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講 24. [현대 걸작 기행선]3 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hwp
고전강독 24. [현대걸작기행선]3
☆金剛山遊記 중 毘盧峰
李光洙
묘길상(妙吉祥)
수미암(須彌庵)에서 돌아오니 마하연(摩訶衍)에서 반야경(般若經) 공부하던 승니(僧尼) 20여 명이 그날 비로봉에 다녀왔다기로 좋은 동행을 잃은 것을 한탄하였으나 자고 나면 우리 부부끼리만이라도 비로봉으로 가리란 작정을 하였습니다.
새벽재 올리는 염불 소리에 잠을 깨어 조반을 마치고 표훈사(表訓寺)에서 특별히 주문해 온 지로자(指路者)에게 점심을 지우고 마하연을 떠난 것은 오전 7시. 일기는 청명한 편이나 사승(寺僧)들은 7월 일기의 믿지 못할 것과 더우기 금강산 청우(晴雨)는 골짜기를 따라 다른 것과 작일에도 평지에는 청명하였으나 비로봉 상에는 운무가 끼어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것을 말하고 우리 일행의 전로(前路)를 비관합니다. 나는 "내가 올라가면 반드시 운산무소(雲散霧消)하여 비로봉의 승경을 보고야 말리라"하는 말로 승니들을 웃기고 떠났습니다. 밤과 새벽은 심추(深秋)처럼 찼으나 일각(日脚)이 점점 으르매 땀이 흐르려 합니다. 동을 향하매 두어 굽이 시내를 건너면 묘길상(妙吉祥)의 대석불이니 천연의 거암의 남향한 반면을 깎아내고 부조로 대불을 새겼는데 어른이 그 밑에 가서 팔을 활짝 들어야 결가(結跏)한 그 무릎이 만져질 만하고 발바닥 길이가 열두 뼘이나 되니 이 부처에게 신길 버선이 있다 하면 그 속에 두 사람은 들어가 누울 것이외다. 과연 어마어마하게도 큽니다.
이것은 저 삼불암(三佛岩)에 삼불을 새긴 나옹대화상(懶翁大和尙)의 작이라 하니 5백 년 풍상을 겪은 것이외다. 그 착상이나 수법에 별로 신기한 점은 없는 듯하나 그 절구(絶搆)의 웅대함이 또한 당시 선인들의 기백을 보이는 듯합니다.
나는 여기서 종교미술이 나오는 경로, 또 모든 예술가의 잡을 태도를 봅니다. 금강산 내로 말하여도 그 모든 건축과 조각과 회화가 거의 다 승려의 손으로 되었고, 그뿐 아니라 금강산을 찾아 거기 길을 닦고 봉(峰)과 동(洞)의 이름을 지은 필(筆)을 들고 상을 새기기 위하여 일생에 끌을 잡습니다. 그네는 명산대찰로 돌아다니면서 혼자 생각하고 배우고 익혀 어디서 좋은 바윗돌이나 만나거든 거기 불상을 새길 생각을 냅니다. 그는 그날부터 백일원(百日願)이나 천일원(千日願)을 세워 그곳에 암자를 맺고 제가 동냥해 온 쌀로 제 손으로 밥을 지어 먹고 제 손으로 옷을 지어 입고 그리고는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새깁니다. 그의 맘에는 세상의 아무 욕망도 없고 초려(焦慮)도 없이 오직 정(釘)소리를 따라 석면에 귀가 생기고 눈이 생기고 마침내 머리가 생기고 하는 것을 보고 즐기며 즐거울 때에 소매로 이마에 땀을 씻으면서 나무아미타불을 부릅니다. 이리하여 백 일이나 천 일만에 그 공이 성하거든 넘치는 법열을 못 이기어 자기가 새겨 놓은 불상 앞에서 합장하고 꿇어 엎딥니다. 그리고 그는 세상을 버리고 그의 법열에서 나온 불상이 천세에 전하여 만민에게 부처를 생각할 기회를 주는 것이외다. 진실로 이것은 그의 전 재산이요, 명예요 생명이외다. 나도 일생의 사업을 할 때에 이러한 태도로 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윽히 묘길상의 위대한 불상을 쳐다보고 노승이 석양을 측면으로 받으면서 그것을 새길 때의 심리를 상상하였습니다.
