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교실1. [현대걸작기행선]4
藥山東臺 寧邊
金 億
1
영변(寧邊)에는 유명한 산과 절과 그리고 굴이 많습니다. 묘향산(妙香山)이라든가 보현사(普賢寺)라든가 동룡굴(蝀龍窟)이라든가 모두 다 이름 높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변의 뚜렷한 존재는 역시 약산동대(藥山東臺)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만치 약산하면 영변을 생각케 되고 영변하면 약산을 연상케 되니, 아무리 약산동대보다 더 좋은 더 아름다운 곳이 있다 하더라도 약산이 있는지라 비로소 영변이 알려진 것이외다. 이것을 가르쳐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웃는다 하더라도 이렇게 고질박힌 우리에게는 손쉽게 고쳐질 일이 아니외다.
이야기보다도 실지(實地)가 아무리 가사(歌詞)의 내용에는 영변이나 약산이 담아지지 않았더라도 저 영변 하나면 보아도 영변과 약산동대와는 서로 떠나서 있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이것은 어떠한 이라도 부정하지 못할 일이외다. 묘향산도 좋습니다. 보현사도 보아야 할 것이외다. 동룡굴도 버릴 수 없는 것이외다. 그러나 이것들보다도 더 많은 흥미를 약산동대가 우리에게 주니 선입견이란 무서운 것이외다. 선입견으로의 감정이 없었더란들 우리는 결코 이런 생각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외다. 일이하여 선입견으로의 약산동대는 영변이라는 한 조그마한 지방에만 멎지 아니하고 그 아름다운 존재를 널리 반도의 모든 맘 속에다 뿌리를 박아놓고 말았읍니다.
그리고 진달래는 약산동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외다. 반도의 산하에는 어디든지 있읍니다. 그런 것을 우리는 약산동대 진달래라 하면서 다른 곳 진달래는 다 내어버리고 약산동대의 그것만을 노래하며 귀엽다 하니 이것은 약산이 아름다운지라, 진달래까지 또한 우리의 사랑을 받는 것이외다. 그리고 저 작자 미상의 시조인,
약산동대 여즈러진 바위틈에 외철쭉 같은 저 내님이
내 눈에 덜 밉거든 남인들 자나보랴,
새 많고 쥐 꾀인 동산에 오조간 듯하여라.
한 이 공덕(功德)에도 또한 힘이 없는 것은 아니외다. 만일 이 작자가 이렇게 약산동대의 진달래를 아름다운 님에게 비하여 노래치 않았더란들 우리는 약산동대와 진달래를 다 같이 찬미치 않을는지 모릅니다. 같은 진달래로 태어나서 다른 것들은 모두다 무시를 당하고 약산동대의 그것만이 가장 높은 대접을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부질없는 선입견이외다. 원망스러운 감정이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들의 맘에서 이것을 멀리 할 수는 없습니다.
이리하여 저 요절(夭折) 박행(薄倖)한 시인 김소월(金素月)도 「진달래」라는 시에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이별의 원한(怨恨)을 이렇게 담아 놓고서 하다 많은 진달래꽃에서 하필 약산동대의 진달래를 따다가 가시는 님의 길에 뿌려 놓을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진달래꽃이건만 약산의 그것이라야 보다 더 힘있게 보다 더 감동있게 우리의 맘을 다져주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약산동대는 진달래와 함께 그 이름이 높아집니다. 이 노래 하나만으로도 약산동대의 진달래꽃은 언제나 우리들의 맘속에서 꿈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외다.
2
이렇게 아름답고 이름 높은 약산동대는 어떠한 곳인가.
저 오래된 『여지승람(輿地勝覽)』같은 책을 들추어 보면 약산은 영변부(寧邊府)에서 서쪽으로 8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한 뒤에 사방이 높고 험하여 바위를 깎아 세운 듯한 것이 갈데없는 천성(天成)의 성(城)인 바, 인근 몇몇 고을 중에서는 이와같이 용병(用兵)하기 좋은 곳은 없다 하였읍니다. 그리고 고기(古記)에는 약산의 험(險)은 동방에 제일로 층만(層巒)이 첩장(疊嶂)하여 사방으로 서로 얼키고 서로 덮인 것이 마치 철옹(鐵瓮) 같다 하였읍니다.
또 산수도경(山水圖經)에는 강계(江界) 구현령(狗峴嶺) 남쪽에 있는 극성령(棘城嶺)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서는 운대산(雲臺山)과 마유령(馬踰嶺)과 구두산(仇頭山)이 되고, 영병의 서쪽으로 뻗어서는 약산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약산과 철옹성과는 다릅니다. 저 소위 일부당관(一夫當關) 만부부적(萬夫不敵)이라는 철옹성은 본성(本城)과 북성(北城)과 신성(新城)과 그리고 약산, 이 4성의 총칭이오, 약산의 별명은 아니외다. 이 철옹이 영변을 둘러쌌는지라, 예부터 정치나 군사에 적지 아니한 기록을 남긴 것이외다. 누가 보든지 이 철옹의 완고스러운 천험(天險)에는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만치 높고 험하고 위엄이 그대로 우러러볼 수조차 바이 없습니다.
