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

(거북이5) 자조장학회의 수난과 영광

거북이3 2012. 9. 7. 00:36

 

 

(거북이5)

          자조장학회의 수난과 영광

                                                                                                                                                            이 웅 재

 

노름으로 거덜낼 뻔한 등록금으로 2학기 등록금까지는 내었지만, 다시 앞길이 캄캄해졌다. 그러한 나에게 정문 앞에서부터 문과대학까지의 곧장 뻗은 백양로는 매일같이 막막한 심정을 다지는 우울한 길이었다. 머릿속에는 늘 ‘이렇게 주저물러앉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견마 잡히는’ 방법은 없었다. 일단 ‘휴학부터 해 놓고 볼까?’

그럴 즈음이었다. 10월 말쯤 되었다고 기억된다. 하루는 상경대학 옆을 지나가는데, 눈에 확 띄는 광고 하나가 내 시선을 얽어매었다. 바로 ‘자조장학회(自助獎學會)’에서 회원을 모집한다는 광고였다. 자조장학회(自助獎學會)? 스스로 돕는 장학회라, 아마도 요샛말로 하여 알바생을 모집하는 광고쯤으로 여겨졌다. 더운 밥 찬 밥을 가릴 처지가 못 되는 나는 상경대 지하실에 있는 자조장학회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조장학회’란 학내에서의 모든 인쇄 및 복사물을 서비스하는 업무를 대행하는 학생들의 아르바이트 기관이었다. 널찍한 사무실은 웬만한 인쇄소 못지 않은 시설을 갖춘 모습이었다. 여기서 뼈 빠지게 노력하면 겨우 등록금 정도는 마련할 수 있다고 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학비를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일단 회원 모집에 응모를 했다. 그리고는 이튿날부터 합격자 발표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대학입시보다도 더욱 마음을 졸이게 하는 일이었다.

합격자 발표는 대외적인 공고는 하지 않았다. 지정하는 시간에 장학회 사무실로 직접 방문하라는 공고가 나붙었고, 나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사무실을 찾아갔다. 합격자는 단 한 명이었다. 다음 학기에 졸업하는 회원의 자리를 메꾸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발표자의 입만 쳐다보던 나는 낙심천만의 결과에 풀이 팍 죽어 있었다. 합격자는 우리 과의 3학년 선배였다. 그 선배는 나의 풀 죽은 모습을 한 동안 유심히 관찰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웅재 군, 1학년이라고?”

“네!”

나는 엉겹결에 대답을 했다. 그 선배는 나를 다시 한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1학년이라, 나는 이제 4학년엘 올라가니까 나보다는 네가 일하는 것이 낫겠다. 내가 합격 을 양보하마.”

이게 웬 가뭄에 단비일 것이랴! 그렇게 해서 나의 ‘견마 잡히기’는 드디어 이루어지는 듯했다. 당시의 회장은 나에게 나중에 회장을 하려면 필경이나 타자 둘 중의 하나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해서 나는 필경을 택하여 열심히 배우며 일했다. 타자는 스텐실(stencil: 등사 원지)을 놓고 친 후에 둥근 형태의 소형 윤전기에 돌려 등사를 하기 위한 영어 원문 작업이요, 필경은 필경 원지(原紙)에 철필로 글씨를 써서 등사기에 얹어 등사하기 위한 한글이나 한자 원문 작업이었다. 일반 회원은 윤전기나 등사, 그리고 제본 따위의 일들을 하면 되었다. 나도 물론 등사나 제본에는 이미 숙련공으로서의 기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2학년까지를 무사히 마치고 3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대망의 자조장학회의 회장이 되었다. 역대 회장들의 말을 들으니 초대회장인가가 나중에 우리나라 최초의 앵커맨을 지내고, 11대 국회의원 최다 득표자, 민정당 대변인을 지낸  분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나를 찾아왔다. 회장직을 맡은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여름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 일이 있었는데, 아뿔싸, 그때 지하실에 있던 자조장학회 사무실이 물폭탄을 맞은 것이었다. 산더미 같은 종이는 물론, 타자기, 윤전기, 등사판 할 것 없이 몽땅 모래가 섞인 물에 흠뻑 젖어서 하나도 사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어쩔거나? 며칠 동안 물을 퍼내고 사용할 수 없는 종이며 스텐실, 원지 등을 버리면서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았다.

그러다가 드디어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물에 젖어 못 쓰게 된 등사기, 윤전기 등을 가지고 학교의 총무처를 찾아갔다. 총무처장을 상대로 설전을 벌였다.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이라도 듬뿍 주어야 할 판국에, 제 힘으로 벌어서 학교엘 다니겠다고 애쓰는 자조장학회를 살려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고 담판을 벌였다.

그 결과 내 이야기가 먹혀 들어가 학교에서 자조장학회의 운영자금을 빌려주기로 한 것이다. 자조장학회는 모든 기자재가 신품으로 교체되었다. 거기 들어간 돈이 적지 않았다. 그것이 문제였다. 그 돈은 내가 회장으로 지내면서 졸업하기 이전까지 갚아야 하는 돈이었다. 사실 문제는 내게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빌려준 돈을 다 받아내야 하는 학교측에 있는 일이었다.

학교 측의 웬만한 문서나 인쇄 작업은 몽땅 자조장학회로 일감이 주어졌다. 하지만 그러한 소소한 일감으로서는 택도 없었다. 그래서 특단의 조치가 내려졌다. 바로 입학시험문제의 인쇄를 자조장학회에 맡기기로 한 것이다. 자조장학회의 역사상 최대의 영광이었다. 아마도 학생이 입학시험문제의 인쇄를 맡아했던 일은 대한민국에서 나밖에는 없을 터였다. 문제의 보안이야 전원 합숙을 하고 총무처 직원이 감시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여타의 많은 문제점들이 내재하고 있는 일이었다.

먼저 한 달이 넘게 작업을 하여야 할 입학시험문제를 인쇄하는 곳이 어느 곳인가가 알려지면 안 되겠어서, 문과대학 뒤쪽에 당시 신축하여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건물인 연합신학대학원을 처음으로 우리가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시험문제의 인쇄 제본이 끝난 다음 남는 시간을 주체하기가 힘든 것도 그 중의 하나였다. 빈둥빈둥 논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그때 절실하게 느꼈다.

좀더 구체적인 문제점들은 ‘거북이6’에서 만나보기로 하겠다.

(2012.9.4. 원고지 16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