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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 12)가을과 추억들(續․고구마와 女大生 )

거북이3 2014. 8. 6.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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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북이 12)

              가을과 추억들(續․고구마와 女大生 )

                                                                                                                                   연대 李 雄 宰

 

  꼭 작년 이맘때였군요. 가랑잎의 소근거림이 더욱 애절한 정조를 띄우던 늦은 가을이었군요. 꽁초를 손가락 끝까지 타 들어가도록 열심히 빨아대는 H군이 꼭 그가 쓰고 있는 시처럼 차분히 의논을 해 왔읍니다. 우리 가을의 안마당에 낭만을 심어 보자는 것이었읍니다. 내 주머니는 항상 비어 있었으나 그때 나는 자조장학회라는 학생들 스스로 간의 노력으로 서로 도우며 학비를 조달하는 어두컴컴한 자조장학회의  실장이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돈을 돌려댈 수가 있었읍니다. 그래서 바로 E여대 정문 앞쪽에 「단물샘」이란 조그마한 가게를 하나 내었읍니다. 정성들여 간판을 쓰고, 친구를 불러다가 벽화를 그리고, 학교 뒷숲에서 기이하게 생긴 덤불나무를 가져다 놓고…….

  개업 첫날엔 우리 멤바 모두들 「아이네․클라리네」로 모였읍니다. 이름도 좋았지만 맞은편의 떠들썩한 다방보다는 훨씬 아늑한 분위기가 우리들의 마음을 흡족케 했기 때문이었읍니다.

  거기서 1학년의 P군은 「가을은 잘 끓인 커피맛」이라는 그의 싯귀를 뇌이며 우린 가을 색깔의 커피를 마시고 있었읍니다. 역시 P군이 그렇게 좋아하던 「엑소더스」가 다방 안을 죽도록 애무하고 있었읍니다. P군은 두 눈을 감고 아마도 무슨 상념을 하는 모양이었읍니다. 나는 그 장엄한 곡조에서 「모세의 출애급기」의 장면을 눈 앞에 그려보았읍니다. 「영광에의 탈출」― 그것은 아리도록 순진한 P군이 가장 좋하하던 곡이었읍니다.

  문학을 너무나 좋아한 까닭에 돈이 떨어져 자취할 도리마저 없어서 몇 끼니씩 걸르기도 일수였지만 그렇게 뱃속이 텅텅 비면 모든 것이 아름다와만 보인다던 그 잠잠한 얼굴. 그도 우리 지하실 멤바의 1인이었고, 실상 나는 노란 은행잎을 곧잘 주워들고 들어오는 그 P군처럼 낭만을 위해서라기보다, 그의 「엑소더스」를 위해서 「단물샘」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가을이 되면서부터 「지하실」에서 잠자리를 대치하곤 했던 것입니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그도 은행잎과 커피맛보다는 이제 생활에의 고뇌가 짙어가고 있는듯 했읍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읍니다.

  「배 고프지? 밥 먹으러 가자.」고 하면,

  「형! 점심은 얻어 먹었으니까 우리 커피 마시러 가요!」

하고, 두 눈을 티없이 맑아가는 하늘에 보내곤 하였었읍니다.

  그런데 하루는, 학교 앞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다시 백양로를 걸어 학교 지하실(자조 장학회실)로 들어갈 때였읍니다. 그는 여늬 때와는 달리 땅을 보면서 걷고 있었읍니다.

  「왜, 집생각?」

  「아녜요!」

  「하늘을 봐. 거기 진한 커피맛이 있쟎아.」

  「아 형님.」

하고 잠간 멈추었다가,

  「요샌 늘 땅만 보고 걸어요. 꼭 이맘때쯤 해서는 말예요.

  왜 그런지 아세요? 그건, 그건……. 아마 지금쯤은 백양로 어느 곳엔가 돈 4,000원이 떨어져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인 거예요. 왜 꼭 4,000원이라고 생각키우는진 나도 모르겠지만, 형, 꼭 누군가가 10분쯤 전에 이곳을 지나갔고, 그는 갖고 있던 돈을 봉투 속에 넣은채 이 부근 어디메쯤 떨어뜨렸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나는 오늘은 날씨가 꽤 차가워졌구나 하고 생각했읍니다.그래서 난 그때 「단물샘」건을 받아들이기로 했던 것입니다.

코딱지만큼이나 될까한 넓이였지만 「단물샘」에 딸린 온돌방이 그에겐 필요하다는 생각이었읍니다. 그리고 그도 「단물샘」 건을 찬성했읍니다.

  「형은 시간이 없으니까, 제가 봐 드릴게요. 고구마와 여대생은 멋 있을 거예요.」

  그의 얼굴엔 「밤으로 가는 기차를 타는 가시내」처럼 서글픈 웃음이 감돌았읍니다.

  「단물샘」은 오손도손 우리들 더꺼머리 총각들에 의해서 「오다가다 만날 수 있는 여대생들의 정거장」이 되었읍니다.

그 정거장에선 「맛탕」이라 불리우는 고구마 튀김을 전문으로 하고, 꿀빵, 도나스, 찹쌀 시루떡 등을 팔았읍니다.

여대생들의 웃음소리와 커피맛 낭만과.

  나는 그가 늘 좋아하던 조그만 「영광에의 탈출」을 하게 해 주었다고 생각하면서 흐뭇한 마음이었읍니다. 그가 지금은 이곳에 없군요. 어느 일선지구에서 커피 맛을 못내 그리워할 P군.

  다시 가을 속에 들어와서 이제는 없어진 「단물샘」을 추억해 봅니다. 「다사로운 맛과 멋」, H군의 말처럼 단물샘은 고향처럼 포근했던 보금자리였었읍니다. 지금도 「단물샘」의 단골손님이던 K군과 H군, 그리고 L양은 각각 2,30원씩의 외상값이 남아 있읍니다. 후년 이맘때쯤 제대해 나올 P군 보고 잊지 말고 있다가 받으라고 하여야겠읍니다.

                                           (1965.11.13.의 제1회 ‘4개 대학 문학의 밤’에서, pp.41-43.) (14.8.4. 원고지 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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