약산은 관서팔경(關西八景)의 하나외다. 팔경이란 강계(江界)의 인풍루(仁風樓), 만포(滿浦)의 세검정(洗劍亭), 의주(義州)의 통군정(統軍亭), 선천(宣川)의 동림폭(東林瀑), 안주(安州)의 백상루(百祥樓), 평양(平壤)의 연광정(練光亭), 성천(成川)의 강선루(降仙樓), 그리고 영변의 약산동대, 이것이외다. 저 관동팔경을 모방하여 이렇게 관서팔경을 만들었는지 알길은 없거니와, 여하간 예부터 이렇게 불러왔습니다.
어찌하여 약산이라 이름하였는가.
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전설이 있읍니다. 하나는 이 산에 예부터 약초가 많아서 이 이름이 생겼다는 것과 또 하나는 이 산 아래 서운사 곁 석간(石澗)에 유명한 약수가 있었는데, 이 약수를 마시러 오는 사람들이 여간 많지 아니하여 하루같이 그들은 무리를 지어 와서는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떠들어서 정숙해야 할 사찰로는 차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읍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리지어 오는 사람들을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어, 생각다 못하여 그만 약수를 묻어 버렸읍니다. 이리하여 서운사가 저으기 고요해졌다는 것이외다. 어느 편의 이야기로 보든지 이 산에 약초나 약수가 있던 것은 분명하외다. 그리고 약산이란 이름은 실로 이 때문이었읍니다.
그리고 동대라 이름한 것은 별로 뜻이 있는 것이 아니요, 지금은 봉산면(鳳山面)이지만, 그 옛날에는 무주(撫州)이던 곳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네 마을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대라 불렀다는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약산동대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 두 가지 이름을 합한 것이외다.
약산동대에서 논 사람이 천이요 만이 아닐 것이외다. 한정 없는 사람이 모여서 마시고 먹고 놀고 노래하고 춤추고 갖은 흥에 야단법석을 하였건만 한 사람도 이 약산에서 불행한 일을 당치 않았다는 것이외다. 동대의 대상(臺上)은 전후며 좌우할 것 없이 문자 그대로의 단애절벽(斷崖絶壁)이외다. 까딱 한번 실족을 한다면 그야말로 그대로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즉사코 말 것이어늘, 그러한 불행한 일이 없는 것은 이 산이 영산(靈山)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과연 한 사람도 그러한 불행을 당치 않았는지, 그것은 보증키 어렵거니와, 여하간 사람들은 약산을 사랑하는 나머지에 이렇게까지 이 산을 영산화시킨 것이 재미있읍니다.
그리고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동대 위에 있는 거북바위의 전설이외다. 이것은 이름과 같이 바위의 생김생김이 거북과 같다 하여 거북바위라 하는데, 사람들은 이 바위를 보물이라고까지 생각하였읍니다. 이 거북이 어떻게 좌정(坐定)을 했는가 하니 머리는 구룡강(九龍江)을 향하고 꼬리는 영변 고을로 향하였읍니다.
영변 고을에 부자가 많은 것은 이 거북바위가 구룡강 물을 마시다가 영변 고을로 내려보내기 때문이라 하여 고을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거북바위 거북바위’ 하면서 여간 숭배하며 귀해 하지 않았읍니다. 하던 것이 하루는 고을의 어떤 나쁜 자가 약산동대에 올라가서 이 거북바위를 보고,
“내가 영변 고을 사는 지가 벌써 여러 십 년에 한 번도 부자가 되지 못하고 언제나 이 모양으로 가난하게 지내니, 이 웬일이냐. 이 거북바위야, 어째서 너는 그다지고 편심(偏心)이냐, 이 못생긴 바위야. 복(福)거북은 무슨 빌어먹을 복거북이야.”
하면서 잠잠이 앉았는 거북의 머리를 뚜드려 부쉈읍니다. 그리하여 거북은 그만 머리를 잃어버렸읍니다. 그리고 그 나쁜 자는 내려오던 길로 약산 중복(中腹)쯤 하여 갑자기 죽어버렸는데, 이것은 약산 산신령이 벌을 준 거라 합니다.
이뒤부터는 웬일인지 영변 고을의 부자들은 차차 패하기 시작하여 나날이 영락해질 뿐만 아니라, 재미롭지 아니한 일이 많이 생겨서 모두들 안심할 수가 없었읍니다. 거북바위는 그대로 머리를 잃어버리고 봄을 맞고 가을을 보내기 여러해 하였읍니다. 김창해(金昌海)라는 고을 사는 분이 갖은 정성을 다하여 머리 없는 거북에게 머리를 하나 만들어 주었읍니다. 김씨는 본래 아들이 없었읍니다. 그러던 것이 거북에게 머리를 만들어 준 탓인지 아들이 생겼다는 것이 이 거북바위에 대한 전설이외다.
