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의 새로운 해석
이 웅 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어디선가 구성진 가락이 들려온다. 아리랑고개, 그건 어디에 있는 고개인가? 서울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아마도 미아리 쪽에 있는 ‘아리랑고개’를 머릿속에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리랑고개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김열규(金烈圭)는 『아리랑…역사여, 겨레여, 소리여』(조선일보사, 1987.)에서 말했다.
“우리들 국토의 지도를 펼쳤을 때,…‘아리랑 고개’란 것은 찾을 수가 없다. 항간에 속설(俗說)이나 속칭으로 해서 떠도는 몇 곳의 ‘아리랑 고개’가 있기는 하지만, 별로 두드러진 고개도 아니고 재도 아니다. 그 고개 많은 정선이며 평창 고을, 「아리랑」의 본고장인 이 산골 둘레에도 「아리랑」의 이름이 붙은 고개는 단 하나도 없다. 우리들은 「아리랑」을 지도나 지리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p.44.)
그러면 ‘아리랑’의 어원(語源)은 ‘고개’에서 찾을 일이 아닌 것이다. 그 어원에 대한 학설은 1990년대에서도 이미 26종이 넘는다고 하였으니(朴敏一, 韓國 아리랑文學 연구, 강원대학교 출판부, 1990.4.10., p.39.), 헷갈리고 헷갈리는 것이 ‘아리랑’이라는 말의 뜻이라고 하겠다. 이제까지의 모든 연구들을 일별해 보면, 노력의 흔적은 태산과 같았으나 그 결과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은 실정이다. 박민일은 아리랑의 숫자는 약 186종 2,277연이 조사됐다고 말하고 있으니(상게서, 머리말 참조), 어느 아리랑을 기준으로 연구를 하느냐에 따라서 그 학설도 구구각색일 수밖에는 없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일단 가장 널리 불리고 있는 ‘아리랑’의 가사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 나가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金練甲 편저, 아리랑, 現代文藝社, 1986.10.25.,p.388.)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고 했다. 보내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신보다도 더 나은 상대를 찾아 떠나는 ‘님’이 야속한 것이다.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것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라도 콱 나서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내게로 다시 돌아와 달라’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왜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려고 하는가? 그 고개 너머에는 지금의 상태보다는 더 나은 무언가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오(밀양아리랑, 상게서, p.504.)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 달라는 것은 ‘그 너머’에는 바로 현실을 뛰어넘는 바람직한 삶이 존재하기 때문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니까 ‘아리랑 고개’란 넘어가야만 하는 고개인 것이다. 왜? 그것은 ‘넘어가기 이전’보다 ‘넘어간 곳’이 내가 지향하는 공간인 때문이다.
‘아리랑 고개’는 어떠한 고개인데 넘어가고 싶어 하는가? 왜 그것을 극복하고 싶어 하는가? 그것은 넘어가기 이전의 생활은 자신이 생각하기로는 넘어간 이후의 생활보다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리랑’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일이라고 하겠다. 다시 김열규의 말을 들어보자.