눈물겨운 길안내 돌무더기
거기서 수정(數町)을 가면 사선교(四仙橋) 좀 못 미쳐서 갈랫길이 있으니 우는 안무재를 통하여 유점사(楡岾寺)로 가는 길이요, 좌는 우리가 목적하는 비로봉으로 가는 길이외다. 비로봉 길에 들어서면 겨우 발자취가 보일 만한 소로니, 소로는 소로로되 천수백 년 옛길이오 명승지식(名僧知識)이 한 번씩은 다니던 길이외다. 계류를 끼고 5리나 올라가노라면 게서부터는 길이라 할 만한 길이 없고 마주 붙은 산협물에 닳아져 둥그렇게 된 돌로 된 시내 바닥으로 이 돌에서 저 돌로 성큼성큼 건너 뛰어가게 되었는데 가다가다 바윗등에 돌무더기가 유일한 지로(指路)외다. 성큼성큼 가다가는 두리번두리번 돌무더기를 찾고 이리하여 양장(羊腸) 같은 골짜구니를 추어오릅니다. 이 돌무더기는 금강산길 도처에 있다는 것이니 이 역시 누군지 모르는-먼저 간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후에 오는 사람을 위하여 '이리 가면 갈 수 있다'하는 지로표로 쌓은 것이외다. 대개는 갈랫길이나 구부러지는 곳에 가장 눈에 띄울 만한 큰 바위 위에 하는 것인데 혹은 긴 돌을 세우기도 하고 혹은 작은 돌을 놓기도 하는데 그 지점의 중요한 정도를 따라 혹 주먹만 한 돌을 하나만 놓은 곳도 있고 둘이나 셋 놓은 거기를 지나갈 때에 그 돌무더기의 고마움을 깨달은 사람들이 하나씩 집어 보탠 것인 듯합니다. 그중에 어떤 것은 올라가기 어려운 큰 바위 위에 한 짐 잔뜩 될 만한 큰 돌을 세워놓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아마 어떤 힘세고 산길 많이 다녀 본 중이 꽤 품과 힘을 들여서 한 것일 듯합니다. 그것을 쳐다보면 그 사람의 모양이 보이는 듯하고 인생의 아름다운 성질의 일면이 생각돼 눈물이 흐를 듯합니다. 이것은 저 대도회에 수만 원의 금전을 들여서 세운 대리석비보다도 귀한 것이외다. 이 돌을 세운 사람의 그것을 세울 때의 맘은 이름을 천추만세에 전한다는 영웅의 맘보다도 존귀한 것이외다. 동포여, 저 돌무더기를 보시오. 그리고 그 돌을 세우던 손과 사람을 상상해 보시오. 어떻게나 사랑스러웁고 아름다운가. 이 지상에 왕국을 세울 것은 오직 이러한 맘이외다.
참말 이러한 무인지경에서 유일한 사람의 자취인 돌무더기를 대할 때에는 참된 하느님의 아들인 인정의 불길에 내 몸이 타는 듯합니다. 더우기 어떤 돌무더기는 몇백 년 아마 천몇 백 년 전 것인지 이끼가 쌓이고 쌓이어 그 일종 비창한 감정을 일으킵니다. 인생길도 이와 같아서 이름 높은 영웅이 세운 제국보다도 이름 없는 사람의 돌무더기를 따라 억조의 창생이 길을 찾아 가는 것이외다.
인생의 험한 길에
뉘 쌓은고 돌무더기
행인의 뿌린 눈물
이끼되어 쌓단 말가
인자의 알뜰한 정을
못내 그려 하노라
비로봉 가는 길을
누구누구 지내던고
이끼 싼 돌무더기
그네 끼친 자취로다
우리도 그 길을 따라
가옵고저 하노라
짙은 운무 속 급사면 낙석지대서 길을 잃다
이런 길로 5리나 올라가면 갈랫길이 생깁니다. 갈랫길이란 물론 두 골짜기로 갈라진단 말이외다. 하나는 북으로 뚫렸으니 이것이 비로봉으로 가는 길이오, 하는 서로 뚫렸으니 이것은 중향성(衆香城) 뒷골목으로 들어가는 길이외다. 이 골목이 보기에 심히 유수하여 그 좁은 골목 어구도 멀리 서쪽에 아아(峩峩)한 백두봉(白頭峰)들이 보입니다. 이야기에 흔히 있는 것과 같이 별천지가 열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동천이 운무에 잠겨 자세한 참모습을 엿볼 수가 없으니 그것이 도리어 다행일는지 모릅니다.
여기서부터 계곡의 구배(勾配)가 점점 급하게 되고 구름에 떨어진 조각이 가끔 머리 위로 날아 지나갑니다. 여기서 봉두(峰頭)가 아직도 10리는 넘는다는데 시내에 물은 끊어지고 운무는 점점 깊어갑니다. 우리는 끝없는 층층대를 오르는 모양으로 간저(澗底)의 돌을 건너뛰고 기어올라 거의 발이 흙을 밟을 기회가 없이 올라갑니다. 이리하기 약 1시에 한 곳에 다다르니 시내가 이미 끝이 나고 깎아 세운 벽인데 다만 지척에 산 무너진 바위떼와, 껍질 벗겨진 산의 일부분이 암무(暗霧)에 희미하게 보일 뿐이요 어디가 어딘지 방향을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이따금 바람결게 암무의 한 조각이 떨어져 산의 암만(巖巒)(바위봉우리) 일부분이 번쩍 보이나 마치 캄캄한 밤 번개빛에 무엇을 보는 듯하여 눈이 현혹할 뿐인데 안내는 노인은 길을 잃고 두리번거립니다.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껍질 벗겨진 언덕으로 기어올랐으나 하도 미끄럽고 발붙일 곳이 없으며 게다가, 언제 바윗돌이 굴러내려 내 몸을 바술는지 아직 이끼 앉지 아니한 돌들이 내려오던 길에 무엇에 걸렸는지 중턱에 앉은 것을 보면 내 발자국 울림에도 금시에 달려 내려와 선경의 침입자를 가루를 만들려고 벼르는 것 같습니다. 땅이 생긴 법이 눈앞에 굴러오는 돌을 뻔히 보고도 우뚝히 선 대로 받을 수밖에 없이 되었습니다. 한발만 깨닥 잘못 놓으면 배밀이 코밀이로 걷잡을 수 없이 저 밑에까지 굴러내리게 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4, 50보나 기어 올라간 데서 주먹만 한 돌이 총알같이 굴러 내려오는 것을 내 처는 "에그머니 이를 어찌해"하고 소리를 지를 뿐이고 피할 수는 없어 우뚝 선 대로 손을 내밀어 오른 손 새끼손가락 하나를 희생으로 삐게 하고 생명은 도로 찾은 일이 있읍니다.