3
그러면 약산동대란 실물은 어떠한가.
영변 고을서 조그마한 시내를 건너 외마디 석로(石路)를 서쪽으로 가노라면 문득 무성한 송림 속으로 들게 됩니다. 이 송림에서 우편이 약산이요, 좌편은 천주사(天柱寺)외다. 천주사는 철옹성 비문을 보면 ‘이조 숙종 8년 부사 이광한(李光漢)’의 지은 것으로 선조(宣祖) 25년 서가(西駕) 때 타일(他日)의 사변(事變)을 예비키 위하여 영(營)을 만들었다는 것이외다. 그래 그런지 이 천주사는 절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왕거(王居)의 궁전에 가까운 감이 없지 아니하외다.
이 천주사를 싸고 도는 이야기도 하나 둘이 아니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무리 정사에나 야사에도 없다 하나 우리는 이 천주사의 이괄(李适)이를 그대로 넘길 수가 없으니, 그것은 이괄이가 이 천주사를 궁전으로 썼다는 것이외다.
인조(仁祖) 원년에 이괄이가 북병사(北兵使)가 되어 영변으로 왔다가, 인조 2년 갑자(甲子)에 구성(龜城) 부사(府使) 한명련(韓明璉)과 서로 통하여 반란을 일으킴에는 그윽이 이 철옹성의 천험(天險)을 믿는 동시에 궁전으로서의 천주사를 인정했기 때문이외다. 그때 장만(張晩)이는 도원수로써 평양에 있었읍니다. 이 도원수는 이괄이의 반군을 막을 힘조차 없이 반군의 뒤만 으슬렁으슬렁 따라갔읍니다.
그 뒤 이괄의 난이 평정되어서는 ‘이괄이 꽹가리 장만이 볼만이’라는 조어(嘲語)가 돈 것을 우리는 이 천주사를 대할 때마다 다시 한번 생각치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천주사에서 우편을 향하여 걸음을 옮기노라면 얼마 가지 아니하여 푸른 송림의 시원한 바람이 우리들의 땀 흘린 이마를 즐거이 씻어줄 것이외다. 이것이 이름 높은 약산이외다. 해발 370여 미터이외다. 대석(臺石)의 높이는 1장(丈) 너머 됩니다. 천연으로 된 돌대를 더듬더듬 더듬으면서 그대로 올라가노라면 지금과는 딴판의 한 50인 가량 앉을 만한 대가 있읍니다. 그리고 아래는 문자 그대로의 단애삭벽(斷崖削壁)이외다. 이 단애가 몇천 척일까, 몇만 척일까, 가만히 눈을 들어 내려다보면 그저 눈앞이 아득할 뿐, 실로 혼비백산할 곳이외다.
그리고 동북방으로 동대와 서로 대립한 천 척 직하의 병풍바위와 송곳바위들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세상에 이와같이 험하고 아름다운 것도 있을까 하면서 혼자로서 조물주의 기괴한 솜씨에 탄식치 아니할 수가 없게 됩니다. 중부쯤 하여 병풍바위에는 난데없는 들비둘기 떼가 사람을 보고 놀랬노란 듯이 날아왔다 날아갔다 하면서 무어라도 소리를 내어 외칩니다.
다시 눈을 들어 저 먼 곳을 바라보면 천 리일까, 만 리일까 망연한 벌판이며 먼 산들의 풍경이 눈 안으로 그림처럼 들어옵니다. 그리고 아래를 바로 내려보면 벌가에 구룡강이 흘러갑니다. 맑은 물에다 약산의 이 험괴한 바위들과 푸른 풀과 꽃들을 고요히 어리우고서 무어라고 노래를 하면서 흘러가는 구룡강은 아무리 보아도 한 폭의 그림 아닐 수가 없습니다.
구룡강 서쪽 언덕은 평야외다. 봄에는 새파란 풀들이 봄바람과 함께 희롱을 하고 가을에는 노랗게 익은 벼이삭들이 바람결을 따라서 이리로 밀리고 저리로 도는 양은 보는 이의 맘에다 시적 흥취를 돋아 줍니다. 다시 눈을 굴려 동북쪽을 바라보면 송림 속으로 영변의 시가가 고요히 잠든 듯이 소리 없이 누웠읍니다. 예대로의 꿈을 그대로 안고서 고요히 잠든 영변의 맘을 누구라서 알 것이런고.