“「아리랑」은 한사코 가슴을 후비고 찔렀던 것이다”(김열규, 상게서, 머리말, p.9)
‘아리랑’은 ‘가슴을 찌르는 것’이다. 아리랑이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등재된 지 2년이 됐다. 여기서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에 공통으로 붙는 ‘랑’을 떼어놓고 생각해 보자. 남는 것은 ‘아리’와 ‘쓰리’다. 그렇게 놓고 보면 ‘가슴을 찌르는 것’은 이 ‘아리’와 ‘쓰리’의 어의(語義)와 관련된 것이므로 자연히 ‘아리다’와 ‘쓰리다’라는 말을 연상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아리다’와 ‘쓰리다’에서 어미 ‘-다’를 떼어놓으면 그게 바로 ‘아리’와 ‘쓰리’가 아닌가? 이는 곧 ‘아리다’와 ‘쓰리다’의 어간형 명사가 바로 ‘아리’와 ‘쓰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만드는 요인이다. 이와 같은 어간형 명사로는 ‘가물(←가물다)’, ‘신(←신다)’, ‘마무리←마모리(←마모리다[마무리하다])’ 따위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추는 무엇인지 찜찜하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다. 그것은 유추 자체가 너무 단순한 때문이라 느껴진다. 보다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한 소이(所以)다. 그래서 위의 유추를 역방향으로 추적해 보기로 한다. 바로 ‘아리’와 ‘쓰리’가 어디서 온 것일까를 천착해 보는 일이다. ‘갖+이→가지[枝]’, ‘물+이→무리[群]’, ‘낛+이→낙시→낚시[釣]’와 같이 어형이 장형화되어 ‘알+이→아리’, ‘쓸+이→쓰리’로 볼 수는 없을까?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김연갑 진도아리랑 후렴, 전게서, p.292., 아리랑<해남지방>, 전게서, p.327. 및 아리랑<신안지방>, 전게서, p.331.)
여기서 ‘아라리’라는 말을 주목해 보자. 이 말은 바로 ‘알+아리’를 연철(連綴)한 것으로 분석할 수가 있으며, 따라서 이는 ‘알’이라는 말이 ‘알+이→아리’로 어형이 장형화되었음을 명료하게 증명해주는 표현이라 여겨진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라는 표현은 그러니까 ‘아리랑’이라는 말이 ‘아라리(알+아리)’에서 ‘났다(생겨났다)’는 뜻이라는 말이다.
‘알’의 사전적 의미는 ‘조류, 파충류, 어류, 곤충 따위의 암컷이 낳는, 둥근 모양의 물질’이다. ‘알’은 결국 ‘생명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우주의 근원’이다. 우주의 모양, 하늘의 모양, 모든 천체의 모양은 바로 이 둥근 모양이다. 지구도 둥글고, 달도 둥글고, 태양도 둥글다. 우리의 옛 선조들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천원지방(天圓地方)]라고 생각했다(사실 땅 곧 지구도 둥글지만 말이다). 그래서 인공 연못을 조성할 때는 둥근 모양 속에 네모진 섬을 만들어 놓거나, 네모진 모양 속에 둥근 섬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둥근 것은 근원이다. 사람이 죽으면 무덤에 묻힌다. 요즈음에 와서는 무덤의 모양이 땅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네모진 것도 생겨났지만, 예전에는 둥근 모양이었다. 지상으로 드러나는 반원형, 그리고 지하에 또 반원형, 그렇게 무덤은 둥글었다. 생명의 근원인 둥근 모양의 알에서 태어난 인간은 그 마지막 죽음을 다시 둥근 모양으로 마감했던 것이다.
무덤 속은 아주 편안하다. 나는 무덤 속에 들어가 누워본 적이 있다. 군대를 늦게 가는 바람에 울진 삼척 공비 사태 때 이등병 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내가 소속되었던 36사단이 그 공비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현장으로 이동한 적이 있었다. 임시 사단 막사를 건립하다 보니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사주 경계를 해야 하는데, 날씨는 춥고 산자락에 임시 초소를 만들려니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최하 계급인 나는 임시변통을 하기로 했다. 바로 다른 곳으로 이장한 무덤이었던 곳의 돌무더기들을 치워버리고 그 위에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설치한 다음 판초(poncho: 모자가 달린 비옷)를 얹어 덮으니 아주 훌륭한 비밀 초소가 되었던 것이다. 밤이 이슥해 졌는데, 그 무덤 속에 누워 있자니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무덤이란 그런 곳이었다. 둥근 것은 생명의 탄생일 뿐만 아니라, 그 편안한 마감의 장소로도 아주 적격이라는 생각이다.