이 모양으로 어두운 안개를 뚫고 절벽을 추어오르니 어떤 양봉(兩峰)이 합하여 그것을 연결한 암벽이 있는데 비만 오면 그리로 폭포가 떨어질 모양이오, 그 4, 5장(丈)이나 되는 암벽 위는 양봉 간의 동구(洞口)가 되었는데 거기를 들어가면 또한 일 천지가 있을 듯하나 안개에 막혀 지척을 불변이오, 이따금 바람이 부딪쳐 반향하는 소리가 귀곡성같이 처량하게 울려올 뿐이외다. 참말 지옥인지 천당인지 모를 이 무서운 광경 중에 제 몸을 두고 보니 경이와 공포를 합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그윽히 흉중에 일어납니다.
"여보, 어느 게 길이오?"하고 나는 화를 내어 안내자를 재촉하였으나 그는 "여길 텐데"하고 점심 보퉁이를 지고 어물거릴 뿐이오, 운무는 더욱 깊어져서 4,5보밖에 잘 보이지 아니합니다. 저 4, 5장 되는 석벽을 기어오를 것인가 그렇다 하면 그 근방에 돌무더기의 지로표가 있을 것이거늘 아무 데를 보아도 인적이라고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가도 오도 못하고 우리는 불의에 굴러오는 돌멩이를 피하노라고 큰 바위 밑에 소두룩이 쭈그리고 앉았읍니다.
이윽고 길 찾으러 갔던 안내자가,
"여보오, 여기 길이 있소"하고 외칩니다. 소리 오는 방향은 동쪽인 줄 짐작하겠으나 그 사람의 모양은 보일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요?" 하고 외쳤습니다. 그 대답이
"여기요, 이리로 오시오"합니다. 우리는 여러 번 속은 데 열이 나서,
"그것은 정말 길이오?" 하였습니다. 그는
"정말 길이야요, 돌무더기가 있어요" 합니다. 돌무더기가 있다 하니 의심할 것도 없습니다.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금사다리
그런데 소리 오는 방향으로 갈 일이 걱정이외다. 우리는 "어디요?"를 연해 부르면서 가까스로 수십 보를 옮겨 놓으니 멀리 바위 위에 혼령 같은 안내자의 모양이 거인과 같이 보입니다. 기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오 바로 5,6보밖에 섰는 것이외다. 수만 개의 집채 같은 바위를 산정에서 굴려 그것이 차곡차곡 쌓인 듯한 것인데 이것이 유명한 금사다리외다. 산 일면에는 넝굴향 등 고산식물이 깔리고 거기 폭이 10보는 될 만한 바위로 된 길이 은하모양으로 쏜 살같이 산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사다리를 조성한 바위들은 모두 불 속에서 꺼낸 듯한 자색(赭色)인데다가 황금색 이끼가 덮여서 과연 금사다리란 말이 허언이 아니외다. 서서 아래를 굽어보면 사다리는 깊이깊이 안개 속으로 흘렀고 우러러 보면 높이높이 하늘 위로 올랐습니다. 아마 어느 봉 하나가 무너져 그것이 일자로 내려 흘러 이 사다리를 이룬 것인 듯합니다. 그렇더라도 어쩌면 이렇게 신통하게 일필련(一匹練)을 늘여놓은 듯이 되어 사람들이 올라가는 길이 되게 합니까.
구약성경에, 야곱이 꿈에 본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가 종교화에 그려있지마는 그것은 너무 인공적이라, 천제(天梯)는 반드시 이 모양으로 되었을 것이외다.
웃노라 옛사람을
바벨탑이 부질없네
만층의 금사다리
예 있는 줄 모르던가
알고도 찾는 이 적으니
그만 한(恨)이 없소라
태초라 금강산에
금봉 은봉 있것더라
금봉 헐어 금사다리
은봉 헐어 은사다리
하늘에 오르는 길을
이리하여 이루니라
하늘에 오르는 길이
어찌어찌 되었더냐
금사다리 만층 올라
은사다리 만층 올라
백운(白雲)을 뚫고 소스라쳐 올라
동북으로 가옵더라
우리는 사다리를 올라갑니다. 다리를 힘껏 벌려야 겨우 올려 드릴 만한 데도 있고 두 손으로 바위 뿌다귀를 꼭 붙들고 몸을 솟구쳐 오를 만한 곳도 있고 혹은 큰 바위 틈바구니로 손, 어깨, 무릎, 발, 옆구리를 온통 발 삼아서 벌레 모양으로 굼틀굼틀 올라갈 데도 있고, 혹 아름이 넘는 바위를 안고 살살 붙어 돌아갈 데도 있고, 혹 넓적한 바위가 덜컹덜컹해서 소름이 쪽쪽 끼치는 데도 있고, 혹 꽤 넓은 바위틈의 허공을 엇차 하고 건너뛸 데도 있지마는 결코 위험한 길은 아니외다. 다만 대부분이 네 발로 기어오를 데요 두 발로 걸을 데는 없습니다. 그래서 한 층을 기어올라서는 우뚝 서고, 한 걸음이나 두 걸음 가서 또 한 층을 기어 올라서는 우뚝 서고 이 모양임으로 도리어 피곤한 줄은 모르겠읍니다. 그러나 네 발로 길 곳이 많으므로 얼마 안가서 지팡이는 길가에 던졌습니다. 산길이나 인생길이나 높은 데를 오르려면 몸에 가진 모든 것을 내어버리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인 듯합니다.