동대의 대석암반(臺石巖盤)에는,
대륙에는 뭇산이 출몰하고
장공(長空)은 넓은 바다에 떠 있네
인간에는 이에 견줄 바위 없으니
천하에 이름난 대(臺)로다(편자 역)
大陸群山沒/ 長空一海來/人間無比石/天下有名臺
라는 구와,
천 년 전 신선은 소나무의 학이 되고
사방 기녀의 노래는 술 가운데 꽃이로다(편자 역)
千載仙歸松上鶴/ 四方妓唱酒中花
의 구들이 새겼읍니다. 그리고 대를 떠나 북경으로 위태위태한 석로(石路)를 더듬어 가노라면 산전(山巓)에 봉상대(鳳翔臺), 학암대(鶴巖臺)가 있고, 산을 내려가노라면 학귀암폭포(鶴歸巖瀑布)가 있는데, 다른 것은 그만두고 새 봄철의 송이송이 넘노는 꽃과 가을철의 빨갛게 물들은 단풍만으로도 넉넉히 한때의 흥을 풀 수가 있어, ‘약산동대야 잘 있거라, 명년이라 춘삼월되면 너 찾아 내 다시 오마’ 하는 속가(俗歌)가 꿈결같이 입에서 흘러날 것이외다.
동대에서 남쪽을 향하여 가면 서운사가 있읍니다. 이 절은 고려 충목왕(忠穆王) 원년에 지은 것인데, 그뒤에 여러번 중수를 한 것이외다. 저 소위 야즈러진 바위틈에 진달래꽃이 이곳에 많습니다. 봄이 되어 송이송이 연분홍 진달래꽃이 구룡강물에 꿈같이 어린 양은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그림이외다.
산문(山門)을 나서서 산허리를 도노라면 학귀암이외다. 이 암의 바위 새 간수(澗水)는 그대로 그대로 흘러서 폭포외다. 여름 장마 때에는 수량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것이 약산동대이외다. 만일 약산동대만 있고서 단애절벽이 바로 아래가 아니었던들, 그리고 바로 그 아래가 구룡강 맑은 물이 아니었던들, 약산동대가 이렇게 여러 사람의 호기적 흥미는 끌지 못하였을 것이외다. 저 지는 해가 노랑 볕을 서편에 남기고 구룡강에다 반사(反射)로의 약산동대의 기기괴괴한 단애를 비치지 않았더란들, 그리고 떠오는 달이 하얀 물 위에 그 얼굴을 약산동대와 함께 어리우지 않았더란들, 약산동대는 보다 더 아름다워지지 않았을 것이외다.
이 절경에다 이 청천(淸川)이 있는지라, 우리의 흥미는 언제나 이 곳을 잊지 못하는 것이외다.
4
약산 생긴 모양이 앉은 갈매기와 같다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는 것같이 보이지만은 그 속은 딴판이니, 그것은 바람이 한번 건듯 불면 나래를 있는 대로 펴고서 저 높은 구공만리(九空萬里)로 날자는 것이외다. 당(唐)나라 여류시인 장문희(張文姬)는 “沙頭一水禽 鼓翼揚淸音 只待高風便 水無雲漢心”이라 읊었으니,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바닷가 모래위에 물새 한마리
나래치는 그소리 아름답고야
건듯부는 바람을 기다림인가
저멀리 구름끝을 날아가려고
이것이어니와, 구룡강가에 앉은 우리 물새는 언제나 날 것이런가. 이 물새의 장래는 지금보다도 더 많은 아름다운 약속이 있을 것이외다.
약산동대를 구경한 지 오리외다. 지금 돌아다보면 까만 옛날이외다. 하여 기억을 더듬어도 더듬어도 보이는 듯이 분명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본시가 사람의 맘이란 물이요 구름이외다. 밤낮으로 흐르지 않을 수 없는 물이외다. 하여 아침에는 북강을 돌다가 저녁에는 앞내를 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바람대로 밀려도는 구름이외다. 하여 오늘은 서편을 날다가 내일은 동편 쪽을 향치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바쁘외다. 언제나 쉴 사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남는 것은 하나로 없습니다. 다만 잊을까 말까 한 기억뿐 혼자로서 서러운 심정을 가집니다.
