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제방(百花齊放) 12(찔레꽃,오동나무)
이 웅 재
가막살나무의 옆에는 찔레꽃 망울도 곧 터질 것처럼 탱탱하게 부풀어 있었다. 가시가 많아서 잘 찔린다고 해서 ‘찔레’라는 한국식 이름이 붙은 것을 보면, 그 원산지가 한국이라는 설이 믿을 만하다고 하겠다. 다른 이름으로는 야객(野客), 야장미(野薔薇), 들장미라고 하듯이 장미와 같은 과에 속해 있어서 잎이나 새순을 가지고는 장미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장미의 개량종을 만들 때에는 이 찔레에다가 접을 붙여서 만드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찔레의 어린 가지는 어렸을 적 껍질을 벗겨 먹기도 했고, 충분히 데쳐서 물기를 뺀 다음 장아찌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그 순(筍,笋)으로는 차[茶]를 만들어 마시면 좋다고 하였다.
내한성(耐寒性)과 내공해성(耐公害性)이 강하며, 돌무더기가 많은 양지 바른 곳에서 잘 자란다. 보통은 흰 꽃을 피워서 소박한 시골처녀를 연상하게 하는 꽃이지만, 향기는 의외로 강하다. 꽃잎은 5개, 꽃밥은 노란색이며, 잎 가장자리에는 톱니가 있다. 뿌리는 잘 타지 않아서 담배 파이프 만드는 재료로 쓰이기도 한다. 찔레꽃 전설은 서글프다.
고려 때 어느 시골에 아름답고 마음 착한 ‘찔레’라는 소녀와 동생 ‘달래’가 살고 있었다. 찔레는 공녀(貢女)로 원나라에 끌려갔는데 다행히 주인을 잘 만나서 후한 대접을 받으며 지냈다. 그러나 향수를 이기지 못해 고향으로 돌아와 달래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달래는 찾을 수가 없었고 결국은 지쳐서 죽고 말았는데, 그 후 그녀가 헤매던 골짜기, 산, 개울마다 아름다운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그러한 연유로 해서 생긴 꽃말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란다. 어디선가 ‘찔레꽃’이라는 제목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하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언덕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이 노래에 나오는 ‘찔레꽃 붉게 피는’이라는 가사가 틀렸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찔레꽃은 흰 꽃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필자 자신의 경험으로도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에 있는, 조선 명종 때 임꺽정(林巪正)이 숨어 지냈다고 하는 고석정(孤石亭) 내려가는 길 의 오른편 옆쪽에서 붉게 핀 찔레꽃을 보았던 것이다. 발그스레하게 핀 찔레꽃은 흰색 꽃보다도 더욱 시골 소녀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것 같아 보기에 좋았었다.
무잡모퉁이를 지나 야탑천을 끼고 내려가 탄천 산책로로 접어드니 산책객들이 제법 많았다.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탑교를 조금 지나가니 차도와 산책길 사이의 제방에서 라일락 향기에 못지않은 향긋한 냄새가 발길을 붙잡는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근처에서 유일한 아름드리 오동나무에서 나는 냄새였다.
오동(梧桐)나무는 예전 같으면 우리네 인생의 처음과 끝을 함께 해주는 나무였다. 옛날에는 아이를 낳으면, 집 앞이나 우물가에 오동나무를 심었다. 딸의 경우에는 나중 시집을 보낼 때, 그 나무를 베어 그것으로 가구를 만들어 시집을 보냈고, 아들의 경우에는 그가 죽었을 때 관(棺)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아들의 경우 대들보감이 되라고 소나무를 심었다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오동(梧桐)나무는 오동(吾同)나무[나와 함께 하는 나무]였던 것이다. 한편, 오동나무는 가구나 관의 재료로서 으뜸인 나무로 치부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우선은 그 속성이 가볍다는 점을 비롯하여, 오랜 세월을 지나거나 나무가 말라도 습기를 흡수하지 않기 때문에 뒤틀리든가 쪼개지지 않으며, 곰팡이가 피지 않고 좀이 먹지도 않는다는 점 등을 오동나무의 장점으로 매거(枚擧)할 수가 있겠다. 이와 같은 특성으로 인하여 가구나 관뿐만이 아니라 귀중품을 보관하기 위한 금고, 한약장 등 운반이나 보관을 위한 상자로서도 좋은 재료였고, 나아가 박물관의 문화재 또는 각종 공예 작품들의 보관상자로도 많이 제작되었으며, 게다가 소리에 대한 공명(共鳴) 기능이 뛰어나서 거문고를 비롯한 악기의 재료로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나무이다. 어디 그뿐인가? 아교의 접착성이 좋아서 못질을 하지 않아도 되고, 촉감이 매우 부드러운데다가 나무의 색이 도드라지지 않아 장인(匠人)으로 하여금 자신의 구미(口味)에 맞도록 제작할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점도 오동나무의 장점이라 하겠다. 오죽하면 판소리『변강쇠가』에서도 ‘오동나무 베자하니 순임금의 오현금(五絃琴)’이라서 벨 수가 없다는 표현이 나올까?
오동나무는 선가적(仙家的) 성격을 띠는 나무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봉황은 대나무 열매[竹實]가 아니면 먹지를 않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를 않고, 예천(醴泉)의 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나라가 태평스럽고 상서로운 때에만 나타난다는 봉황새, 요즈음에는 우리나라 대통령의 문장(紋章)으로도 사용되는 봉황새가 깃들이는 나무라니, 얼마나 소중한 나무인가? 꽃말도 그래서 ‘고상(高尙)’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한 나무의 원산지가 한국이라니 저절로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한다. 봉황 정도 되는 큰 새가 앉는 나무는 크기도 커야 한다. 오동나무는 다른 나무들보다 속성(速成)으로 자라며 그 크기도 웬만한 나무로서는 명함도 들이밀 수 없을 정도로 큰 나무이니, 복 받은 나무이다.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이 오동나무에게서 문학적인 수사까지도 배우며 자라왔다. ‘보리뿌리는 매끈매끈(맥근맥근[麥根麥根]) 오동열매는 동실동실(桐實桐實)’이라는 재미있는 말놀이는 대표적인 중의법(重義法)이었던 것이다.
보라색 꽃이 가지 끝에 깔대기 비슷한 종 모양의 꽃을 달고 있는 오동나무가 오늘 따라 매우 친근하고도 정겨워 보인다. (2012.5.17. 원고지 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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