하나의 생명이 태어날 때는 무척 ‘아리다.’ 알에서 태어나는 난생(卵生)의 경우에만 ‘껍질이 깨어지는 아픔’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태생(胎生)의 경우에도 탄생의 순간은 무척이나 고통이 따른다. 모든 아픔 중에서도 가장 그 통증의 정도가 심한 것이 출산(出産)할 때의 진통(陣痛)이라고 하지 않던가? ‘아리랑’의 ‘알’ 또는 ‘아리’는 그러한 아픔, 그러한 아림을 내재하고 있는 말이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따른다면 ‘쓰리랑’의 ‘쓰리’는 ‘쓸+이→쓰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쓸’은 무엇인가?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여울’의 함경도 방언으로 ‘강이나 바다의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세게 흐르는 곳’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매우 위험한 곳이요, 엄청 험난한 곳이다. 그런 곳을 지나려면 ‘아리고 쓰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쓸+이’에서 생겨난 ‘쓰리’라는 말의 뜻은 또 무엇일까? 역시 사전적 의미는 ‘혓바늘의 평북 방언’이라고 한다. ‘혓바닥에 좁쌀알같이 돋아 오르는 붉은 살’을 뜻하는 ‘혓바늘’이 돋았던 기억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말로 ‘아리고 쓰린 것’이 혓바늘이 아니던가?
‘아리’와 ‘쓰리’는 바로 그렇게 ‘아리고 쓰림’을 나타내는 말이다. 세상은 ‘고해(苦海)’라고 하지 않던가? 태어남 자체가 그렇게 ‘아리고 쓰릴’ 뿐만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세상살이가 ‘아리고 쓰린’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그 ‘아리고 쓰린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고 싶은 것이다.
‘아리랑 쓰리랑’의 ‘랑’은 무엇일까? 그것은 ‘너랑 나랑’의 ‘랑’과 같은 것, 그러니까 ‘너와 나와’의 ‘와’와 같은 것이다. ‘아리랑 쓰리랑’은 결국 비슷한 말의 반복, 강조를 위한 반복인 셈이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는 ‘아리와 스리(쓰리)는 모두 알, 아리에서 생겨났다’는 말인 셈이다. 그렇게 아리고 쓰린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살이라는 점은 다음과 같은 가사가 보다 선명하게 증거하고 있다고 하겠다.
청천하늘엔 별도만코/ 요내 가슴엔 수심도 만타(남원아리랑, 상게서, p.319.)
현실은 그렇게 맑은 하늘의 별만큼이나 ‘수심(愁心)’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벗어나고 싶다. 아리랑의 연원이라 할 수 있다는 ‘정선아리랑(朴敏一, 전게서, p.24 참조.)’은 그 가사만도 500여 수에 달한다고 하는데(上同), 그 중의 하나인 ‘정선 아라리(1)’에서도 현실은 ‘검은 구름이 막 모여’ 들어서 ‘억수장마’라도 질 기세로 서술된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萬壽山)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김연갑, 상게서, p.86.)
그러지 않아도 힘든 인생살이, 거기에다가 우리는 한때 일제의 질곡 속에서 살았다. 당시에 불리던 아리랑의 가사를 보자.
5. 밭은 헐려서 新作路되고/ 집은 헐려서 停車場되네
6. 말깨나 하는 놈 裁判所 가고/ 일깨나 하는 놈 共同山 간다
7. 兒깨나 낳을 년 갈보질 하고/ 목도깨나 메는 놈 부역(賦役)을 간다(本調아리랑, 상게서, p.247.)
한(恨)이 맺혀 있는 이러한 현실은 어떻게 해서라도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고자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것이요, 그것을 초극하고자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 달라는 것이다. 아리랑고개를 넘어야 하는 이유를 보다 구체적으로 적시한 대목을 찾아보자.
저 고개 넘으면 편하련만/ 그 고개 못 넘어 요 신세네(淸津아리랑, 상게서, p.214.)