약산동대가 내게 꿈결 같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외다. 그러나 나는 두 번 다시 약산동대를 보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외다. 두 번 다시 보는 것으로 인하여 나는 지금까지 내가 첫 인상으로 그리고 있는 그것이 깨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외다. 나는 약산동대를 그리는 나머지에 보잘 것 없는 노래를 하나 지은 것이 있으니,
약산동대 가고지고
약산동대 어디메냐
바라보니 허공에는 흰 구름만 덮였고야
여즈러진 바위틈에 진달래는 홀로 피어
봄바람이 못내 그려 하늘하늘 반겨 돌리
아하, 눈에 선한 내 동대의
지금쯤은 어떠런가
약산동대 보고지고
약산동대 어디메냐
쳐다보니 산만 첩첩 하늘끝은 비었고야
노랑저녁 저문날에 학귀암엔 학은 없이
들비둘기 떼를 지어 구개구개 떠돌으리
아하, 꿈에 선한 내 동대의
지금쯤은 어떠런가
약산동대 가고지고
약산동대 어디메냐
하늘끝은 구름이요 구름끝은 아득코야
십리구룡(十里九龍) 여울물에 나룻배는 잠이 깊고
돋는 달에 물만 혼자 옛 곡조를 노래하리
아하, 귀에 선한 내 동대의
지금쯤은 어떠런가
이것이외다. 이런 것이나마 노래랍시고 나는 노래도 아니 할 수가 없었으니, 그것은 한 번 가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한 것에 대한 나의 애석이외다. 무심히 들고 나는 세월에 기억이라는 기억은 모두다 잃어집니다. 기억이 다 스러지기 전에 나는 약산동대를 다시 한번 더듬어 보거니와, 이후 여러 해가 되어서는 이만치라도 돌아볼 길이 없겠거니 하면 나의 애석은 부질없이 저 멀리 북쪽으로 약산을 찾아 하늘 끝을 헤매게 됩니다. 이 이상 나는 아무것도 더 이야기 할 무엇이 없습니다.
(『半島山河』, 三千里社, 1944)
♣李德懋의『靑莊館全書』제66권「入燕記上」 -正祖 2년 3월
30일(경인) 날씨가 청명하고 화창했다. 철옹에서 유숙했다.
○ 나는 오늘이 봄을 보내는 마지막 날이니, 한 번 약산(藥山)에 올라가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도호공(都護公)이 부중(府中)의 손님들을 데리고 천주사(天柱寺)ㆍ서운사(棲雲寺) 등을 두루 방문했다. 이 절들은 부아(府衙)와 약산(藥山)의 중간 지점에 위치했는데, 경치가 아늑하고 난간이 널찍했다. 나는 김운산(金雲山)과 운(韻)자를 뽑고 술잔을 기울였다. 또 기생들은 도암 선생(陶庵先生 도암은 李縡의 호)의 '이태백의 영혼을 대신해서 죽지사를 읊는다.[代李太白魂誦傳枝詞]’는 시(詩)를 외니, 흥겹기 이를 데 없었다.
소나무 사이로 난 돌길을 따라 약산의 동대(東臺)에 올라갔다. 우뚝 솟은 동대는 네댓 길이나 되었고 수십 인이 앉을 만했다. 동쪽으로 묘향산(妙香山)을 바라보니 흰 빨래가 산을 두른 것 같았다. 이는 아직 녹지 않은 겨울눈이다. 서쪽에는 압록강(鴨綠江) 연변의 산들이 개미집 같았고, 남쪽은 큰 바다가 중국의 청주(靑州)와 맞닿았고, 북쪽을 바라보니 산세가 말갈(靺鞨) 지방으로부터 뻗어 와서 아득히 끊임없이 내닫고 있었다.…
밀양(密陽) 사는 운심(雲心)은 유명한 기생이다. 절도사(節度使) 이은춘(李殷春)이 영변(寧邊)의 수재로 있을 때 자기 아버지가 사랑하던 기생이라 하여 데리고 왔다. 운심은 이때 이미 늙어 머리가 허옇게 세었다. 운심이 동대(東臺)에 올라 한참 동안 사방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강개(慷慨)하여,
“후세에 만일 밀양의 운심이가 약산의 동대에 올라 즐거움을 이기지 못해 뛰어내려 죽었다 하면 어찌 장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인하여 치마를 감싸고 몸을 날려 떨어지려 했다. 모두들 깜짝 놀라 붙잡았으므로 중지되었다. 이 이야기도 아울러 전하여 승사(勝事)로 삼는다.
*金雲山: 三和府 사람 雲山 김성유(金聖猷). 賦를 잘해서 魁科(文科의 甲科)에 올랐고 외모가 매우 훤칠했다.
*竹枝詞:악부(樂府)의 이름으로, 원래 파유(巴渝;重京) 지방의 민가였는데, 당나라 劉禹錫(772~842)이 파유로 귀양갔을 때 新詞를 지은 뒤로 다시 성행했다. 대체로 그 내용은 세속의 잡다한 일들을 읊은 것이다. 그리고 중국 악부 죽지사를 모방하여 우리나라의 경치, 인정, 풍속 따위를 노래한 조선 시대 십이 가사의 하나로 모두 4장으로 되어 있는 죽지사도 있다.
*李德懋:조선 후기의 학자(1741~1793). 자는 무관(懋官). 호는 형암(炯庵)ㆍ아정(雅亭)ㆍ청장관(靑莊館). 박학다식하였으며 개성이 뚜렷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서출(庶出)이라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다. 청나라에 건너가 학문을 닦고 돌아와 북학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와 함께 사가(四家)라 이른다. 저서에 ≪청장관전서≫가 있다.