한 층대 한 층대
금사다리 오를 적에
앞길은 구름에서 나오고
온길은 안개 속으로 드네
길이야 끝이 없어라마는
올라갈가 하노라
하늘이 높삽거든
가는 길이 평(平)하리까?
가는 길이 험하오매
몸가볍게 하올 것이
두벌 옷 무거운 전대를
버리소서 하노라
백설이 덮인 듯한 은사다리
이렇게 30분가량이나 올라가면 끝이 없는 듯하던 금사다리는 이에 끝나고 거기서 동으로 넝굴향을 헤치고 십수 보를 가면 백설이 덮인 듯한 은사다리가 시작됩니다. 생긴 모양은 금사다리와 다름이 없으나 다만 돌이 전부 은색의 이끼에 덮여서 올려다보니 과연 은하와 같습니다. 더우기 좌에는 고산지대에 새파란 상록목이 모두 넝굴이 되어 잔디모양으로 산복을 덮은데다가 한 줄기 은색 사다리가 구름에 닿았으니 그 신비하고 장엄한 맛이 비길 데가 없습니다. 금사다리에는 아직도 진세(塵世)의 탁기(濁氣)가 있지마는 은사다리에 이르러서는 일점의 진기가 없고 그 청수(淸秀)함이 진실로 옥경(玉京)에 가까운 듯합니다. 사람도 이와 같아서 금사다리를 오르는 동안에 장부(臟腑)에 사무친 진세속념(塵世俗念)을 다 떨어 안개에 부쳐 날리고 은사다리에 이르매 청상(淸爽)한 선기(仙氣)가 골수에 삼투함을 깨달읍니다. 천상 선관(仙官)들도 은사다리 끝 층계까지밖에는 안 내려오는 듯합니다.
예서부터 더욱 운무가 두터워져서 참말 지척을 분변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발부리만 보면서 30분이나 올라가면 끝없는 듯한 사다리도 이에 끝나고 참암(巉巖)으로 된 영상(嶺上)에 올라섭니다. 영랑봉과 비로봉을 연락한 맥인데 영랑봉을 말 궁둥이, 비로봉을 말머리라 한다면 여기는 말안장을 놓은 데라 하겠습니다. 일기가 청랑하면 전후로 안계가 넓겠지마는 농무 중에 보이는 것은 오직 사방 십수 보 내외외다. 등성이에 올라서자 어떻게 남풍이 몹시 부는지, 산 밑으로서 올려 쏘는 바람에 몸이 날아날 듯합니다. 이따금 그 중에도 굳센 바람결에 영두(嶺頭)의 운무의 일부분이 찢어져 병풍 같은 석벽이 발 아래 번쩍 보일 때에는 몸에 소름이 끼쳐 어쩌다가 우리가 이런 곳에 왔나 하는 한탄이 날 만합니다. 그러나 6천척이나 되는 영두에서 바람에 옷자락을 날리며 운무 중에 섰는 쾌미는 오직 지내본 이라야 알 것이외다.
우리는 말의 등심뼈라 할 만한 바위로 된 마르텡이 길로 광대가 줄 타는 모양으로 두 팔을 벌려 몸의 중심을 잡으면서 십수 보를 가다가 "지금 봉두에 올라가더라도 운무 중에 아무 것도 안 뵐 터이라"하는 안내자의 말에 우리는 큰 바위 밑 바람 없는 곳을 택하여 다리를 쉬기로 하였습니다. 벌써 11시반, 마하연서 여기 오는 길 30리에 4시간 이상이 걸린 셈이니 길만 잃지 아니하면 3시간이면 올 듯합니다. 점심을 먹자하니 추워서 몸이 떨리므로 얼른 탐험자의 고지(故智)를 배워 이슬에 젖은 자고향(自枯香) 가지를 주워다가 도시락 쌌던 신문지를 불깃으로 간신히 불을 피어놓고 모두 둘러 않아서 일변 수통의 물과 벤또를 데우며 일변 몸을 녹였습니다. 검붉은 불길이 활활 붙어 오를 때 이는 무슨 번제(燔祭)의 성화 같은 생각이 납니다. 우리는 제사장이요, 비로의 봉두에 올라 운무의 장막 속에 자고향을 피우고 천하만민의 죄의 사유(赦宥)를 비는 거룩한 하늘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닌가 하였습니다. 나는 극히 엄숙한 맘으로 불길을 따라 하늘을 우러러 보며 창생을 염하였습니다. 아아 원하옵나니 나로 하여금 이몸을 저 불속에 던져 만민의 고통을 더는 제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거룩한 산
신비한 운벽(雲霹)의 장막 속에
검붉은 불길이 오른다.
내가
두팔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창생(蒼生)을 염할 때에
바람이 외치며 불어와
흰 옷 자락을 날린다.
아아 천지의 주재(主宰)여!
