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5.9.(수)
*우이령사람들에서 “우이령길” 및 “우이령사람들” 소식지 13호, 이진이 수필집 “사랑의 편지(교음사, 2012.3.30. 245p.)”, “수필문학” 5월호 우편으로 옴.
수필집을 받은 지 3개월이 훨씬 지났네요. 그 동안 책상머리에 놓아두기만 하고, 제대로 읽어보질 못했습니다. 제가 원래 그런 사람입니다. 매사가 느려요. 결혼도 늦게 했고, 대학원도 늦게 다녔고, 대학으로 간 것은 더 늦은 때였지요. 제 별명이 그래서 ‘거북이’랍니다.
늦게나마 조금씩 조금씩 읽어본 “사랑의 편지”를 편지 읽듯이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제 생각 몇 가지를 적어보려고 합니다. 좋은 소리도 있고 싫은 소리도 있습니다. 제 솔직한 심정을 쓴 것이니까 양해하시길 바랍니다.
책 전체적인 느낌은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상대방을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이 책의 갈피갈피마다에서 은은한 향기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아니 할머니 그것은 우리 동네 아주머니 건데 왜 몰래 가져가세요. 그러시면 안 되죠. 빨리 두고 가세요.’ 했다.
알고 보니 그 할머니는 이북에서 내려와 사업을 하다 망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폐지를 주워서 판돈과 정부에서 주는 보조금으로 산다고 한다.”(‘폐지 줍는 아주머니’에서)
불쌍한 동네 아주머니를 위해서 모아 놓은 폐지, 그것을 더욱 불쌍한 할머니가 몰래 가져가는 것을 보고 한 소리였습니다. 글의 행간에서 안쓰러운 마음이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이 눈에 선히 보이는 듯합니다. 바로 이진이 씨의 글에서 느껴볼 수 있는 마음 씀씀이를 대표한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리에 앉아 있던 그 80세 되신 할머니가 일어나시면서 임산모를 앉게 하는 거였다.”(‘할머니의 배려’에서)
80세 되신 할머니와 임산모, ‘폐지 줍는 아주머니’와 등장인물, 상황이 유사합니다. 이와 같은 2중적 구조가 이진이 씨의 글을 그저 단순하게 읽지 못하게 하는 요소라고 할 것입니다. 보통은 한번 틀어서 보이는 시추에이션, 이진이 씨는 그것을 다시 한 번 뒤집어 보이고 있지요.
“어느 날 전철을 탔는데 장애인석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전철이 떠나가도록 고성을 지르며 육두문자를 써가며 앉아있는 젊은이를 나무랬다.…듣다 못한 젊은이가 일어나면서 ‘저 잘 걷지 못하는 장애인입니다.’ 하면서 죄송하다고 했다.”(‘저는 장애인입니다’에서)
역시 2중적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버스 기사 아저씨들의 횡포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뉴스를 종종 접하게 된다. 드러나 우리 동네 마을버스 기사님은 언제 보아도 친절하다. 이런 분이 계시기에 마음 놓고 버스를 탈 수 있어 좋다.”(‘기사 아저씨’에서)
기사 아저씨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들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있는 글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어떻게 보면 2중적 구조를 지닌 작품이라고 볼 수가 있겠네요. ‘아들의 자전거’ 역시 같은 범주에 넣을 수가 있을 듯하고요.
“나도 내 주위부터 챙겨봐야 할 것 같다. 이 복더위에 내 아파트 경비 아저씨나 관리실 직원에게 닭죽이라도 끓여드릴까.”(‘작은 사랑’에서)
그와 같은 시선으로 보는 세상은 다 ‘닭죽’만큼 따사롭고 인정미가 넘쳐납니다.
“당신도 한나 결혼 전에는 많이 마음 아파했죠. 결혼 전에는 당신이 베란다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며 저렇게 아플까 하는 마음을 가졌는데 그 이후 결혼식이 끝나고 딸의 빈자리로 내 마음이 아파 참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가슴이 멍들 만큼요. 당신도 마찬가지였겠죠.”(‘가을바람을 타고 온 당신에게’에서)
딸을 시집보내며 마음 아파하는 두 분의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딸을 시집보낼 때 그런 정도로 마음 아파해 보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것은 마음이 너무 삭막해서 그랬겠지요? 매사에 넘쳐나는 정, 그것이 부럽습니다.