♣노자영의 기행문 ‘약산동대’도 있다.
*盧子泳 (1898?~1940):시인 ·수필가. 호는 춘성(春城). 황해도 장연 태생. 1919년 매일신보에 당선한 <월하(月下)의 몽(夢)> 을 비롯하여 <우애(友愛)> <우천(雨天)> 등의 시를 발표하였고, 《백조(白潮)》 의 창간동인이며 1934년 잡지 <신인문학> 을 창간하였다. 작품의 경향은 낭만적 감상주의를 한결같이 따랐지만 신선한 감각과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소설집 《무한대의 금상》, 수필집 《인생안내》등이 있다.
♣지은이
金億(1896~?):평북 정주군(定州郡) 관주면(觀舟面) 관삽동(觀揷洞)에서 부 김기범(金基範)과 모 김준(金俊)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명은 김희권(金熙權), 호는 안서(岸曙)다. 오산중학(五山中學)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경응의숙(慶應義塾) 문과에 적을 두고 당시 동경 조선유학생학우회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에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학교를 마치고 고국에 돌아와서는 모교인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이때 김소월(金素月)을 지도하게 된다.
1918년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를 통하여 투르게네프의 산문시를 직접 번역하여 게재하는 한편, 1920년에는 남궁벽(南宮璧)과 더불어 《폐허(廢墟)》의 편집동인으로도 활약하게 되며, 이후에는 《창조(創造)》에도 동인으로 참여하였다.
모교인 오산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숭덕학교(崇德學校)로 옮겼다가, 상경하여 동아일보, 경성방송국 기자 등을 지내면서 많은 민요시와 번역시를 발표해 신시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맡게 된다.
1921년에 간행된 《오뇌(懊惱)의 무도(舞蹈)》(광익서관)는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시집으로서 그 무렵의 퇴폐적인 문단 풍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23년에는 인도 타고르의 《기탄잘리(Gitanjali : 신께 바치는 노래)》를 번역 간행하는 한편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시집으로 《해파리의 노래》(조선도서주식회사)를 간행하기도 한다.…
당시의 각종 신문 잡지를 통해 발표한 글만도 6백여 편에 이른다고 하니 해방 전 기록으로는 당연 선두주자라고 하겠다. 그의 시풍은 완전히 동양적 시관과 인생관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것은 한때 퇴폐와 우울에 물들었던 그가 새롭게 자각한 세계로서 타고르와 한시를 번역하는 동안 자연스레 그의 내부에 흐르는 동양정신 및 동양인의 의식이 그를 변모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1925년을 계기로 서구지향의 문학활동에서 완전히 전통지향의 문학활동으로의 변모를 보이고 있다. 한편 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에스페란토어를 수입하여《동광(東光)》《개벽(開闢)》 등을 통하여 그 보급에 힘쓰기도 했다.
6・25동란이 일어나자 9월 10일 피랍이 확인된 이후 그 생사를 알 수가 없다.
-------------------------------------------------------------------------------------------------------
1.영변(寧邊): 평안북도 동남부에 위치한 군.
2.
묘향산(妙香山): 묘향산은 원래 영변군이었는데 지금은 향산군(香山郡)으로 분할되었다.
주봉은 비로봉(毘盧峰;1,909m), 기암과 괴봉 등 명승풍치가 둘레 160km나 되는 넓은 지역에 펼쳐져 있다. 그 중심이 되는 곳은 향산천을 거슬러 올라 닿는 보현사를 기점으로 한 지역이다.
원래 연주(延州)고을(영변)에 속한 산이라는 뜻에서 '연주산'이라고도 하고 바위들이 유달리 희고 정갈하다는 의미에서 '태백산'으로도 불리던 것을, 11세기부터 산세가 기묘하고 수려하여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특히 누운 향나무가 많아 사철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산이라 하여 묘향산이라 하였다. 천탑봉(天塔峰;1561m)은 금강산의 만물상에 버금가는 암릉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360개에 달하던 사찰이 있었던 묘향산은 아직도 북한의 불교 총림에 해당하는 대찰인 보현사(普賢寺)를 비롯해 많은 절터와 석탑 등이 남아 있다.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 休靜)과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수도를 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3.
보현사(普賢寺):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에 소재하고 있는 유서 깊은 명찰로, 968년에 창건한 한국 5대 사찰 중의 하나로, 대중은 3,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북한의 국보문화유물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산·사명대사의 영전을 모신 조사전이 있었으며, 1983년에는 팔만대장경 보관고를 현대식으로 신축하였다.
4.
동룡굴(蝀龍窟): 평안북도 구장군(球場郡) 용산면(龍山面) 남쪽에 있는 종유굴. 1928년에 발견된 북한 최대의 천연석회동굴로, 지하 금강이라고도 한다.
5.
