데, 미국에서는 이 꽃이 아주 귀하게 여겨진다고 한다.

꽃말은 ‘첫사랑의 감격’ 또는 ‘젊은 날의 추억’이라는데, 첫사랑의 맛은 과연 어떤 것일까? 더할 수 없는 달콤함? 궁금하면 라일락 꽃잎을 따서 한번 씹어보면 아주 또렷이 알 수 있게 된다든가? 라일락 꽃잎의 맛? 아주 아주 쓰다는 것이다. 그 쓰디쓴 첫사랑의 맛도 젊은 날의 추억 속에서는 무척이나 감미로울 수가 있으리라. 5월 첫날의 라일락과의 만남은 그렇게 젊은 날을 돌아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이튿날, 산책을 위하여 ‘무잡모퉁이’를 돌아서 가려는데, 왼쪽으로 무더기무더기 꽃봉오리를 맺은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에는 ‘가막살나무’라는 명패가 달려 있었다.

가마귀골이라는 데서 태어난 ‘가마’는 세 살 되던 해에 졸지에 고아가 된다. 강 건너 읍내에 갔다 오는 길에 나룻배가 뒤집혀 버리는 바람에 아빠와 엄마가 그만 돌아가시고 만 것이다. 가마와 가마보다 한 살 많은 오빠는 각각 다른 곳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예쁜 처녀로 자라난 가마는 건장한 이웃집 머슴과 결혼하여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등 굽은 어떤 할머니가 하룻밤 자고 가면서 얘기해준 말에서, 오빠의 등에는 일곱 개의 점이 박혀 있고 이름을 칠성이라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청천벽력이었다. 그건 바로 남편이었던 것이다. 가마는 그만 병이 들어 앓다가 죽고야 말았다. 이듬해 가마의 무덤에서는 까맣게 속이 탄 나무에 한 송이 하얀 꽃이 피어났으니 그것이 곧 가막살나무라고 한다.(http://www.parkbongpal.com[박봉팔닷컴]에서 요약 인용)

가막살나무의 잔가지에는 털이 나 있다. 잎은 마주 나며, 역시 양면에는 별 모양의 털이 있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뭉텅이로 피는 꽃은 꼭 함박눈과도 같은 모양으로 소담스럽다. 열매는 둥글고 가을에 빨갛게 익는다. 어린 새들의 먹잇감으로 꼭 알맞은 크기이다. 크게 확대하여 보면 얼핏 홍시를 닮은 모양이다. 맛은 달콤하여 먹을 만하다.

꽃말은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란다. 며칠만 지나면 불륜이라는 죄책감으로 까맣게 속이 타도록 앓다가 죽은 가마의 마음이 ‘무잡모퉁이’를 하얗게 물들이며 피어날 것이다. (2012.5.14. 원고지 16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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