이 산과 운무와 바람을 내신 이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내 몸을 번제물로 받으소서!
깨끗한
당신의 세계가
왜 죄악으로 더러웠습니까
숭엄코 평화로운
당신의 전(殿)에
어찌하여 죽음의 부르짖음과
피눈물이 찼습니까?
어찌하여
아아 어찌하여
약속하신 카난의 복지와 미새야
안주십니까?
봅시오!
저 검붉은 불길을 봅시오!
거기서 당신의 보좌를 향하고 오르는
뜨거운 연기(煙氣)를 봅시오!
그것이
버리신 당신의 백성의
가슴에서 오른 것이외다, 가슴에서!
우러른 내 얼굴에
대답을 주소서
치어든 내 손에
구원의 금인(金印)을 나리소서
아아 천지의 주재자시어!
우리는 점심을 먹고 이럭저럭 한 시간이나 넘게 기다렸으나 인(因)해 운무가 걷지를 아니합니다. 나는 새로 2시가 되면 운무가 걷히리라고 단언하고 그러나 운무 중에 비로봉도 또한 일경(一景)이리라 하여 다시 올라가기를 시작했습니다. 동으로 산령을 밟아 줄타는 광대모양으로 수십 보를 올라가면 산이 뚝 끊어져 발 아래 천인절벽이 있고 거기서 북으로 꺾여 성루 같은 길로 몸을 서편으로 기울이고 다시 수십 보를 가면 뭉투룩한 봉두에 이르니 이것이 금강 1만 2천봉의 최고봉인 비로봉두외다. 역시 운무가 사색(四塞)하여 봉두의 바윗돌 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 바윗돌 중에 중앙에 있는 큰 바위는 배바위라는데 배바위라 함은 그 모양이 배와 같다는 말이 아니라 동해에 다니는 배들이 그 바위를 표준으로 방향을 찾는다는 뜻이라고 안내자가 설명을 합니다. 이 바위 때문에 해마다 여러 천명의 생명이 살아난다고, 그러므로 선인들은 이 멀리서 이 바위를 향하고 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기봉의 바다위에 평범으로 높은 봉우리
이 안내자의 말이 참이라 하면 과연 이 바위는 거룩한 바위외다. 바위는 아주 평범하게 생겼습니다. 이 기교(奇矯)한 산령에 어떻게 평범한 바위가 있나 할이만큼 평범한 그 둥그러한 바위외다. 평범, 말이 났으니 말이지 비로봉두 자신이 극히 평범합니다. 밑에서 생각하기에는 비로봉이라 하면 설백색의 일극(釰戟) 같은 바위가 하늘 찌르고 섰을 것 같이 생각하더니 올라와 본즉 아주 평평하고 흙 있고 풀 있는 일편의 평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거기 놓인 바위도 그 모양으로 아무 기교함이 없이 평범한 바위외다. 그러나 평범한 이 봉이야말로 1만2천중에 최고봉이오 평범한 이 바위야말로 해마다 수천의 생명을 살리는 위대한 덕을 가진 바위외다. 위대는 평범이외다. 나는 이에서 평범의 덕을 배웁니다. 평범한 저 바위가 평범한 봉두에 앉아 개벽 이래 몇천만 년에 말없이 있건마는 만인이 우러러보고 생명의 구주(救主)로 아는 것을 생각하면 절세의 위인을 대하는 듯합니다. 더구나 그 이름이 문인시객이 지은 공상적 유희적 이름이 아니요 순박한 선인들이 정성으로 지은 '배바위'인 것이 더욱 좋습니다. 아마 이 바위는 문인 시객의 흥미를 끌 만하지 못하리라마는 여러 십 리 밖 만경창파로 떠다니는 선인의 진로의 표적이 됩니다.
배바위야 네 덕이 크다
만장봉두(萬丈峰頭)에 말없이 앉아 있어
창해에 가는 배의
표적이 된다 하니
아마도 성인의공이
이러한가 하노라
만이천봉이
기(奇)로써 다툴 적에
비로야 네가 홀로
범(凡)으로 높단말가
배바위 이고 앉았으니
더욱 기뻐하노라
신천지의 제막식인가
이윽고 2시가 되니 문득 바람의 방향이 변하며 운무가 걷기 시작하여 동에 번쩍 일월출봉이 나서고 서에 번쩍 영랑봉의 웅혼한 모양이 나오며 다시 구룡연 골짜기의 봉두들이 백운 위에 드러나더니 문득 멀리 동쪽에 심벽한 동해의 파편이 번뜩번뜩 보입니다. 그러다가 영랑봉 머리로 고고(杲杲)한 7월의 태양이 번쩍 보이자 운무의 스러짐이 더욱 속(速)하여 그러기 시작한 지 불과 4,5분 시에 천지는 그물로 씻은 듯한 적나라(赤裸裸)가 아니라 청나라(靑裸裸)한 모양을 드러내었습니다. 아아 그 장쾌함이야 무엇에 비기겠습니까. 마치 홍몽(鴻濛) 중에서 새로 천지를 지어내는 것 같습니다.
"나는 천지창조를 목격하였다."
또는
"나는 신천지의 제막식을 보았다."
하고 외쳤읍니다. 이 맘은 오직 지내 본 사람이야 알 것이외다.
흑암한 홍몽 중에 난데없는 일조광선(一條光線)이 비치어 거기 새로운 봉두가 드러날 때 우리가 가지는 감정이 창조의 기쁨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나는 창조의 기쁨에 참여하였다.'
