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 10) 어쭙잖은 문학과의 만남
이 웅 재
자조장학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생활을 이어 나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더군다나 급한 일감이 생기면 어쩔 수 없이 강의를 듣는 일마저도 포기하여야만 하였다. 그런 판국이니 문학 쪽을 기웃거려본다는 일은 언감생심이었다. 『연세춘추』에서 해마다 문학상 작품을 현상모집하고 있었지만, 내겐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기껏해야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숙명여대의 5개 대학 국문과 학생들로 결성된 5개 대학 문우회에 얼굴을 내비치는 것이 문학과 관련된 관심의 전부였다. 대학생활에서의 내 최초의 창작품은 「山二番地」라는 콩트였다. 바로 그 5개 대학 문우회에서 프린트 본으로 창간한 『학생 국어국문학』이라는 책에 발표한 것이었다. 1963년 2월에 간행이 되었으니 내가 자조장학회에 들어간 지 반 년이 조금 지난 때였다.
그때쯤 나는 이미 등사와 제본에는 어느 정도 전문가 수준에 올라 있었고, 그런 이유로 해서 책의 출판에 내가 필요했기 때문에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목차와 편집후기의 글씨가 내 글씨인 것을 보면 아마도 막판에는 원지를 긁는 일에도 참여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 시절 필경(筆耕)을 배우고 있었다. 나중에 자조장학회의 회장을 맡으려면 필경이나 타자를 할 줄 알아야 한다기에 필경을 택하여 배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등사와 제본을 위해서 합류했지만 조금은 답답한 심정으로 마무리의 필경을 내가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안타깝게도 그 『학생 국어국문학』은 창간호로서 종간이 된 잡지였고, 그 이후 4월에 열린 제2차 문우회 정기총회 회칙의 글씨는 절반 정도가 내 필체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틀림없을 것이다.
참고로 문우회 회칙의 제3조를 다음에 보인다.
㐧三條 本会의 会員은 서울特別市內 各 大学校 國語國文学科에 籍을 둔 者로써 本会에 參與하기를 願하는 者에 限한다.(但, 當分间은 梨大, 淑大, 高大, 延大, 서울大, 以上 5㐰大学校 國文科에 籍을 둔 1年生으로 한다.)
이 회칙 3조의 ‘1年生’은 개정에 의해서 ‘在学生’으로 바뀌었다.『학생 국어국문학』 창간호의 편집(필경, 등사, 제본)은 서울대에 다니는 上道洞 45-6 주호수 군의 집에서 행하였다. 그때의 편집실 풍경을 부천대학 교수를 지낸 당시 고려대생이었던 閔忠煥의 글에서 살펴보자.
수는주는 영하 19度. 窓門엔 하얀 성에. 그러나 여기엔 까만 原稿紙, 차가움을 모르는 젊은이의 溫気가 있다…….
오호, 통재라. 생긴 것도 푸근하고 인상도 푸근했던 주호수 군은 야속하게도 우리 편집위원들에게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젊디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하직하여 버려서, 이 글을 쓰는 지금 내 마음은 허허롭기만 하다.
「山二番地」를 쓸 당시, 나는 지금은 종로구로 바뀌어 버린 동대문구 숭인동 산1번지에 살았었다. 나중(1964년 1월10일)에 생긴 입장료 10원의 동대문 스케이트장 맞은편으로 동덕여고가 있던 좌측 길은 창신동, 그 우측이 숭인동이었는데, 양쪽에 모두 채석장이 있었고, 그 오른쪽 채석장을 지나 언덕길로 올라가다가 막다른 지역이 바로 숭인동 산1번지였다. 그 1번지를 2번지로 변형시켜 그것을 한자(二)로 씀으로써 영원한 평행선을 상징하는 당시의 내 사랑에 대한 관념을 형상화시켜 보여준 것이 그 글이었다.
그 이후, 제18회 연세문학의 밤(1964.5.13.)에서 수필 「Cigarette end」(이때 1학년생이었던 최인호는「최씨 족보론」이라는 수필을 발표했다), 동년 5월 6~8일에는 백양로에서 습지대시화전에 시 「영정(影幀)」을 발표했고, 21회 연세문학의 밤(1965.10.2.)에는 「산통(算筒)」, 그리고 1965.11.13.의 제1회 4개 대학(서울대가 빠져서) 문학의 밤에는 「가을과 추억들(속․고구마와 여대생)」을 발표한 것이 전부였지 싶다.
4개 대학 문학의 밤은 이화여대 중강당에서 열렸는데 조선일보사를 비롯하여 각 대학의 신문사, 방송사 등에서 후원을 해 주었다. 그때의 발표작들은 역시 프린트물 책자로서 묶여졌는데, 필경은 모두 내가 맡아서 했었다. 「가을과 추억들(속․고구마와 여대생)」을 보면, 내가 연세대의 대학입학시험문제의 인쇄를 맡아서 했던 때는 그로부터 꼭 1년 전이었고, 내가 이화여대 앞에다가 맛탕 가게인 “단물샘”을 내었을 때도 그 무렵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때 강평을 맡아서 해 주신 분이 산문부에는 학과장이시었던 소설가 박영준(朴榮濬) 교수, 시부에는 시인 박목월(朴木月) 교수이었는데, 박목월 선생께서는 시에 대한 강평은 하시지 않으시고 엉뚱하게도 나의 수필의 일절 “그렇게 뱃속이 텅텅 비면 모든 것이 아름다와만 보인다던 그 잠잠한 얼굴”이라는 표현을 놓고서 장황하게 문학론을 언급하시던 생각이 잊히지 않는다.
5개 대학 문우회 회원들 중, 지금까지도 가끔 만나서 일잔을 하면서 옛 추억을 되살려보는 친구들이 있으니, 서울대 출신으로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장을 지낸 임형택(林熒澤) 교수, 고대 출신으로 부천대학교 교수를 지낸 민충환(閔忠煥) 교수, 역시 고대 출신으로 여고 교장을 지낸 임무정(林武正) 교장, 이화여대 출신으로 두루뫼박물관장으로 있는 김애영 씨, 강원룡 목사님을 모시고 지냈던 것으로 알고 있는 최연수 씨, 그리고 연대 출신의 연세대문과대학장을 지낸 전인초(全寅初) 교수가 바로 그들이다. (14.8.3.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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