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새치기는 물론 새치기에 대한 응징도 하지 말아야…

거북이3 2015. 1. 1.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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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치기는 물론 새치기에 대한 응징도 하지 말아야…

                                                                                                                                                  이 웅 재

 

  청량리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기에 시간에 늦지 않게 왕십리행 전철을 타기 위해 야탑역으로 나갔다. 왕십리는 분당선의 종착역이었다. 한참 동안을 가야 했기에 될 수 있으면 앉아서 갈 수 있었으면 싶어서 경로석 표지가 있는 탑승구에 가서 섰다. 맨 앞자리였다. 전철이 들어왔다. 얼핏 보니 경로석 쪽에 자리 하나가 비어 있었다. 스크린 도어가 열렸다. 하차하는 사람들이 채 내리기도 전이었다. 맨 앞자리의 나보다도 먼저 전철에 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약간 늙수그레한 아주머니였다. 그녀는 바로 그 빈자리로 재빠르게 가서 앉았다. 말하자면 새치기였다. 기분이 영 떨떠름했다.

  6․25 직후, 대한민국은 새치기의 왕국이었다. 먹을 것, 입을 것들을 외국의 원조로 해결해 나가던 시절, 새치기는 삶의 기술이었다. 물량은 달리는데 점잖게 순서만을 기다리다가는 지푸라기 하나 건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경제대국이 되었으니 말이다. 새치기 같은 것은 없어져야 했다. 실제로 새치기는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아직도 없어지지 않은 분야들이 더러 있다. 그것이 주로 차 타기였다. 앞에서 말한 전철의 빈자리 차지하기, 심야의 택시 잡기 등이 바로 그것이다.

  ‘새치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몇 가지의 원칙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첫 번째는 ‘명분’이다. 새치기를 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리가 아파서’, ‘허리가 아파서’, ‘급한 일이 있어 빨리 가야 해서’, ‘어린애 때문에’ 등등의 명분 말이다. 하다못해 ‘천성이 남에게 뒤지는 건 참지 못하는 성미라서’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구실이라도 자기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어야 한다. 지금은 6․25 직후는 이미 지난 지 오래니까 말이다.

  두 번째로는 ‘잽싸야’ 한다. 상황 판단이 잽싸야 하고, 그에 따른 행동도 잽싸야 한다. 지하철을 탈 때를 보자. 줄서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 옆에 엉거주춤 서 있는 노인들, 전동차의 문이 열리자마자 슬며시 줄 앞쪽으로 다가와서는 내리는 사람들이 다 내리기도 전에 잽싸게 올라탄다. 노인네들이라고 얕잡아 보면 큰코다친다. 그런데 그분들보다도 더 잽싼 사람들이 있다. 대한민국의 힘, 아줌마들이다. 그들 앞에서는 난다 긴다 하는 잽싼 노인네들도 속수무책이다.

  그 다음 세 번째. 이는 두 번째하고도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일이라 하겠다. 그렇게 잽싸게 행동을 하려면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한다. ‘남들이 욕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서는 새치기를 할 수가 없다. 양심에는 아예 털옷을 입혀야 할 것이다. 바깥의 냉랭한 기운을 느끼지 못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복합어 ‘안면몰수’를 한다. 할아버지 한 분이 그렇게 뻔뻔한 아줌마에게 당하고서는 ‘허허’ 하고 허탈하게 웃는 모습쯤이야 우리가 적잖이 보아오는 흔한 일이 아니던가?

  그리고 ‘때로는 희생을 감수할 각오도 있어야’ 한다. 암표처럼 정가 외에 급행료를 지불해야 하는 일이 종종 생길 수 있음을 알아두라는 말이다. 장기 이식을 받으려는 사람들에게서 가끔 벌어지는 일이다. 장기 공급은 그 수요에 비하여 턱없이 모자란다. 느긋하게 순서를 기다리다가는 언제 숨질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비난과 희생을 감수하면서라도 새치기를 감행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2014년 7월 11일 자 세계일보 Sports World를 보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유명 레스토랑에서 ‘새치기’를 했다가 우리 돈 30만 원이 넘는 덤터기를 썼다고 한다. 텍사스의 한 유명한 바비큐 식당 ‘프랭클린’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이 식당은 때에 따라서는 2~3시간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은 곳인데, 오바마는 앞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식당에 들어서면서 순서를 양보해준 가족의 밥값은 자신이 지불하겠다고 호언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다른 테이블에 자리 잡고 있던 가족 일원들이 있었던 것을 채 몰랐다는 것이다. 30만 원이 넘는 계산서에 단 20달러밖에 없었던 오바마는 신용카드까지 꺼내어 식대를 결제할 수밖에는 없었단다. 한편,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이 새치기를 한 것을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145명으로, 순서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 옳았다고 대답한 사람 55명보다 월등하게 많았다고 하는데, 이는 일정이 바쁜 대통령이기에 그랬던 것이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 그런 식으로 새치기를 했다가는 목숨 자체가 부지될 수 있었을는지 의심스러울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와는 아주 다른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였으니, 염두에 두고 조심해야 할 일이다. ‘새치기’만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새치기에 대한 응징’도 엄청난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라서, 우리 모두, 새치기도 하지 말고 새치기에 대한 응징도 하지 말아야만 하겠다. 변호사인 양은경 법조전문 기자가 쓴 조선일보 2014.12.30. A12면 기사를 보면 그래야 하는 이유를 십분 숙지할 수가 있을 것이다.

  “깜빡이를 켜지 않고 갑자기 끼어드는 얌체 차량에 깜짝 놀란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다시 그 차를 추월해 앞을 가로막아 서서 혼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정당방위 아니냐’고 자기 합리화를 할지 모르지만 절대 그래선 안 된다. 단순 얌체 운전은 손가락질의 대상이지만, 사고를 유발하는 보복 운전은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운전자들에게는 대부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죄가 적용되었다. 화가 나 ‘끼어들기’만 했어도 법정형이 징역 1년 이상인 폭처법 위반(집단·흉기 등 협박)죄가 적용되고, 상대 운전자가 조금이라도 다쳤다면 법정형이 징역 3년 이상인 폭처법 위반(집단·흉기 등 상해)죄가 적용된다. 이 죄명에는 벌금형이 아예 없다.” (14.12.31. 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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