약산동대(藥山東臺): 약산(489m)은 약초가 많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며, 동대는 ‘관서 8경’의 하나로 산마다 골짜기마다 흐드러지게 피는 진달래(>연달래)로 유명하다. 전형적 산성취락인 영변은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이고 산에는 성벽을 둘러, 철옹성(鐵甕城)이라고 하는 요지이다. 성의 서부에 있는 약산은 철옹성의 진산이며 다른 산에 비하여 험준하고 경승지로도 이름이 높다.
이종정(李鍾楨)이 지은 고전소설 이름이기도 하다. 1913년 광동서국(光東書局)에서 구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무대가 영변의 약산동대이고 주인공이 송성회(宋星會)의 아들 경필(慶弼)과 빙옥(氷玉)으로 달라졌을 뿐, 『춘향전』과 그 내용이 거의 유사한 작품이다.
6.
박행(薄倖): 박정(薄情)
7.
구현령(狗峴嶺): 평북의 분수령 산맥으로서 압록강 청천강(淸川江) 양 유역을 연락하는 통로인 적유령산맥(狄踰嶺山脈) 중에 있는 고개이다. 적유령 산맥에는 적유령(952m)·구현령(狗峴嶺:815m)·극성령(棘城嶺:654m) 등의 고개가 있다.
8.
운대산(雲臺山) 등:평북 향산군(香山郡)에 있는 산이나 고개.
9.
일부당관(一夫當關) 만부부적(萬夫不敵):한 사람의 파수병이 관문을 지켜 만 명을 막아낸다는 뜻으로 지세(地勢)가 극히 험준하여 수비하기가 아주 용이함을 이름.
10.
관서팔경(關西八景)
仁風樓:독로강(禿魯江)과 북천강의 합류 지점에서 이루어 낸 높은 벼랑 위에 동향으로 세워진 누각이다. 정면인 동쪽에서 보면 1층이지만 서쪽은 독로강을 향하여 기울어진 자연 경사면을 그대로 살려 2층으로 되었다. 정면 오른쪽에서 3번째 기둥을 생략하여 안에서 바라볼 때 정면의 시야를 트이게 한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인풍루가 장대(將臺)인 때문으로 앞마당을 잘 내려다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건물 내부에 전혀 기둥을 세우지 않고 통간으로 처리한 이유도 같다.
洗劍亭:압록강 기슭 아스라이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세워졌다. 조선 인조 때 오랑캐의 침입을 물리친 박남여(朴南輿)의 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다. 싸움이 끝난 뒤 박남여가 이곳에서 피 묻은 칼을 씻었다 하여 세검정이라 한다. 압록강 건너 만주벌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統軍亭:한국 누각건물을 대표하는 유적의 하나이다. 선조 때 명나라 원군이 강을 건너기를 주저하므로 왕이 이들을 재촉하기 위하여, 빈 독에 입을 들이대고 통곡을 함으로써 명나라 군사들에게 용의 울음소리로 들리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서 일명 통곡정(痛哭亭)이라고도 한다.
東林瀑:성안에 용천(湧泉)이 다섯 개 있는데, 이 물이 동쪽으로 흘러 높이 약 10m의 동림폭포를 이룬다. 폭포수는 구슬같이 맑고 아름워서 옥포(玉浦)라고도 부른다.
百祥樓:청천강(淸川江)을 바라보는 절경에 위치해 있으며, 진주 촉석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누각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611년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대첩(薩水大捷)을 치른 곳이기도 하다.
練光亭:대동문(大同門)과 접하여 대동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덕암(德巖) 위에 있다. 중국의 사신이 오고갈 때마다 이곳에서 주연이 베풀어졌고, 선조 때에는 강화담판을 한 곳으로도 유명하며, 기생 계월향(桂月香)이 일본의 부장을 꾀어 끌어안고 떨어진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빼어난 절경으로 안주의 백상루, 의주의 통군정과 함께 평안도의 3대 명각으로 꼽힌다.
降仙樓:평안남도 성천군 성천읍의 비류강가에 있는 누각. 강선루는 성천객사(成川客舍)의 부속건물로서 중국 사신을 맞기 위해 연회장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성천객사의 본채인 동명관(東明館)의 북쪽에 있던 누각인데, 아래로 대동강의 제1지류인 비류강이 흐르고 강 건너에는 홀골산 12봉의 절경이 펼쳐져 있다. 워낙 규모가 커서 한번에 1천 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여서 '해동 제1루'라 불리기도 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광에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비루강의 맑은 물에 머리를 감았다는 이야기가 전하여 강선루라 불렸다. (네이버 백과사전)
藥山東臺: 전주(前注) 5 참조.