하고 싶습니다.
홍몽(鴻濛)이 부판(剖判)하니
하늘이요 땅이로다
창해(滄海)와 만이천봉
신생(新生)의 빛 마시올 제
사람이 소리를 높여
창세송(創世頌)을 부르더라
천지를 창조하신 지
천만년가 만만년가
부유(蜉蝣) 같은 인생으로
못뵈옴이 한일러니
이제나 지척에 뫼셔
옛 모양을 뵈오니라
진실로 대자연이
장엄도 한저이고
만장봉(萬丈峰) 섰는 밑에
만경파(萬頃波)를 놓단 말가
풍운의 불측한 변환(變幻)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참말 비로봉두에 서서 사면을 돌아보건대 대자연의 웅대, 숭엄한 모양에 탄복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봉의 고(高)는 겨우 6천 9척에 불과하니 내가 5척 6촌에서 이마 두 치를 감하면 내 눈이 해발 6천 4백 4촌에 불과하지마는 첫째는 이 봉이 1만 2천봉 중에 최고봉인 것과, 둘째, 이 봉이 바로 동해가에 선 것 두 가지 이유로 심히 높은 감각을 줄 뿐더러 그리도 아아(峨峨)하던 내금강의 제봉이 저 아래 2천 척, 내지 3, 4천 척 밑에 모형지도 모양으로 보이고 , 동으로는 창해가 거리는 40리는 넘겠지마는 뛰면 빠질 듯이 바로 발 아래 들어와 보이는 것만 해도 그 광경의 웅장함을 보려든 하물며 사방에 이 봉높이를 당한 자 없음으로 안계가 무한히 넓어 직경 수백 리의 일원(一圓)을 일모(一眸)에 부감하니 그 웅대하고 장쾌하고 숭엄한 맛은 실로 비길 데가 없습니다.
비로봉 올라서니
세상만사 우스워라
산해만리(山海萬里)를
일모(一眸)에 넣었으니
그따위 만국도성(萬國都城)이
의질(蟻垤)에나 비하리오
금강산 만 이천봉
발 아래로 굽어보고
창해의 푸른 물에
하늘 닿은 곳 찾노라니
청풍(淸風)이 백운(白雲)을 몰아
귓가으로 지나더라
비로봉에서 보는 승경 중에 가장 장쾌한 것은 동해를 바라봄이외다. 모형지도와 같은 외금강, 고성지방을 새에 두고 푸르다 못하여 까매 보이는 동해의 끝없는 평면의 이쪽은 붓으로 그은 듯 선명한 해안선으로 구획되고 저쪽은 바다빛과 같은 하늘과 용합(溶合)하여 이윽히 바라보매 어디까지가 하늘이요, 어디까지가 바다인지를 알 수 없으며, 물결 안 보이는 푸른 거울면에 백 수점의 범선이 떠 있는 양은 참으로 장하다 할까, 신비하다 할까,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창해의 끝없음이
나의 맘이요
푸르고 반듯함이
나의 뜻이니
활달하고 심원한
창해의 덕은
무궁하고 무한한
하늘과 합해
백천(百川)을 다 받으되
넘침이 없고
만휘(萬彙)을 다 먹이되
줄음이 없네
가다가 폭풍마저
노한 물결이
하늘을 치건마는
본색(本色)은 화평(和平)
암자 짓고 일생을 보내고 싶어라
만일 이곳에 우물을 얻을진댄 한 암자를 짓고 일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진실로 그렇다 하면 신선이나 다르랴. 그래서 세속의 시끄럽고 더러움과 인연을 끊고 창해와 하늘과 백운과 청풍으로 벗을 삼아 일생을 마치고 싶습니다.
이곳의 지형이 영랑봉(永郞峰)을 서단, 비로봉을 동단, 아 양봉을 연결한 척골(瘠骨)로 남변을 삼고 북으로 완완히 경사한 일 고원을 이뤘는데 그 주위가 10리는 넉넉할 듯하고 그 고원 일면에는 향과 자작나무가 밀생하여 마치 목초장을 바라보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 나무들이 평지의 나무와 달라 키는 5,6척에 불과하고는 모두 덩굴이 되어 서로 얽히었으므로 도저히 그 속으로 사람이 헤어날 수는 없습니다. 반공(半空)에 얹어 놓은 나무바다! 진실로 기관이외다. 만일 이 나무를 베어내면 여기 훌륭한 절터가 될 것이요, 이 고원의 한복판 우무거리에서는 청렬(淸冽)한 음료수를 얻을 것 같습니다. 어느 도승이 여기다 일 사를 창건하지 아니하려나. 그리고 이 넓은 마당에 1만 2천 권속(眷屬)을 모으고 반야경(般若經)을 설할 보살은 없나.
아아 아무리 하여도 비로봉의 절경을 글로 그릴 수는 없습니다. 아마 그림으로 그릴 수도 없을 것이외다. 몽상 외의 광경을 당하니 다만 탄미의 소리가 나올 뿐이라 내 붓은 아직 이것을 그릴 공부가 차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볼 만하고 남에도 말할 만하지 아니하니 내가 할 말은 오직,
비로봉 대자연을
사람아 묻지 마소
눈도 미처 못 보거니
임이 능히 말할 손가
비로봉 알려하옵거든
가보소서 하노라
상상하기 힘든 대절경
과연 그렇습니다. 비로봉 경치는 상상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니, 하물며 말로 들어 알 줄이 있으리오, 오직 가보아야 그 사람의 천품을 따라 볼이만큼 보고 알이만큼 알 것이외다.