“초겨울의 산자락에서 질서 정연하게 정리된 묘역을 보면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그들의 값진 희생이 있기에 조국이 있고 내가 있는 것이리라 생각을 했었다.”(‘조국을 위해 산화한 그들’에서)
저도 대전현충원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역대 최연소 외무부장관으로 한일회담을 성사시켰던 이동원 씨가 별세했을 때였지요. 그때 저는 영월 청령포에 있었는데, 뉴스를 듣자마자 혼자서 상경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저에게 이동원 씨의 행적에 대한 신문기사와 비문을 써달라는 총장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동원 씨는 그때 제가 재직하고 있던 동원대학교의 이사장이었거든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사신 분들, 그분들의 명복을 빌어봅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6․ 25가 나기 전에는 철원에서 사셨다고 한다. 그곳은 6․ 25이전에는 이북의 땅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강원도 철원군 동송면 어머니 가족이 터를 잡고 살던 곳이었다.”(‘어머니와 6․ 25’에서)
저런, ‘강원도 철원군 동송면’? 그 이하의 주소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제가 살던 곳이 그 ‘동송면’의 ‘관우리’ 샘통[천통(泉通)]이었지요. 태어난 곳은 통천(通川) 정덕리(貞德里), 바로 정주영 씨의 고향이었구요. 아하, 그곳에서는 ‘초등학교’가 아니고 ‘인민학교’였지요. 지금은 수복이 된 곳이긴 하지만, 이러구러 한 번도 가 보질 못했네요.
“강원도 철원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당시만 해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을 켜고 지냈다. 호롱불 심지를 잘못 다뤄 불꽃이 빨갛게 타면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코 밑이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호롱불’에서)
심지를 잘못 다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불을 오래 켜고 있으면 심지가 까맣게 타 버려 그을음이 일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걸 가위로 잘라 주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전등(剪燈)’입니다. 전등을 하면서 밤새껏 한 이야기가 명나라 구우(瞿佑)가 지은 ‘전등신화(剪燈新話)’요, 그것에 영향을 받아 지은 것이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金鰲新話)’입니다.
“봉사는 있는 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사람이 더 하는 것이라고 하는 말은 늘 남편이 하는 소리였다. 그것이 행복이고 평화로운 생활이라 하였다.”(‘감나무 아래서’에서)
맞는 말입니다. 말은 맞는 말이지만, 그것이 어디 쉽게 실행이 되나요? 알면서도 못 하는 것이 봉사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는 일 아니겠습니까?
“가뜩이나 주말이면 둘레길 때문에 시끄러운데 꽃길을 만들면 더 많은 사람이 올 거라며 꽃씨를 뿌리지 말라 한다.”
“황당한 일은 또 일어났다. 집에서 쭉 내려가면서 길가에서 코스모스 씨를 받고 있는데 등산하러 올라가는 아주머니가 나더러 그냥 놔두지 왜 꽃씨를 받느냐고 한다.”(‘꽃길 만들기’에서)
그게 사람의 심리입니다. 남이 하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반대부터 먼저 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런 데에 개의치 마시고 늘 옳다고 하는 일이면 계속 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광주이씨 율정공파 15대 손으로 항렬이 현자돌림이기 때문에…”(‘내 이름을 말한다’에서)
광주 이씨 중에는 이집(李集) 선생이라는 분이 계시지요. 바로 이극배(李克培)의 증조할아버지가 되는 분이십니다. 성남에 그분의 사당이 있습니다. 성남문화원에서 성남의 인물로 추앙하는 분이라서 그 사당에서 백일장대회도 가지고 여러 가지 행사를 치르기도 한답니다. 고려 말 간신 신돈(辛旽)을 논박하다가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고생하신 분이시지요. 서울의 둔촌동(遁村洞)은 그분이 은거해 살던 곳이라서 생긴 지명이랍니다. 그분의 호가 둔촌(遁村)이지요. 마침 성남문화원에서 문화해설사 양성과정이 있어, 거기서 ‘고전 문학 속의 성남’이란 주제로 3시간에 걸친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 이집 선생의 한시를 소개하는 부분이 있었기에 참고로 그 부분만을 발췌하여 보내 드립니다.
②둔촌(遁村) 이집(李集)의 한시
이집은 여말의 학자로서 본관은 광주(廣州)로 광주이씨의 중시조이고, 자는 호연(浩然), 호는 둔촌이다.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문장을 잘 짓고 지조가 굳기로 명성이 높았다. 1368년(공민왕 17) 신돈(辛旽)의 미움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자, 가족과 함께 영천(永川)으로 도피하여 고생 끝에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개경으로 돌아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여주 천녕현(川寧縣)에서 시를 지으며 일생을 마쳤다. 그의 시는 문식(文飾)보다는 직서체(直敍體)에 의한 평이한 작품이 많다.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강동구에 있는 둔촌동은 한때 그가 은거해 지내던 곳으로 붙은 명칭이다.