똑 같은 대목은 아리랑<성진지방>(諺文朝鮮口傳民謠集, 1933.)에도 나온다.(김연갑, 아리랑<성진지방>, 상게서, p.215.)
서러운 인생살이, 한 맺힌 현실을 뛰어넘으려면 그것을 뛰어넘을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은 무엇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일까?
豊年이 온다네 豊年이 와요/ 이 江山 三千里 풍년이 와요(경기아리랑 4, 상게서, p.234.)
이것은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면 당장이라도 찾아올 것 같은 내일을 소망하는 내용이다. 먼 훗날 도래할 수 있는 희망은 현실 극복에 큰 힘이 되기에는 너무 요원하다. 내일이라도 현실화될 수 있는 ‘풍년’이야말로 절로 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이다. 이와 같거나 비슷한 대목은 김연갑의 상게서에서만도 남원아리랑, 서산아리랑, 아리랑前編, 本調아리랑, 아리랑<함흥지방> 등에서도 나온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흥흥흥 아라리가 났네(후렴 목록 112, 진도아리랑, 상게서, p.519.)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후렴 목록 182, 진도아리랑, 상게서, p.524.)
이처럼 ‘흥흥흥’ 또는 ‘응응응’이라는 의성어를 사용하여 흥을 돋우기도 하고, 다음과 같이 ‘얼씨구’나 ‘얼시구’라는 감탄사를 사용하기도 한다.
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리랑 얼씨구 아라리야(아리랑(1)<양평지방>, 상게서, p.255.)
아렁아렁아라리요/ 아리랑얼시구노다가게(강원도아리랑(2), 상게서, p.35.)
아리아리 아라리요/ 아리랑 얼시구 노다노다 가세(아리랑(1)<양양지방>, 상게서, p.74.)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얼시구 노다가세(인제 아리랑타령, 상게서, p.76.)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얼시구 날 넘겨주게(후렴 목록 110, 밀양아리랑, 상게서, p.519.)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흥이나 절시구 아라리가났네(후렴 목록 183, 진도아리랑, 상게서, p.524.)
한마디로 흥으로써 현실을 초극하여 승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바로 아리랑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김소월의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와 같은 꾹꾹 참는 일을 뛰어넘는 고차적 세계를 읊은 것이 ‘아리랑’이요, 그 현실을 초극했을 때 저절로 찾아드는 ‘신명’을 미리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주로 ‘아리랑’의 후렴구이다.
체념적 운명론적인 恨풀이‧怨풀이가 아니라 밝음과 열림을 향한 극복론적인 풀이였음이 갈무리된다.(朴敏一, 전게서, p.275.)
그러한 ‘신명’은 ‘랑’을 위시한 ‘아리랑’이라는 음운 전체에서부터 이미 배태되어 있다. ‘성대의 진동을 받은 소리가 목, 입, 코를 거쳐 나오면서, 그 통로가 좁아지거나 완전히 막히거나 하는 따위의 장애를 받지 않고 나는 소리’(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풀이)인 모음, 그 중에서도 ‘어감(語感)이 밝고 산뜻한 모음’(표준국어대사전)인 양성모음이 주로 사용되었고, 게다가 막힘없이 굴러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유음(流音) ‘ㄹ’과 명랑하고 밝은 느낌을 주는 비음(鼻音)(이웅재, 수필 쓰기 7, [산문에서의 운율 및 소리마다의 빛깔], http://blog.daum.net/leewj1004 참조)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저절로 흥이 느껴지는 소리, 신명을 불러오는 소리가 되었다.
이러한 ‘흥’과 ‘신명’을 예비하고 있는 ‘아리랑’은 누가 무어라고 해도 가장 한국적인 노래요, 그 노래가 예비해 두었던 밝은 미래에 대한 소망의 힘이 우리 한민족으로 하여금 5천 년 동안 지속되었던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기적을 이루어 주었던 것이다. (15.2.4. 원고지 40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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