3시가 되자마자 저 서편 준허봉(浚虛峰) 머리에 뭉키어 있던 한 덩어리 검은 구름이 슬슬 풀리기를 시작하고 방향 잃은 바람이 정신 어바이 불어오더니 구룡연으로서 한 줄기 실안개가 일어나 옥녀봉 고운 머리를 싸고 돕니다. 그리고 문득 골짜기마다 햇솜 같은 구름이 뭉클뭉클 일어나며 미처 단예(端睨)할 새 없이 구룡연 골목을 감추고, 동해를 감추고, 3 , 4분 시가 못하여 운무가 사방을 가리고 음풍이 노호하여 아까 올라올 때와 꼭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진실로 헤아릴 수 없는 자연계의 변환이외다.
거룩한 이 경개(景槪)를
속안(俗眼)에 오래 뵈랴
거쳤던 구름막이
일진풍(一陣風)에 내리놋다
인간의 할일 바쁘니
돌아갈까 하노라
우리는 아직도 다 타지 아니한 불을 다시금 보고 은사다리를 밟았습니다. 한 층 한 층 올라올 때에 밟던 사다리를 밟아 내려갈 때에는 마치 무슨 영광에 찬 큰 잔치를 치르고 돌아오는 손님 같은 생각이 납니다. 1921년 8월 11 오후 2시부터 동 3시, 이것은 우리가 창세주의 초대의 특전을 받아 그 창조의 광경을 배관하던 기념할 날이요 시간이외다.
창세연(創世筵) 뵈옵다가
선주(仙酒)에 대취하여
창세송(創世頌) 아뢰옵고
석양에 옷을 날리며
은사다리 내리니라
(현대조선문학전집, 朝光社, 1938)
♣지은이
이광수(李光洙)는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아버지 이종원(李鍾元)과 어머니 충주 김씨의 3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이름은 이보경(李寶鏡)이다. 춘원(春園)이라는 아호(雅號) 외에 고주(孤舟)·외배라는 별호도 있다. 5세에 한글과 천자문을 깨치고 8세에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가세가 기울자 담배 장사를 하던 중, 그의 부모는 이광수가 11세가 되던 해(1902년)에 전염병 콜레라로 별세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이후의 그의 성장 과정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이광수라는 이름에 대하여(이가원 교수 증언)
'登岳陽樓歎關山戎馬'라는 것은 생략해서 ‘關山戎馬’…
平壤의 敎坊 妓生學校, 紅樓界에 인기가…春園 李光洙(1892~1950)씨가 平壤을 初期에 갔습니다. 갔을 때에 그 때 이름은 李寶鏡이라. 이보경인데 낮에는 불호로서 ‘보배 寶’字 ‘명경 鏡’字를 썼지만은 이 當時에 이보경인데 石北先生의 平壤에 말이에요. 그 심향이 一世紀를 넘어 말야 흘렀는데 거기서 큰 느낌을 받아서 내 이름을 光洙라고 지어야 되겠다. 그래서 李光洙가 된 겁니다.
*춘원이 「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를 발표한 해는 1922년(신생활)…이 무렵은 춘원이 30대로 상해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가 귀국하여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금강산유기」의 여정은 1921년 8월 3일 서울역을 떠나 기차로 철원을 지나 고산역(高山驛)에서 내려 자동차로 장안사(長安寺)에 이르고, 영원동(靈源洞)・망군대(望軍臺)・만폭동(萬瀑洞)을 거쳐 11일에는 최고봉 비로봉(毘盧峰)에 오르고 다시 장안사로 돌아 온정령(溫井嶺)을 넘고 만물초(萬物草)를 지나 8월 15일 구룡연(九龍淵)을 찾는 데서 1차 여행이 끝난다. 두 번째 금강산행은 이듬해 여름방학 때가 된다. 이때는 원산・장전을 거쳐 보광암(普光庵)・동석동(動石洞)・유점사(楡岾寺)・은선대(隱仙臺)・미륵봉(彌勒峰)・안무재 등 난코스를 정복하고 역행정으로 비로봉을 넘어 장안사로 내려온다. 「금강산유기」는 1924년 시문사(時文社)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1939년에는 「오도답파여행」과 합하여 『반도강산(半島江山)』이란 제호로 영창서관에서 간행되었다.…
여기 수록한 「금강산 비로봉등척기」는 「금강산유기」 가운데 가장 절정이 되는 비로봉 부분만을 저자가 발췌한 것으로 『현대조선문학전집』 가운데 옮겨 놓은 것을 손질하여 재수록한 것이다. (소재영 편, 『백두산근참기』,朝鮮日報社, 1989, p.165.)