그의 손자인 이인손(李仁孫)이 세조 때 우의정에 올랐는데, 이인손의 다섯 아들과 그들의 4촌 형제 3명이(모두 ‘克’ 자 돌림) 조정 회의에 함께 참석하게 되어, 한때 ‘팔극조정(八克朝廷)’이란 말이 떠돌기도 했다. 유고집에 『둔촌유고(遁村遺稿)』가 있다. 강동구 둔촌동 일자산(一字山) 해맞이광장에 1994년에 세운 둔촌시비(遁村詩碑)가 있다. 다음 시는 거기에 새겨진 시이다.
우계로 근친가는 생원 이우를 보내며(이웅재 역: 이하 같음) 送李生員愚覲母羽溪
여러 해 떠돌이 생활 그것만도 서글픈데 流離數歲足憂傷하물며 연달아 부모상을 당했다오. 況復連年見二喪부럽기 그지없는 건 형제들과 함께 모여 堪羡君今兄弟具춘풍에 색동옷 입고 부모님 뵈러 가는 거라네. 春風綵服覲高堂 부친과 함께 경상도 영천(永川)으로 피신하여 최원도(崔元道)의 집에 우거해 있을 때 잇따라 모친상과 부친상을 당하였다. 이 시는 이런 쓰라린 역경의 시기에 지은 듯하다.
스스로에게 自貽
늙마의 걸음걸이 점차 기우뚱기우뚱, 老來步步漸欹斜
행동거지는 차라리 상갓집 개 신세로다. 行止還如狗喪家
책상 위 문서는 장차 어디에 쓰려는고. 床上文書將底用
이제는 병들고 눈꽃마저 피었다오. 如今抱病眼昏花
공자(孔子)는 노(魯)나라 대사구(大司寇)를 맡았다가 배척당해 노나라를 떠났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떠돌다가 정(鄭)나라로 갔다. 어떤 사람이 스승을 찾아다니는 자공(子貢)에게 자신이 본 공자의 모습을 두고 한 말이 ‘상가지구(喪家之狗)’인데, 둔촌은 만년의 자신이 그와 같다고 한탄한 것이다. 물론 자신을 공자에게 비유하는 은근한 자부심도 함께 느껴진다.
‘내 이름을 말한다’에서는 “저는 황진이가 아니라 이진이에요.”라고 말하면서 ‘황진이’에 힘을 주어 말한다고 하였는데, 북한에 있는 황진이의 자취는 찾고 싶어도 찾을 수가 없으니 도리가 없고,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가까운 곳에 있는 황진이와 관련된 곳이 있기에 말씀드립니다. 남한산성의 동문 옆쪽에서 장경사(長慶寺)로 올라가는 차도를 가다 보면 장경사에 가까운 곳에 길이 좌측으로 굽어진 곳이 있는데, 그 오른쪽으로는 성벽이 있고 그 어드메쯤에 황진이와 관련된 곳이라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혹시 모르셨다면 한번 가 보심도 좋지 않을까 싶네요.
“이곳을 배경으로 두고 씀직한 우리나라 동화인『나무꾼과 선녀』의 이야기가 생각났다.”(‘선녀탕’에서)
제가 알기로는 『나무꾼과 선녀』의 이야기는 금강산의 구룡폭포(九龍瀑布) 위쪽 상팔담(上八潭)의 이야기가 원조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전국적으로 그 비슷한 이야기들은 여러 곳에 산재해 있지만 말입니다.
‘봉봉이는 엔돌핀이다’를 비롯해서 ‘수빈이와 영준이 세 번째 이야기’ 등은 아이들 이야기요, ‘9통의 편지’는 다양한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그렇게 주위 사람들에 대한 살뜰한 마음 씀씀이가 샘이 날 만큼 철철 넘쳐흐르는 주옥편들이며, 마지막 장에서의 ‘부활의 향기를 맡으며’는 종교와 관련된 글들이라서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진이 씨의 “사랑의 편지” 때문에 그 덥디더운 금년 여름을 책을 읽는 즐거움으로 보내게 되어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02.8.27.이웅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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