*참고: ‘소금장수의 백상루 구경’
안주(安州) 백상루(百祥樓)는 빼어난 풍경을 지닌 관서 지방의 누각이다. 중국 사신이 오거나 우리나라 사람이 공무로 지나가게 되면, 누구든지 이 누각에 올라 풍경을 감상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덕수(德水) 이자민(李子敏, 이안눌)이 “수많은 산들이 바다에 이르러 대지의 형세는 끝이 나고, 꽃다운 풀밭이 하늘까지 이어져 봄기운은 떠오른다.”라고 시로 읊은 곳도 바로 이곳이다.
어떤 상인이 소금을 싣고 가다가 이 누각을 지나게 되었다. 때는 겨울철로 아침 해가 아직 떠오르기 전이었다. 상인은 누각 아래 말을 세워 놓고 백상루에 올라서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그저 보이는 것이라곤 긴 강에 깔린 얼음장과 넓은 들을 뒤덮은 눈뿐이었다. 구슬픈 바람은 휙휙 몰아오고, 찬 기운은 뼈를 에일 듯 오싹해서 잠시도 머물 수 없었다. 그러자 상인은 “도대체 백상루가 아름답다고 한 게 누구야?”라고 탄식하며 서둘러 짐을 꾸려서 자리를 떴다.
저 백상루는 참으로 아름다운 누각이다. 하지만 이 상인은 알맞은 철에 놀러 오지 않았으므로 그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듯이 모든 사물에는 제각기 알맞은 때가 있으며, 만약에 알맞은 때를 만나지 않는다면, 저 백상루의 경우와 다름이 없게 되는 것이다.
여우 겨드랑이 털로 만든 가죽옷은 천하의 귀한 물건이지만 무더운 5월에 그것을 펼쳐 입는다면 가난한 자의 행색이 되며, 팔진미(八珍味)가 제 아무리 맛이 좋은 음식일지라도 한여름에 더위 먹은 사람을 구하지는 못한다. 황금과 구슬, 진주와 비취는 세상 사람들이 보석이라고 일컫는 물건이지만, 돌보지 않아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방안에서 그런 황금과 옥으로 치장을 하고 앉아 있다면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농사짓는 집의 여인이 짧은 적삼에 베치마를 입었으면서 그 위에 구슬과 비취로 만든 머리 장식을 하고 있다면 비웃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
무릇 이러한 것들이 다 겨울에 백상루를 구경한 소금장수와 다르지 않다.
-선조 광해군 연간의 선비 권득기(權得己)의『만회집(晩悔集)』중「염상유백상루설(鹽商遊百祥樓說)」에서
11.
이광한(李光漢: ?∼1689[숙종 15]). 조선 후기의 무신. 1680년(숙종 6)에 체부병방(體府兵房)으로 있으면서 어영대장 김익훈(金益勳)의 심복이 되어, 허견(許堅)의 집을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정탐하고 승정원에 나아가 역모를 고변하게 하여 이른바 허견의 옥을 일으킴으로써 남인 세력을 일망타진하는 데 공을 세워, 영변부사가 되었다. 이때 영변부의 약산성(藥山城)·철옹성(鐵甕城) 등을 보수, 증축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몰려나고 남인이 집권하자 참형을 당하였고, 공훈도 삭탈되었다가 1694년에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복작되었다.
12.
서가(西駕):서천(西遷)이라고도 한다. 개경, 평양을 거쳐 영변, 의주(義州)로 몽진(蒙塵)한 일을 말함이다.
13.
이괄(李适): 조선조 16대 인조 때의 대장(?~1624). 1622년의 인조반정에 큰 공을 세웠으나 김류(金瑬)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평안병사(平安兵使)로 영변에 있게 되자 불만을 품고 인조 2년(1624)에 반란을 일으켜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신왕으로 세웠으나 불과 하루 만에 관군에게 패하여 피살됨.
14.
장만(張晩): 조선 중기의 문인(1566-1629). 인조반정 때 팔도도원수로 뽑혀,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그 공으로 보국(輔國)에 오르고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군됨.
15.
이괄이 꽹가리: 이괄이 왕에 반기(反旗)를 들고 길마재에서 결전할 즈음, 전세가 불리하여 꽹가라를 울리어 진세(陣勢)를 바꾸려 할 때에 이를 본 관군이 일제히 ‘이괄이 패하였다’고 외치는 바람에 괄의 군심(軍心)이 크게 동요하여 패주한 데서 온 말로, 운수가 막혀 버리면 할 수 없다는 뜻.
16.
볼만이: 보기만 하고 참견하지 않는 사람.
'고전 강독(성남문화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도해기(多島海記) (0) | 2013.01.06 |
---|---|
문학교실2. [현대걸작기행선]5. 남한산성(南漢山城) (0) | 2012.12.03 |
金剛山遊記 중 毘盧峰 (0) | 2012.10.12 |
백두산 근참기(白頭山 覲參記) 崔南善 (0) | 2012.10.04 |
고전강독 22[현대 걸작 기행선]1 (0) | 2012.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