*속 금강산 기행: 넘실대는 구룡연 물속의 용 한 마리 낚지 못하고
(이웅재, 04.7.25. 원고지 140매 정도의 글 중 일부)
조금 걷노라니 흔들다리가 나왔는데, 양 옆의 쇠줄은 새로 보수한 지 얼마 안 되는 듯 윤이 반짝반짝 나고 있었다. 금강문을 조금 지난 곳에서 다람쥐와 해후했는데, 놈은 도망가지도 않는다. 이곳 다람쥐도 이미 ‘사육’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 동안은 함교수와 함께 걸었는데, 나 때문에 그의 관광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서 느적느적 걸었는데, 그건 또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지난 번 마지막 등산지점이었던 옥류동에 도착하여서는 그때처럼 다시 무대바위 위에 올라서 보았다. 두 번째로 만나보는 바위, 무언으로 맞아주는 바위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옥류동은 천연기념물, 이곳 옥류담은 630㎡이고 그 위엔 길이 58m의 와폭(臥瀑)이 여유롭게 누워 있었다. 수심은 6m, 겉으로 보기엔 밑바닥까지 보이는 맑은 물이었다. 옥류다리 위쪽으로는 천화대(天花臺)가 굽어보고 있었고, 좌측 산협으로는 나무 계단길이 이어진다. 그 길을 지나면 비탈진 바위길인데, 그곳엔 수많은 낙서들이 보인다. 어느 관찰사의 이름을 새긴 글씨는 ‘觀察’까지만 보이고 ‘使’자는 반쯤 시멘트길 로 덮여져 있었다.
길은 다시 우측으로 계곡을 건너서, 좌측으로 깊은 협곡을 내려다보며 계속되었다. 길옆으로는 산오이풀, 고사리, 일월비비추, 조록싸리, 단풍나무, 소나무 들이 보인다. 어찌 보면 지리산과도 별 차이 없는 우리 땅인데…. 나무나 풀 하나하나가 마음을 아리게 하고 있었다. 연주담(聯珠潭)에서는 구룡폭포가 864m, 비봉폭포(飛鳳瀑布)에서는 750m라는 팻말이 보인다.
봉황이 긴 꼬리를 휘저으며 날아오르는 듯하다고 해서 비봉이라 한다는 이 폭포는 수직 높이가 139m, 그 길이는 166m나 된다는 폭포이다. 여기에 일곱 빛깔 무지개가 서고, 물빛마저 금빛, 은빛, 보랏빛으로 뒤엉기면 그 아름다움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12폭포, 옥영폭포, 구룡폭포와 함께 금강산 4대 폭포의 하나라고 하니 오늘 그 중 2개와 대면하게 되는 셈이다.
비봉폭포의 장관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걸음을 멈추었다. 아쉬운 점은 한 동안의 가뭄 끝이라 그 나는 듯한 물줄기는 마음속으로만 그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너럭바위 위에 비를 긋기 위해 텐트를 쳐 놓고 부조(浮彫) 작업을 하고 있는 여인이 있어 몇 마디 말을 나누어 보기도 했다.
왼쪽으로는 흔들다리가 보이는데, 우리 일행 몇 사람이 벌써 하산하기 시작한다. 다리를 건너자 휴게소. 막걸리, 맥주뿐만이 아니라 가래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2$씩에 판매하는 아가씨도 있었다.
가래나무, 재질(材質)이 단단하여 관재(棺材)로서도 인기였고, 그 열매인 가래는 악력기(握力器)가 생겨나기 전 손아귀의 힘을 기르기 위해 애용되던 물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요즈음은 가래를 구하기가 어려워져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두로 대용하기도 하는데, 그러다 보니 아예 호두가 그 원조(元祖)인 줄 오인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호두는 길쭉한 가래에 비해서 너무 둥글어서 두 개를 한 손아귀에 넣고 굴리기에는 버거워서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이어서 연담교 갈림길이 나오는데 구룡 350m, 상팔담 513m란 표지판이 보인다. 8선녀가 목욕했다는 그 유명한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상팔담도 보고 싶기는 했지만, 거기까지는 역부족, 구룡폭포를 만나보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목덜미에는 빗물인지 땀방울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물기가 계속 흘러 허리춤의 긴 수건으로 닦아가며 마지막 고바위 돌계단을 오르니 드디어 소동파도 보고 싶었다던 구룡폭포와 정식 대면을 하게 되었다.
설악산의 대승폭포, 개성의 박연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의 하나인 구룡폭포는 상하좌우 전체가 한 장의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더욱이 그 장엄함이 돋보이는 폭포이다. 폭포수가 떨어지며 파 놓은 수직 깊이 13m의 지반석(地盤石)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구룡연(九龍淵)의 물결이 넘실대고 있었다.
오른쪽 경사진 바위에는 ‘彌勒佛’이라 쓰인 글씨가 있고, 김일성은 그것을 선조의 귀중한 자취라 하여 잘 보호하라고 했다던가? 이곳은 삼면이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지형, 전형적인 분지였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합각건물인 관폭정(觀暴亭) 아래의 넓은 대(臺)였는데, 관폭정은 세 나라[三國] 이전 시기에 지었다가 없어진 것을 주체 50(1961)년 원상복구한 것이라고 했다.
상팔담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최규출 교수와 만나 사진 한 방을 찍고 새삼스레 폭포와 연못을 다시 한 번 눈에 담고 마음에 새겼다. 시간이 넉넉하면 구룡연의 시퍼런 물속에 살고 있는 용 한 마리쯤 낚시질하여 조룡대(釣龍臺)라는 이름도 하나 만들어 놓고 싶었으나, 벌써 하산한 일행들이 많아 원래부터의 ‘거북이’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내려가는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2010.11.28.일.18:44, 원고지 121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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